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절)

사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의한 행위는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생명의 말씀에 의해 피동 되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의 형성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은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롬4:18절)입니다. 말씀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여호와가 아브라함에 임하시고(창18:10) 난 다음에 그 말씀대로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 그리스도의 동선을 믿음으로 쭉 따라가서 그 분과 함께 동거하는 자리에서 성령의 임재를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일 곧 그 말씀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말씀을 듣고 계시를 받아 깨닫고 그 영과 생명을 받고 또 받으면 믿음과 행위 곧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눅10장에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비교를 보면 예수님을 집에 초청한 것은 마르다입니다(눅10:38) 그러나 그는 분주했습니다(눅10:40)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습니다(눅10:39)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불구덩이에 건져내어 자신의 생명을 주신 새 피조물입니다. 철저하게 주로 인해 살고 주로 인해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그 분이 동하면 동하고 그 분이 정하면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리는 주님의 발치여야 합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을 대접하려고 바쁘면 안 됩니다. 건방진 일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릴 때 임하고 자신의 것으로 이룩됩니다. 마르다처럼 서서 대화를 하듯 해서는 말씀이 자신의 것으로 스며들지 않습니다. 또 마리아처럼 주님 앞에 앉아야 합니다. 아마 마르다는 서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을 겁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에베소는 주님과 더불어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엡2:6) 다음에 행함이 나오고 혈육의 싸움인 영적인 전투가 벌어진다는 사실입니다(엡6:12) 마르다는 예수를 대접하려는 자신의 존재감이 충만하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 앞에 앉아 말씀을 받는 존재감뿐입니다. 겸손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며칠 태풍과 겹친 일로 너무 분주하다보니 사람이 멍하게 되고 몸이 천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그게 하나님의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부터입니다(요6:29) 그래서 우리의 자리는 언제나 주님의 발치입니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I'm nothing)는 고백으로 그 앞에 앉아서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의 일을 한답시고 서서 쏘다니며 바쁘지 마세요. 마리아처럼 조용히 주님을 받아 생명의 단지가 되세요. 분주한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그 분과 함께 아버지의 우편에 앉으세요. 호수가 달을 담듯 주님의 임재 안에서 주의 영과 생명을 담아 그 형상과 영광을 영안에 가득 담으세요. 그러면 믿음과 행함의 원리를 터득하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