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 드릴수 잇을까

[스크랩]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원본: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Should Genesis be taken literally?)

창조론자들은 성경 전체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자주 비난당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는 열쇠는, 논의하는 책 또는 부분에 대한 저자의 의도를 확인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다음의 것들이 분명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詩) - 시편의 경우. 관념의 반복 또는 대구법이 영국의 전통적 시에서 중요시 되는 운(소리의 대구법)과 운율(시간의 대구법)이 없이, 시에 관한 히브리인의 관념과 일치한다. 이것이 시편이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질 수 있는 이유이며, 아직도 문자적인 간절함과 시적인 맛의 대부분을 간직하고 있는 이유이다. 반면에 전통적인 서양의 시들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을 때 리듬과 운율의 요소들은 대게 잃어버리게 된다.        

비유 - 예수님의 여러 가지 말씀의 경우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23) 같은 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것은 비유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며, 씨나 흙과 같은 여러 가지 항목들에 대한 의미를 그분이 직접 알려 주셨다.
예언 - 구약의 뒷부분에 있는 책들(이사야에서 말라기 까지)의 경우.
서신 - 신약에서 바울, 베드로, 요한 및 다른 사람들이 쓴 사도서신의 경우.
전기(傳記) - 복음서의 경우.
자서전/증언 - 사도행전의 경우. 저자 누가는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개종한 것을 역사적 사실로 언급한 뒤에(행 9:1-19), 바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증언의 일부로써 이 개종의 경험을 포함시키는 기회가 두 번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22:1-21, 26:1-22).인증된 역사적 사실들 - 열왕기상·하 등과 같은 책들의 경우.
따라서 성경의 각 책들의 문체와 내용을 통해 볼 때 그에 관한 저자의 의도는 아주 분명한 것이 보통이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저자는 누구였으며, 기록한 그의 문체와 내용으로부터 어떤 의도가 드러나 보일까?


창세기의 저자

주 예수님 자신과 복음서 기자들은 율법이 모세에 의해 주어졌다고 말했으며(마 10:3, 눅 24:27, 요 1:17), 유대인 학자들 및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한결같은 전통과, 요즘의 보수적인 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창세기가 모세에 의해 쓰여 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에는 ‘ ···의 후예(히브리어로 톨레도스 = ‘혈통’, 즉 ‘혈통의 기록’이라는 뜻)[1]는 이러하니라’ 라는 구절이 열한 절에 들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주: 창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참조), 점토판에 새겨 보존된 족장들의 기록이 아담-셋-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계통을 따라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전해져 내려오던 것을 모세가 참고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그들이 언급한 사건의 뒤에 따라 나오며, 각 구절에 기록된 사건들은 모두 지명된 개개인의 죽음 뒤가 아니라 앞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위첨자(superscript) 즉 표제가 아니라, 아래첨자(subscripts) 즉 마감 서명일 가능성이 유력하다. 그에 대한 가장 유력한 설명은, 아담, 노아, 셈 등이 그들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의 설명을 각자 기록했으며, 모세는 성령의 인도 하에 이들을 발췌하고 편집하여 자기 자신의 주석을 달아서 현재 우리가 창세기라고 알고 있는 책 속에 삽입했다는 것이다.
[2] (\'모세는 창세기를 정말로 썼는가? : 성경을 훼손하고 있는 사기적인 문서가설\' 을 보라)

바벨론 서판 조각이 니푸르에서 발견되었는데, 그곳은 고대 바벨론 지역으로써 아브라함이 나온 곳이 바로 그 지역이다. 검정색 테두리를 한 부분이 대홍수에 관한 기록이다. 전 세계적으로 홍수에 관한 내용이 300개 이상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 약 30개는 문자로 남아 있다. 몇 개는 원래의 기록인 성경과 상세한 부분까지 현저하게 일치한다.

창세기 12-50장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및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였던 야곱의 열두 아들에 관한 삶을 묘사하고 있으므로 신뢰할만한 역사로서 쓰여졌음이 매우 분명하다. 유대민족들은 초기 성경시대로부터 현재까지 줄곧, 창세기의 이 부분이 그들 나라 역사의 사실적 기록이라고 믿어왔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이 부분은 우리의 주요 관심사이며, 자유주의 학자나 현대 과학자들 및 회의론자들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부분이다.


창세기 1-11장
이들 중 시가 들어있는 부분이 있는가?
특별히, 창세기가 말하는 것을 기원에 관한 오늘날의 현대 이론과 일치시키려는 일부 자유주의 목사와 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인 ‘신학적 시’가 들어있는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히브리 시를 구성하고 있는 ‘개념의 대구법’이 의미하는 바를 다소 깊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시편 1:1을 생각해 보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서 우리는 명사와 동사의 사용에 있어서 3중의 대구법을 보게 된다:

        좇다(walketh)    꾀(counsel)   악인(ungodly)
        서다(standeth)   길(way)        죄인(sinners)
        앉다(sitteth)      자리(seat)     오만한 자(scornful)

이러한 명백한 대구법뿐만 아니라, 은밀하고도 미묘한 의미의 진행도 있다. 첫 번째 열에서, ‘좇다’는 단기간의 면식을 나타내고, ‘서다’는 의논할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앉다’는 장기간의 연루를 말한다. 두 번째 열에서, ‘꾀’는 일반적 권고를 나타내고, ‘길’은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을 말하며, ‘자리’는 마음을 정한 상태를 의미한다. 세 번째 열에서, ‘악인’은 소극적인 나쁜 사람을 나타내고, ‘죄인’은 적극적인 나쁜 사람을 뜻하며, ‘오만한 자’는 남을 경멸하는 나쁜 사람을 의미한다.
 다른 형태의 히브리 시로 잠언 27:6에서와 같은 대조적 대구법을 들 수 있다: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또한, 시편 46:1에서와 같은 완성적 대구법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3]
그러면 우리의 문제로 돌아가자. 창세기의 처음 열한장 중에 신학적 시가 어느 하나라도 있는가?
 
답 : 없다. 이 열한 장에는 드러난 형태이든 숨어있는 형태이든 히브리 시의 형태에 대한 어떤 정보나 암시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주 : 물론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가 열 번 나오고,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심히 좋았더라’가 일곱 번, ‘그 종류대로’가 열 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 날이니라’가 여섯 번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은 위에서 논하는 시적인 형태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사실에 대한 서술이므로, 그 반복은 반복되는 단어의 중요성을 나타내려는 강조를 위한 것이다.


시리아 에블라에서 발견된 창조 서판으로 기원전 3천년 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위대한 창조의 작업을 하신 분이 ‘루갈/Lugal’이라고 하는데, 문자적 의미로는 ‘위대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모세의 시기보다 1000년 이전에 사람들이 창조 이야기를 알고 있었으며, 문자에 대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이것은 창세기 앞부분의 장들은 솔로몬 시대보다 수백 년 이후에 최초로 기록된 것이라는 자유주의적인 생각이 명백히 잘못된 것임을 보여준다

일부 현대주의자들이 제시하듯이 이 열한장 중에 비유가 들어있는가?

아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는 그분이 그것을 비유라고 말씀하시든가, 아니면 그것을 미소와 함께 소개하셨으므로 청중들로 하여금 그것이 비유라는 것이 명백하게 하셨다. 그런 예는 ‘천국은 마치 ···’ 등과 같은 그분의 말씀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창세기 1-11장의 저자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고 그런 문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이들 열한 장에 예언이 들어 있는가?

비록 이 부분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두 가지 약속이 훗날에 성취된다는 견지에서 예언적이기는 하지만, 전체 문맥상으로는 예언이 아니다. 그 중 하나는 창세기 3:15 로서,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여자의 후손’(예수님)이 궁극적으로는 사탄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신 것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 ‘그(메시야)의 발꿈치’[5] 라는 표현 때문에 유대인들의 탈굼[4](Targums, 아람말로 번역된 구약성경)까지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후손(‘seed’)을 메시야(Messiah)로 해석해 오고 있다. 이 구절은 성경에서 정상적으로 아이의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반하여(예로 창세기 5장, 11장, 역대상 1-9장, 마태복음 1장, 누가복음 3:23-38), 메시야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부름으로서 동정녀탄생(virginal conception)을 또한 암시하고 있다. 

또 하나는 창세기 8:21-22와 9:11-17이다. “여호와께서 ···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이 부분에 서신이나 전기, 또는 자서전/증언이 들어 있는가?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던 아래첨자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아담이 창조의 제1일에서 6일까지의 사건들을 알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알려주셨음이 분명하다. 아담은 제6일에 가서야 지어졌으므로 그 이전의 사건들에 관해서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해 주셔야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견해는 창세기 2:4a의 말씀에서 강조된다. ‘하늘들과 땅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들의 내력이 이러하니라 (KJV 직역).’ 제7일, 안식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이 앞인 창세기 2:2-3에 포함되어서, 그로써 (예상할 수 있듯이) 전체 7일의 주간에 대한 기록이 완료되고, 그 뒤에 이 아래첨자 혹은 마감 서명이 등장한다.

그리고는 창세기 2:4b-5:1a의 사건들이 뒤따른다. 이 부분에서는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 그리고 그들의 아들들에 관한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비록 3인칭으로 쓰여 있기는 하지만, 에덴동산과 하와의 창조(2장),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배반(3장) 및 그들의 후손들의 행적(4장-5:1)에 관련하여 아담이 알고, 보고, 경험했던 것들에 대한 개인적인 설명을 읽을 수 있다(주: 3인칭의 사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세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에서 자신의 일생에 대한 긴 설명을 3인칭으로 썼다.) 이 부분은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라는 말로 마친다.
 
타락 이전에 아담이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로부터 창세기 1:1-2:4a를 그가 쓸 수 있었다는 것과, 창세기 2:4b-5:1을 그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록으로 썼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그의 능력을 고려해 볼 때 그렇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담은 성인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이 그에게 부여한 모든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DNA에 부여받았다. 그는 원숭이가 아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는’ 데에 충분한 원예술을 알았으며(창 2:15),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동물들을 인식하고 이름 붙일 정도로 광대한 지능을 가졌다(창 2:19). 그와 하와는 알파벳을 배운 적이 없어도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전혀 쓸 수 있는 기능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7]


추정되는 모순

창세기 2장에 나타나는 사건의 순서와 1장에서의 순서 사이에 추정되는 모순은 어떠한가? 하나도 없다!   

다음의 두 구절을 읽어보면 제 2장은 식물과 동물이 아담 이전에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창 2:19) [강조가 추가됨].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줄 때는(창 2:20) 이미 그 동물들이 존재해 있었다. 창세기 2:20에 나열된 동물의 순서에도 크게 모순 되는 것이 없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을 만난 순서로 짐작되며, 반면에 창세기 1:20-25에는 그들이 창조된 순서가 주어져 있다. 헨리 모리스(Henry Morris)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실제로 아담에게 나아온 동물은 사람과 아주 친밀하며 사람에게 순응하여 사귀기에 아주 쉬운 후보자들뿐이었다. 여기에는 공중의 새와 육축(20절 - 아마도 길들이기 쉬운 동물들)과 들의 짐승들이 포함되는데, 들의 짐승은 사람들의 거주지 근처에 사는 작은 야생동물임이 분명하다. 포함되지 않은 동물로는 바다의 물고기, 기는 것들, 그리고 땅의 짐승들(창 1:24)인데, 땅의 짐승이란 사람 및 경작지로부터 상당한 거리에서 사는 야생동물로 짐작된다.”[8]
 
지리적인 위치의 이름을 고려해보면, 대홍수 이전의 세상이 완전히 멸망되었으므로, 홍수 이전에 땅이나 강들의 형상이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다. 대홍수 이전에 이름 붙여진 땅과 강들은 대홍수 이후에 유사하게 이름 붙여진 특징과 일치하지 않는다.
 
창세기 2:18-25의 목적은 창조에 대해 또 다른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아담과 동물들 사이에 어떤 형태이든 친족관계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를 닮은 동물은 하나도 없으며, 어떤 것도 그에게 우정이나 교제를 제공할 수 없다. 그것은 아담이 동물들로부터 진화되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생령’이기 때문이다(창 2:7 및 1:27). 이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담을, 그분이 말을 걸 수 있고, 그는 응답할 수 있으며, 그분과 상호 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성경의 솔직한 진술은 인간 진화의 개념과 상치된다.

따라서, 아담이 창세기 2:4b-5:1의 가장 가능성 있는 저자이며, 이 부분은 에덴동산에서의 사건, 하와의 창조, 타락, 및 가인과 아벨과 셋의 삶에 관해 그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록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증거가 충분히 많다.

창세기 6:9b에서 10:1a까지의 부분은 주로 방주와 대홍수를 취급하며 다음의 말로 마친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이러한 어법으로 보면 이 부분은 노아의 아들 중의 하나가 썼음을 암시하는데, 모세가 셈의 계통을 이었으므로 아마도 셈일 것이다. 이 장들은 거기에 포함된 내용이 매우 상세한 것으로 보아 눈으로 목격한 것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창세기 8:6-12를 생각해 보고, 어떻게 해서 눈으로 목격한 설명의 특징인 확실성의 고리를 담고 있는지 주목하라.
 
“사십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지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놓으매 저녁 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감한 줄 알았으며 또 칠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창 8:6-12)
  이렇게 세밀한 설명은 신빙성 있는 목격에 대한 증언의 본질이다. 그것들은 진실의 고리를 갖고 있다.
아래첨자로써 기술된 창세기의 이 부분들은 영원한 기록을 만들어서 전할 목적으로 그 안에 이름이 들어있는 사람이 쓴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렇다면, 이들 처음 열한 장은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었는가?
답 : 몇 가지 이유로, 그렇다.


창세기 내에서의 증거

1. 창세기 자체 내에 증거가 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유대 사람들은 12-50장을 그들의 사실적인 역사 기록이라고 항상 여겨왔으며, 또한 1-11장의 서술 방식이 12-50장의 방식과 현저히 다르지 않다.

2. 다음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히브리어 흠정 강좌 담당교수였던 제임스 바(James Barr) 교수가 1984년에 썼던 편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한, 세계 여러 대학에서 히브리어나 구약을 담당하는 교수 중에는 창세기 1-11장의 저자(들)가 그들의 독자에게 다음의 개념을 전달할 의도를 갖고 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a) 창조는 연속되는 6일에 걸쳐 일어났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가 겪는 24시간의 하루와 같다. (b) 창세기 가계에 들어있는 숫자는 세상의 시작으로부터 성경 이야기의 나중 단계까지의 연대기에 단순히 더할 수 있다. (c) 노아의 홍수는 세계적인 것이며, 방주에 있던 사람들 외에는 모든 인간과 동물의 생명을 절멸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혹은 부정적으로 보아서, 창조의 “날들”이 긴 시대의 시간이라고 보는 변증적 논법이나, 년한의 숫자가 연대기적이 아니라거나, 홍수가 단순히 메소포타미아에 제한적이라는 내용은 내가 아는 한 그런 교수 중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9]

3. 창세기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이다. 이 주권은 창세기 1-11장의 네 가지 현저한 사건(창조, 타락, 대홍수, 바벨의 흩어짐)과 관련한 하나님의 행동 및, 창세기 12-50장의 네 명의 두드러진 사람(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과 그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따라서 창세기 전체는 어떠한 부분이라도 신화적이고 실제 역사가 아니라면 실패로 끝나게 되는 통일된 주제가 있으며, 한편 각 부분은 다른 부분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을 보충해준다.[10]


성경의 다른 책에서의 증거

4. 창세기 1-11장에 언급된 주요 인물들은 성경의 나머지에서 실제의 (신화적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람으로 종종 여러 번 언급된다. 예로써,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및 노아는 성경의 창세기 이외의 15권에서 인용된다.

5.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혼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창세기 1:27과 2:24를 인용함으로써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실제의 역사로 언급하셨으며(마 19:3-6, 막 10:2-9), ‘인자의 오심’에 관한 그분의 가르침에서 노아를 실제의 역사적 인물로, 대홍수를 실제의 역사적 사건으로 언급하셨다 (마 24:37-39, 눅 17:26-27).

6. 창세기의 처음 열한장이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면, 나머지의 성경은 그 전체의 의미로써 불완전하며 이해할 수 없다. 성경의 주제는 구속하심이며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창세기 1-11장에서 드러난다.
  i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창세기 12장에서 유다서 25절까지 진행되며,
  iii.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계시록 1-22장에서 완성된다.
 
그런데 인류는 왜 구속을 받아야 할까? 무엇으로부터 구속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창세기 1-11장에 주어진다. 즉, 죄에서 초래된 파멸로부터, 죄가 인간에게 들어온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만한 진짜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대속하는 속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불가사의이다. 역으로, 창세기 1-11장의 역사적 진실성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공정한 노하심 아래 들어왔으며, 죄의 형벌, 권능, 존재로부터 구원이 필요함을 알게 해 준다.
 
7. 창세기의 앞부분 장들의 사건들이 사실의 역사가 아니라면, 사도 바울의 복음에 대한 설명이 무의미해진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5:19).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21-22,45). 첫 번째 아담에 관한 기록의 역사적 사실은 하나님이 그분의 말씀에서 마지막 아담(예수님)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증해준다.


결론

이 기사의 제목이 되는 질문으로 돌아가자.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답 : 보통의 성경 주석 원리를 적용하면(우리 시대의 진화론적 편견을 따르게 하려는 압력을 무시하면), 창세기는, 솔직하고 분명하게, 실제적으로 일어난, 신빙성 있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기록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 압도적으로 분명하다.

 

References

1. See Genesis 2:4; 5:1; 6:9; 10:1; 11:10; 11:27; 25:12; 25:19; 36:1; 36:9; 37:2.
2. The seminal author on the colophon concepts was P.J. Wiseman, Creation Revealed in Six Days, Marshall, Morgan & Scott, London, 1948, pp. 45~53. For an excellent eval  uation of this by a evangelical linguist see The Oldest Science Book in the World, by Dr Charles V. Taylor, Assembly Press, Queensland, 1984, pp. 21~23, 73, 121.
3. This discussion of Hebrew poetry was adapted from J.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Vol. 1, pp. 13~16.
4. Aramaic paraphrases of the OT originating in the last few centuries BC, and committed to writing about AD 500. See F.F. Bruce, The Books and the Parchments, (Westwood: Fleming H. Revell Co., Rev. Ed. 1963), p. 133.
5. A.G. Fruchtenbaum, Apologia 2(3):54~58, 1993.
6. The use of the third person is no problem. Moses wrote the long account of his own life in Exodus to Deuteronomy in the third person, and many classical authors like Julius Caesar also wrote in the third person.
7. Adam and Eve knew how to sew fig-leaf ‘aprons’ for themselves (
Genesis 3:7). Within a few generations, Adam’s descendants founded a city (Genesis 4:17), were tent-makers, cattle farmers, musicians with the ability to make both stringed and wind instruments, and metallurgists with the ability to smelt the ores of copper, tin and iron and then to forge all kinds of bronze and iron tools (Genesis 4:20~24). Dr Henry M. Morris comments in The Genesis Record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chigan, 1976, pp. 146~147):
‘It is significant to note that the elements which anthropologists identify as the attributes of the emergence of evolving men from the stone age into true civilization?urbanization, agriculture, animal domestication, and metallurgy?were all accomplished quickly by the early descendants of Adam and did not take hundreds of thousands of years.’
8. Henry Morris,
The Genesis Record, p. 97.
9. Letter from Professor James Barr to David C.C. Watson of the UK, dated 23 April 1984. Copy held by the author. Note that Prof. Barr does not claim to believe that Genesis is historically true; he is just telling us what, in his opinion, the language was meant to convey.
10. Adapted from J. Sidlow Baxter, Explore the Book, Vol. 1, pp. 27~29.

 

 

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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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고 어떻게 성경이 우리 각자에게 \'즐거움\' 될 수 있는지를 성경이 가진 독특함을 통해 살펴 보자.

첫째, 성경은 인기가 높다. 성경은 매년 가장 잘 팔리는 책이다.
둘째, 성경은 힘이 있다. 성경이 전 세계에 퍼져 나가면서 어떻게 수천의 다른 장소에서 개개인의 영혼을 울려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 새로운 믿음,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신앙으로 인도했는지, 아무도 설명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
셋째, 성경은 소중하다. 북한의 지하 교회 이야기

성경은 왜 그토록 인기가 많고 그토록 힘이 있으며 귀한 것일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오 4:4). 말씀은 현재 시제로 되어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고 있는\"이라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그의 백성들과 계속해서 대화 나누기를 원하신다. 하느님은 지금도 백성들과 대화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주로 성경을 통해서이다.


1. 삶의 지침서 -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계시)

1)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창조를 계시한다.

기독교는 계시를 통한 신앙이다. 하느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셨다(히브리서 1:2). 예수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계시였다.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이다.

2)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책이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Ⅱ디모테오 3:16)이라고 한다. \'하느님의 계시\'라는 뜻은 \"하느님의 숨결로 만들어진\"이라는 뜻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다. 물론 하느님은 사람을 대리인으로 사용하셨다. 성경은 100% 사람의 작품이다. 그러나 100%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느님이신 것처럼).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였다(마르코 7:5-13).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고백한다면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성경이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입장은 역사적으로도 보편적인 교회의 입장이었다. 이레리우스(130-200) : \"성경은 완벽하다\". 마틴 루터 : \"흠이 없는 성경\". 로마 카톨릭 : \"성령의 영감 아래 쓰여졌으며 -----하느님이 그 저자이시다\".

물론 난해한 부분도 알기 어려운 모순된 부분도 있다. 일부 어려운 문제들은 저자들이 글을 썼을 당시의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이 1500여 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왕, 학자, 철학자, 어부, 시인, 정치인, 역사가, 의사 등 적어도 40여 명의 저자들에 의해 쓰여졌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역사서, 시, 예언, 계시, 편지 등과 같은 서로 다른 문학의 형태로 글을 썼다.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성경은 우리가 사는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이야기 -

3)성경은 삶을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성경이 하느님의 영감으로 된 것임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권위는 당연히 달라져야 한다. 성경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최고의 근거가 되어야 마땅하다.
성경은 모든 신조와 행위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Ⅱ디모테오 3:16,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이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 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

효력을 가진 권위가 사람들은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혼란에 빠지고 만다. 성경은 하느님의 율법책이고 인생의 지침서이다. 성경은 하느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신 책이다. 그분의 뜻을 더 많이 발견하고 실천할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 질 것이다. 이미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를 들을 필요가 있다.


2. 하느님이 보내는 사랑의 편지 - 하느님은 말씀하셨다 (관계)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분은 그의 말씀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이야기하길 원하신다. 성경은 삶의 지침서일 뿐만 아니라, 사랑의 편지이다. 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가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5:39-40,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 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을 만나지 못한다면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아기예수가 누워 있는 구유이다. 구유를 살펴보느라 아기에게 경배하는 것을 잊어버리지 말도록 하자.\"

하느님과의 관계는 마치 왕복 차선과도 같다. 우리는 그분께 기도로 이야기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특히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As the Holy Spirit says\"(히브리서 3:7) 성령은 과거에만 말씀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하셨던 것을 통해 새롭게 말씀하신다.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첫째,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 믿음을 갖게 하신다. 로마서 10:17.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은 자주 있다.
둘째, 신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는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하느님과의 관계를 경험한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배울 때, 그분과의 관계는 자라나며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도 깊어진다.

3. 하느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실제로 어떻게 들을 수 있는가?

시간 - 하느님과 만나는 정해진 시간을 드려야 한다.
장소 - 한적한 곳으로 나가야 한다. 마르코 1:35에 나온 예수님의 모습
방법 - 성경을 읽기 전 성령께 믿음으로 기도한다. \"성령님 이 말씀을 통해 내게 말씀하소서.\"
그 다음 적당한 본문을 정하여 2~3번 정독한다. 그것이 무슨 내용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관찰하며 하느님께 물어본다. 그리고 그 내용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 것인지를
기도하고 실천하라. 가능하면 받은 은혜와 감동을 타인과 함께 나누라.

4. 시편 1편 - 시편 기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라고 격려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삶에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첫째, 열매를 맺게 된다. 3절. 우리의 유익만이 아닌 타인이게도 축복이 되는 삶.
둘째,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어떠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힘을 얻을 것이다. 3절.
셋째, 하느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다\' 잘될 것이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지만, 삶에 있어서 진정 중요한 일 - 하느님과의 관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일에 있어서 풍요로워 질
것이다. 이것들은 물질적인 부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다.

당신이 성경을 당신의 즐거움으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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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권위의 표현 - 주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 권위의 표현 - 주 예수 그리스도






신약성경에 대하여 규범성을 결정하는 것은 학자들의 판단도 교회의 결정도 사도들의 권위도 아니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약성경이 정경인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정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가 신약 정경의 문제는 교회론적이 아닌 기독론적으로 결정된다고 강력하게 단언한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리스도는 신약성경의 정경성(canonicity)의 기원이다(principium canonitatis). - 뛰어날 뿐 아니라 독점적이다. 신약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의 최종적인 말씀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셨다. 성경의 유일한 지위를 조금도 손상함이 없이, 우리는 신약 정경의 경우, 책이 아니라 한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맨 먼저 관련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단언해야 한다. 마틴 켈러(Martin Kahle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신약성경을 믿는다. 우리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경을 부당하게 서로 대립시켰다는 점에서 너무 지나친 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결정적인 지위를 강조한 것은 비난의 여지가 없다. 같은 전후 관계 속에서 막센(Marxsen)은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비록 내가 소유한 예수는 신약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분이라는 점을 즉각 첨언하여야 하지만, 기독교 교회의 정경(canon)은 신약성경이 아니라 예수이다.” 이 공식화 역시 지나치게 날카로운 감이 있으나, 한 인격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높은 자리를 내어 드렸다는 점에서 옳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정경성(canonicity)의 핵심이며 본질이라는 이 명제를 신약성경 자체로부터 증명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하려면,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념을 담고 있는 자료들을 기초로 해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고 권위적이며 규범적인 하나님의 계시이셨다는 것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이 일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먼저 다음의 두 신약 구절들을 살펴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라는 신앙의 고전적인 공식화는 요한복음의 서문에 나타난다(요 1:1-18). 그리스도를 말씀(Logos)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분이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정한 계시였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말씀(logos)의 기본적인 기능은 전달하고 말하고 계시하는 것이다. 말씀이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유일하고 비교할 바 없는 계시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는 18절이 명백하게 진술하는 바이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계시는 유일하게 난 아들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실재로부터 기인하는 유일무이한 계시에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비슷한 사고의 방향을 히브리서에서 발견한다(히 1:1 이하). 비록 히브리서는 우선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유일한 실재를 강조했지만, 구약성경의 계시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 사이의 연속성이 힘주어 진술되어 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에 의해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에 의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에 의하여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이 계시적 말씀은 권위있는(강권적인) 말씀이고, 존재와 말과 행동을 통한 말씀이며, 그 권위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이다. 복음서 안에는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자로서 그리스도의 위치가 크게 강조되어 있다(마 11:2)(막 1:22)(눅 10:21)(요 1:1이하)(요 4:26)(요 7:29)(요 8:12).




그러나 신약성경이 예수님의 비교할 수 없는 지위와 권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더 잘 사용하는 기독론적 선언은 주(主) 고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요 20:18)(빌 2:11)(계 19:16). 구약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여호와와 같이 그의 권위는 난공불락이다. 주님의 뜻과 말씀은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이 반박할 수 없는 궁극적 권위임을 명백히 언급하는 한 두 개의 실례만 언급하고자 한다. 바울 사도 자신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만찬에 관한 전통은 주님이 그 뒤에 서 계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권위를 가지며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 준 것은 또한 주께 받은 것이니...”(고전 11:23). 바울은 사도의 권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주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이끌어 내면서, 최소한 이것이 모세의 율법만큼 중요성을 지니는 것으로 확신했다(고전 9:14). 그는 데살로니카 교회의 고통당하고 근심하는 성도들을 ‘주의 말씀’으로 위로한다(살전 4:15-17). 이혼의 문제에 관해서는 주님의 명령이 최종적이다(고전 7:10). 한편 바울이 고린도 성도 중 젊은 사람들에게 충고해야 했을 때, 그는 일부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를 의심할 뿐 아니라, 이 문제에 관한 “주께 받은 명령” 조차 없었기 때문에 약간 당황하는 가운데 충고하고 있다(고전 7:26). 주님은 높아지시고 영광 받으신 역사적 예수 외에 그 무엇도 아니시므로, 역사적 예수의 단 한 마디 진술이 있었더라면 모든 불확실성을 일소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바울이 사도행전 20장에서 인용한 주님의 말씀은 그 권고 문맥에서 반박할 수 없는 견고한 증거로 작용한다(35절). 마지막으로 디모데전서 5:18의 예를 보자. 아직도 이 구절의 정확한 해석에 관해 어느 정도 불확실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이 구약성경의 인용과 더불어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의 예수님의 말씀을 포함하는 것에 동의한다(눅 10:7 비교).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 문제없이 구약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갖는다.




이러한 실례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그분의 인격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유일하고 권위있고 규범적인 말씀, 달리 표현하면 단 하나의 반복될 수 없는 절대적인 정경으로 존중되었다. 다른 모든 신약의 규범적 형태들은 단지 파생된 권위만을 소유한다. 다른 모든 신약의 증언과 문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직 그분으로부터만 적법성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만일 어떠한 증언이나 문서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나타낸다면, 그 증언이나 문서는 자격이 박탈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저술과 교부들의 저술에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규범적 계시자로서 중시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우리는 그 선포의 내용을 간략히 조사해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의 주체뿐만 아니라 객체 역시 중요하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에 나타나는 현저한 특징을 여러 방법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공관복음의 저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왔고 또한 올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막 4:14)(마 4:17)(마 12:28)(눅 11:20)(마 6:10)(마 22:2). 요한복음의 ‘내가...이다(I am...)\'로 시작하는 표현법에서 예수님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종말론적 구원을 세상에 가져 오셨고 또한 가져오고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요 6:48)(요 8:12)(요 10:7)(요 11:25). 이 종말론적 구원이 신약성경의 문서들 속에서 얼마나 서로 다르게 구체화될 수 있느냐는 문제와 상관없이, 그것이 선포하는 바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결정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활동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편에 서느냐 아니면 그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