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대하여

 영성에 대하여

- 정리 / 마당지기 김건주 -


도서출판 국제제자훈련원 출판플래너 김건주 목사가 정리한 내용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아래 정리되어 있는 개념 혹은 생각들은 아직 미완의 것들임을 미리 밝혀둔다. 좀 더 경험하고 숙고할 시간이 필요가 있다. 동지 여러분들의 사랑이 가득 담긴 조언과 날카로운 비판 그리고 생산적인 토론을 기대한다.

현대의 거대 도시 속에 터 잡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더 이상은 황폐화되거나 화석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요즘 만나는 안개는 왠지 뿌옇다. 나의 경험 세계 속에서 안개는 하얀 빛깔의 솜사탕을 연상시키는 낭만과 상상의 여유를 주는 친구였다.

깊어 가는 가을의 시간, 우리 모두 감사의 기도를 우리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모국어로 다함없이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동지들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도 멋있다. 좋다.
부끄러운 글이지만 끝까지 읽어주기를 부탁한다.


들어가며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즉 진정한 영적인 생활은 어떤 것이며 오늘날 20세기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지적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또한 진정한 영적 생활에 대해 다소라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종류의 종교적 체험을 갈망함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임으로 되는 것이다.

복잡한 사고 구조를 가졌거나 교육을 받았거나 논리적인 사람이거나 단순한 사람이거나를 떠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는 모두가 반드시 같은 길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동서고금 어디 있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며 예외가 없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독단적인 말씀을 하셨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의 죄를 제거하는 유일한 기초가 역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뿐 다른 추가물이 있을 수는 없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사역을 받아들이는 도구도 믿음뿐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특정한 약속을 믿는 것이다. 더 이상 그 약속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다만 믿음의 빈 손을 들어 역사 속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로 들어간다. 반복하거니와 육체적인 출생의 관문을 통하지 않고 육체적인 삶이 시작될 수 없는 것과 같디, 영적 출생의 관문을 통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는 방법은 없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시작에 관해 말했지만, 또한 반드시 인식하고 있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중생이 시작으로서의 필수요건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 생활 속에 있는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어떤 면에서 육체적인 출생은 육체적인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출생하지 않고는 이런 외부 세계에 살아 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며 이미 과거의 사건이다. 일단 우리가 출생한 후에는 우리들의 생활의 모든 관계, 가능성, 그리고 능력 범위 내에서 우리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중생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중생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중생의 길을 통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영적으로 태어난 후에는 영적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이것이 곧 성화의 영역이다. 이것은 중생에서 시작해서 현재의 삶을 거쳐 예수께서 재림하거나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람은 흔히 중생한 후에 "다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러면 보통 일차적으로 부정적이며 제한된 성질을 지닌 일련의 일들을 제시받는다. 흔히 그런 부정적인 일련의 일들을 행하지만 않으면 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는 관념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곧 진정한 영적 삶은 어떤 조그마한 일들을 부정적으로 행하지 않는 정도만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행해서는 안 될 일들이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아주 훌륭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 또는 진정한 영적 삶이란 단지 기계적인 방법으로 일정한 금지사항들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이란 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진정한 영적 삶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금지항목을 단순히 준수한다고 해서 진정한 영적 생활 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이르는 것도 아니요, 또는 금지항목을 반대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불찬성을 표명하고 안일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생활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또는 진정한 영적 생활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내적 문제와 씨름해야만 한다. 내적 영역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곧 진정한 영적 생활을 잃어버릴 수 있는 첫 번째 장소이다. 외적인 범죄 행위는 내적인 범죄의 결과이다.
인간됨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인 바,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집에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와도 같다.

만약 우리가 비성경적인 신앙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성장에 관한 도달하는 결론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 설령 우리가 인간 본래의 본질에 대한 비성경적인 사상들의 영향을 의식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받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상들은 별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중요한 자위를 차지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집 전체의 평면도가 없을 때 자칫 어떤 방들을 무시하거나 잘못 사용하고 남용하기 쉽다. 알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삶에 많은 시간들을 상상의 방들 속에서 허비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실재에 관한 성경적인 체계와 이와 대응하는 여러 가지 견해에 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관한 모든 가르침들은 성경의 가르침과 실재에 관한 성경적 견해와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용에 있어서나 강조점에 있어서나 일치되어야 한다. 우리는 진실한 교훈들을 가르쳐야 하며, 또한 그것들을 바르게 강조해야 한다.


유물론적 세계관

우리는 유물론이 지배하는 문화, 곧 신 존재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문화 안에 살고 있다. 이 문화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초자연적인 것이 존재할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세에서 인간이 신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문화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만 심리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실재에 '종교적 차원'을 부여하려고 노력할 따름이다. 이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모든 생명은 우연한 진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라고 간주하며, 현재의 다양한 생명 형태들은 원 물질과 원동력으로부터 생산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진보된 형태의 동물로 혹은 상당히 복잡한 기계로 간주된다.

각 사람은 유전학적인 생성이나 환경적 조건, 혹은 이 둘의 결합의 산물로 간주된다. 이같은 견해 안에서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사라진다. 인간의 사랑, 영웅주의에 대한 갈망, 윤리적 판단, 창조의 시도 그리고 심지어는 개성까지도 회의의 대상이 되고 궁극적 가치란 하나도 남지 않는다. 이같은 실재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서 사람들은 재산을 축적하는 것으로, 끊임없는 감각과 감정을 자극하는 데에서 또 그겉은 자극을 효율화시켜 주는 어떤 방법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오늘날 유물론은 교회까지 휩쓸고 지나갔다. 불행하게도 교회가 종종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고 있다. 많은 기독교 가정들이 서로 분리된 채 아무런 교제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 이같은 상태를 보고 비탄을 느낀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체험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과 거의 다름 없는 자신들의 생활을 무언가 영적인 차원으로 회복시켜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빈번하게 무신론자들과 흡사한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고백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격체로서 존재하신다는 참된 믿음을 상실하였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 신자들의 기도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또한 그분이 듣고 계신다는 깊은 신앙이 없다면, 어떻게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리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현대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유물론적 철학이 모든 방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파고 들어와 그 생활을 빈곤하게 만들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실존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연신론자들과 같이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린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유물론의 영향으로 생긴 이러한 빈사 상태로 인해 진정한 영성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삶'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향에 서 있는 경우가 허다하며 사회가 제시하는 답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도 하다. 이같은 '방향 설정'은 곧 두가지 길로 갈라지는데 그 하나는 경험을 추구하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방법에 의존하는 것이다.

유물론의 자극을 받은 사회 안에서 유물론의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신비, 동양 종교들 또는 마약에 의한 '종교적' 체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자신들이 그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줄 어떤 영적인 체험을 광적으로 추구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때로는 그들이 추구하는 여러 가지 체험들 그 자체가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실존을 나타내며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유물론의 영향을 받아 영적인 허약함의 해결책으로 기계적인 방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많은 지침들을 설정해 놓고 그것들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일부 교회들이 현대 문화의 윤리적 방종에 영향을 받거나 성경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자극을 받은 다른 교회들은 훈련과 권위를 '해답'으로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장로들에게 신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권위를 부여하여 교인들의 생활을 감독하도록 했다. 예들 들면 특별 집회에 참여라는 것을 강요한다든지, 장로의 동의 없이 결혼하거나 이사하는 것을 금지한다든지, 각 가정에서 특정한 구조와 규칙들을 가질 것을 강조하는 등등이 곧 그것이다.

이같은 종류의 여러 가지 제안들 가운데 일부는 교회 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 전도도, 성경 공부도, 영적인 은사도 다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율법주의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어떤 구조나 규칙에 종속시키는 것은 곧 그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인격적인 관계가 기계적인 형태로 전락한 우려가 있다. 이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방법일 뿐, 신약성경이 주장하는 방법은 아니다.

어떤 '방법'들도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변화시킬 수 없으며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닌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굳은 확신,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으로 우리 생각이 새롭게 되어야만 참되고 지속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 기자들은 현명하게도 기도하는 방법, 성경을 읽는 방법,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관한 세밀한 형식이나 양식 따위를 정해 놓지 않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인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자기 형편에 맞는 윤리적 방법의 체계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해 준 것은 원리이지 방법이 아니다. 이 일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에 관한 세부적인 사항들은 성경의 큰 테두리 안에서 각 개인 또는 교회가 속한 지역의 상황에 맞게 설정되어야 한다. 방법이 우리의 해결책이 될 때, 인간성이나 자유나 참된 성장의 가능성은 상실되고 만다.


진정한 영적 생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곧 진정한 영적 생활이란 우리가 중생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중생에서 시작해야 함은 재언할 것도 없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진정한 영적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어야 한다. 현재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곧 진정한 영적 생활이란 의롭게 되어 내가 천국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영적 생활은 좀 더 편안하고 안일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일체의 금지항목들을 제거해 버리자는 욕구만은 아니다. 우리의 욕구는 보다 깊은 생활을 위한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십계명 전체와 사랑의 법 전반을 제시해 준다.

진정한 영적 생활, 곧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르는 탐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적 생활은 이 이상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영적 생활이란 적극적인 생활이다. 적극적인 내적 실재이다. 이 적극적인 내적 실재의 결과가 외부로 나온다. 속이 차면 밖으로 적극적인 표현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지내야 한다. 바로 오늘 이 역사의 현재적 순간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동료 인간들을 사랑해야 하며, 인간으로서 사람들을 향해 살아 있는 우리가 되어 진정한 인격적 입장에서 인간 교제도 나누어야 한다. 이것 바로 이 역사의 현재적 순간에서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다음에는 동료 인간을 배반하고 모든 것을 강탈하려는 뱃장을 지닌 세상에 들러 싸여 인생살이를 하고 있는 바로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곧 정당하게 우리 것이 되지 아니하는 모든 것에 관련해서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을 포기하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를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매일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의 반역 위에 세워진 소외된 세계 안에 있다. 우리가 이런 삶 속에 있는 만큼, 그리스도인 자신도 자기 속에 있는 이런 반역의 요소에서 전적으로 손을 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면에서 그리고 전인(全人)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직면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회심시에도 영단번의 하나의 실재가 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평생을 삶을 통해 있어야 할 실재여야 한다.


'영', '영성', '영의 세계'에 관한 개념 정리

"영의 세계"라는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는 모호하고 어려운 개념이다. 이 개념은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볼 수 있는 세상 이외에, 현실의 다른 차원, 다른 층(layer), 수준을 가리킨다. 비물질적이긴 해도 실재로서 이해할 수 있는 이 '다른 세계'의 개념은 현대의 사유방식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다. 현대의 세계관 혹은 실재상은 실재를 단순히 일차원적이고 가시적인 물질의 영역만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현대 문화 속에서 자라난 우리 모두에게 자연스럽게 깊이 스며있는 이 세계관으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실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 되었다.

창세기를 여는 첫 구절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그 근원을 영(Spirit)에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을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으로 만들어 낸 어떤 첫 원인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의 세계는 생동적이며 '인격적인' 모습으로 드러나고, 다양한 존재의 형태로 대중들에게 알려진다. 예를 들어, 천사, 천사장, 그룹, 스랍 등으로 말이다. 그 모든 것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사람들은 그분께 자주 아버지, 어머니, 임금, 목자, 애인 등과 같은 인격적인 호칭을 붙였다. 물론 불, 물, 빛, 영과 같은 비의인화된 용어들도 사용했지만 말이다.

이런 표현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의 문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에 관한 언어들은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 세계'와 너무나 다른 실재와 에너지에 의해 구성된 다른 세계를 말하는데 이 세계의 언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아버지, 어머니, 임금, 목자, 불과 같은 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글자 그대로 그런 존재인 것은 아니다. 그 언어가 은유적이라고 해서 현실도 그런 것은 아니다.

신학용어를 빌자면 성서 전통이 전하는 하나님은 내재(무소부재, 편재)하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초월적인(어떠한 특정 사물과도 동일시될 수 없고, 모든 사물들을 다 합친 것도 아닌) 분이다. 어디나 계신, 내재하시는 하나님과 영의 세계는 우리 모두를 둘러싸고 있으며,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디 있다기보다는, 우리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 있다. 보통은 이런 실재를 의식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는 모든 영의 영역 안에 살고 있다.

이스라엘은 영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아브라함은 비전을 보고 하늘의 사자들을 대접했다. 야곱은 두 세계를 이어주는 계단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비전을 보았다. 후에 그는 "이것이 하늘의 문이다"하고 외쳤다.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것이다. 성서의 마지막 책에 등장하는 요한의 비전도 유사한 이미지로 시작한다. "내가 보니 하늘의 열린 문이 있는데..." 성서 이야기의 처음과 끝에 드러난 진실은 이스라엘 전통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들에게도 역시 진실이다.

모세오경은 이스라엘 역사의 핵심 인물이자 "창건자"라 할 수 있는 모세에게 집중되어 있다.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있는 짤막한 사망기사에 의하면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는 자"였다. 출애굽기에 의하면 모세는 반복해서 하나님의 산(두 세계를 연결시키는 상징)에 올랐으며 거기서 하나님의 법을 받아 백성들에게 '신적인 말씀'으로 전해 주었다. 모세오경에서 모세는 시종일관 두 세계의 중재자로서 하나님의 율법 수여자, 영적 세계에서 나오는 힘의 통로, 백성을 대신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한다.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과 중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엘리야나, 고전적 의미의 다른 예언자들을 포함해서 많은 예언자들에게 있어서도 핵심적인 내용이었다. 이러한 흐름은 과거 속에 화석화되지 않고 예수 시대에도 계속 되었다.

예수가 속해 있던 흐름-예언자들을 거슬러 올라가 이스라엘의 창건자와 선조들에까지 소급하는-과 예수로부터 나온 흐름(예. 바울)은 모두 두 세계를 이어주는 영으로 충만한 중재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흐름은 그 전통의 근원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문헌인 히브리성서와 신약성서는 그 흐름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성서와 아주 친숙한 사람들조차도 다른 세계 체험이 성서에 미친 영향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것은 다른 영역 혹은 실재의 다른 차원, 두 세계의 중재자에 대한 언급 등이 현재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전혀 성격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화의 과정을 겪은 우리들은 현실을 일차원적으로만 이해하는 매우 세속화된 문화권에서 자랐다. 비록 종교적인 세계관의 잔여물이 남아있긴 하지만 현대의 주도적인 세계관은 최근 몇 십년 동안 계속된 과학, 기술혁명에서 나온다. 실재를 단지 이러한 세계관의 틀에서 인식하는 우리들에게 실재적인 것이란 물질, 즉 시공의 제약을 받고 있는 가시적인 세계일 뿐이다. 실재적인 것은 궁극적으로 잡동사니들의 미세한 조각들로 이루어졌으며 그것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잘 아는 인과법칙과 조화를 이루면서 작용한다. 실재는 일단 물질, 그리고 가시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주는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 한마디로 단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이런 세계관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우리는 '세계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다른 주제들의 전제조건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마음속에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다. 실재에 대한 근본적인 그림으로서의 현대의 세계관은 실재 위에 놓인 하나의 지도(地圖)와 같은 것이며, 우리의 경험과 이해를 결정짓는다. 우리는 소위 실재적인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이런 세계관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으며, 그것은 종교적인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실재에 대한 비종교적, 일차원적 이해는 다른 세계라든가 두 세계의 중재라든가 하는 말을 비실재적으로 받아들이게끔 만든다. 기적적으로 병이 치료되는 일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정신작용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예외적인 사람들이 몰아지경으로 들어가 또 다른 세상을 체험한다는 사실을 설사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 비범한 실재체험을 순전히 주권적인 것으로, 영혼 속에서의 어떤 내면적인 만난 매지는 환각작용 쯤으로 치부하려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세계'는 더 이상 '또 다른 하나의 실재'로서 객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현대의 이런 사유틀 속에서 어떤 사람이 전혀 다른 어떤 실재를 자주, 생생하게 경험한다고 했을 때 그는 정신병자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현대사회의 바른 영성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영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아가는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는 구약성경의 인간에 대한 정의를 신약성경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문제는 바로 하나님의 형상의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라는 상황이다.

(1) 타락 이전의 영성은 어떤 것이었나?

그렇다면 '타락 이전'에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아담과 하와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다른 만물에 비교해 가졌던 독특한 영광의 내용은 창조성(하나님께서 무한한 의미에서 창조주였던 것처럼 유한한 상황에서 동일한 것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예술적 창의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도덕성(단지 외부로부터 오는 압력 때문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 합리성(이것은 인간이 항상 이성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 감정(사랑, 기쁨, 슬픔, 의분 등을 말하고 있다) 언어(동물들은 신호를 보낼 수 있으나 말은 할 수 없다) 등 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서 지금도 경험되어지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요소 중에 특정한 어느 하나만을 인간이라 할 수는 없으며, 그것들은 서로 연합하고 통합되어 있다.

에덴동산에는 교회도 없었고, 성경도 없었고, 기도모임이나 찬양, 새벽기도, 전도와 같은 것이 없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가끔 이런 것들을 바로 영성이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지금 이런 것들이 절대로 필요없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어떤 요지를 찾으려 할 때 이런 것들은 영성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그 당시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영적이라고 생각하셨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영성이라고 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단순히 인간이 된다는 것,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으로 있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현재의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2) 타락 이후 영성은 어떻게 되었나?

그렇다면 '타락 이후'에 영성은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은 하나님의 명령과 자아의 명령 중 후자를 따르게 했고, 결국 인간 속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지고 망가지고 뒤틀려짐으로써 비극은 시작되었다. 한 마디로 죄가 가져온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과연 하나님은 의로우셨고, 따라서 범죄한 인간을 처리하는데 정확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 문제에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볼 점은 인간의 타락시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과언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심하게 왜곡되긴 했지만, 완전히 없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들은 심히 왜곡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우리의 도덕, 이성, 경험들이 깊이 뒤틀려 버린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죄를 사하시려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누구나 왜곡된 부분들이 점점 변혁되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영성이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곧 참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3)참된 영성은 자기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다.

자기 부정의 핵심적인 의미는 본래적인, 즉 자연적인 자기 모습과 영적인 자신의 모습을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적이고 육첵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나쁘고 영적인 것은 좋은 것이라고 구별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해서 가르쳤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왓치만 니이다. 왓치만 니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그의 인간관을 끌어 냈다. 즉, 인간의 본질은 육과 영과 혼, 이 세가지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육은 겉으로 보이는 사람, 즉 육체적인 의미에서의 인간이요, 혼은 두 번째 부분으로서 인간 개개인이 지니고 있는 지성, 감성, 의지 등을 말하며 이 부분이 바로 인간을 개성있는 존재로 만드는 부분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각 개인의 인격을 가르킨다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영은 인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이 부분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 있는 부분, 즉 하나님과 동등한 본질을 담고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왓치만 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영적인 부분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성장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영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육과 혼의 부분, 즉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부정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복음서에 나오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예화를 들고 있다. 그가 말하는 우리의 영은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옥합 속의 향유와도 같아서, 그 여인이 향유를 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인간적인 부분인 육과 혼의 부분을 깨뜨려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했을 때에만 우리의 우리의 영이 흘러나와 주님께 드려질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의 영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분리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물에다 비유할 수 있다. 우리들은 더러운 물을 정수해서 점점 께끗하게 만들어 마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물 자체는 계속 귀중하고 깨끗한 것이다. 더러운 것은 물이 아니라 오염물질이다. 이처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이나 육체 혹은 인간으로서의 온갖 제한성마저도 사실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딜레마는 도덕적인 문제, 즉 죄의 문제이지 결코 존재론적인 제한성이 아니다. 다만 인간 속에 존재론적인 것들도 왜곡된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적인 모든 요소들에 대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단지 우리가 회개하고 제거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지었거나 현재 짓고 있는 죄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나에서 그의 공생애 첫 번째 이적(異蹟)사역으로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기본 요소인 결혼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본다. 예수님께서 그의 공적사역의 첫 번째 이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선택하신 것이 우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들이 이제 회복될 것을 보다 맛있는 포도주를 만드심으로써 그런 의도를 확연히 보이신 것이다. 우리 몸의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활 후에 무형체의 영적인 몸으로 예수님을 만난다고 하지 않고, 육체를 가진 변화된 몸으로 만날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2.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의 영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우리는 파괴되고 왜곡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긴장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것이 정상적인 선택이겠지만, 타락된 이 세상의 왕인 사단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이 잘못 오용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정상적 상황에서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꺼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예수님께서 사시로 죽으셨던 상황과 동일시되어야 함을 발견한다. 그것은 남을 섬기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삶을 말한다. 그러나 고난 그 자체는 특별한 영적 가치는 없다. 그러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구원을 이루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울은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함으로써 환란(고난)이 구원을 이루려는(완성해가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형상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긴장이 있을 뿐이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은 우리의 인간성(하나님의 형상)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용납하는 것을 포함한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않기로 선택할 수도 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성의 요소들을 즐기는 것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는 긴장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러한 삶의 모범이었다. 물론 그분이 인간의 모든 구체적 삶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 보여주셨던 것은 아니다. 또한 이 긴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완전히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3.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런데 에베소서 3장에는 우리가 이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16,17절). 우선 바울은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점에 대해 전혀 혼동을 일으키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의 관심의 초점이 성령을 따라서 그리스도께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면서 19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하고 있다.

하나님께 산 제물이나 의의 도구로 드린다는 것은 좁은 의미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아니라, 넓은 의미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나의 모든 인격을 드린다'는 것이다. 거듭난 삶은 창조된 형상을 회복하고 그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의 핵심적 진리는 기적이나 역사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것은 이적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책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도 그리스도를 명확히 알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그러나 기도할 때나, 성경을 읽을 때나, 일을 하거나, 길을 걷거나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므로 그분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주의해야 하는 것은 '편협한 영성의' 괴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영성의 회복은 어떤 즉흥적인 기교나 훈련에 의한 체험이 아닌 신뢰(태도)와 순종(행동)으로 추구되어져야 한다.


참고문헌

[예수 새로 보기] / 마커스 J. 보그 / 한국신학연구소
jesus: a new vision: spirit, culture and the life of discipleship

[진정한 영적 생활], 프란시스 쉐퍼, 생명의 말씀사
True Spirituality

그 외 몇 편의 짧은 논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