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11
** 아버지께로 오신 예수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입니다. 이 편지를 기록한 때는 AD 80~90년경으로 여겨집니다. 요한복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 까지는 ‘하늘 아버지께로서 오신 예수’에 대한 기록이고 12장부터 21장까지는 원래 계셨던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예수’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5장 까지는 예수께서 이 땅에 그를 믿는 자들의 죄와 고난과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구속주로 오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의 서론으로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두 가지 배경에서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적 배경입니다. 사도 요한이 유대인일 뿐 더러 유대인의 관습과 제도와 습관 그리고 구약성경에 바탕을 두고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헬라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기록했습니다. 당시 시대정신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이어지는 ‘이원론 철학’이었습니다. 폴라톤의 이원론 철학의 핵심은 ‘이데아’입니다. 요한은 헬라 철학에 익숙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데아’와 같은 개념의 ‘로고스’라는 헬라 철학 용어로 요한복음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니 이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니라” 플라톤의 이원론에 따르면 이 세계는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위의 세계와 아래의 세계입니다. 저 위의 세계, 즉 본질적인 세계, 영혼의 세계, 이데아의 세계입니다. 이 땅의 세계는 본질의 모조품 또는 그림자의 세계, 물질적인 세계입니다. 즉 실체가 아니라 가짜인 셈입니다. 이런 세계관으로 인간을 본다면 위의 본질인 이데아 세계의 영혼이 ‘아래’ 물질적인 몸속에 타락해서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원론으로 보면 몸은 물질적이고 영원하지 못하고 악하기까지 합니다. 몸을 영혼의 무덤, 혹은 감옥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자연이 헬라 철학에서 구원관은 영혼이 몸에서 해방되어 ‘위’의 세상 즉 이데아의 세상으로 복귀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봅니다. 이런 구원은 지식을 통해서 얻는다는 것이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입니다. 그래서 죽으라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불교나 인도 철학도 헬라 철학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비본질적인 이 세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해탈이라고 말합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선배 목사님 형님이 서울대 법대에 재학하다가 인생의 허무를 느끼고 절에 들어갔는데 이제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형님 하시는 말씀이 ‘아직도 수련 중인데 더 정진을 해야 할 것 같다. 만일 이 세상에서 수련이 부족하면 다음 세상에 계속해서 수련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이데아로 가는 험난한 길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최고 경전인 ‘베다’(Veda)를 공부하는데 이를 헬라어로는 ‘Oida'(지식)과 같은 뜻입니다. 제가 이번 중국 포럼에서 ‘인도의 여성과 결혼’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는데 인도 전통적인 마누 법전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이상적인 결합을 남자는 30세 여자는 12세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 남자가 30세냐? 인도 남자는 베다를 20년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결혼 연령이 30세가 됩니다. 이렇게 죽도록 지식을 쌓아도 그들의 원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도달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도달했다해도 그곳이 참된 이데아의 세계가 아닌 신기루와 같은 허상일 뿐이었습니다. 이번에 중국과 한국을 잠간 방문하면서 비행기 안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었던 ‘데미안’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데미안은 사춘기였던 제게 문학의 눈을 뜨게 해 주었고 그 책에 영향을 받아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을 고등학생 때 다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학생 때 책을 많이 읽은 탓에 어른이 돼서도 풍부한 상상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헬만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찾아 가는 여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전쟁터에 있었던 독일 병사들의 배낭 속에는 데미안이 들어 있을 정도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데미안이나 니체에 열광하는 이유는 내면세계의 자아를 찾으려는 피나는 여정에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헬만 헤세는 전쟁 후에 노벨 문학상을 비롯해서 많은 상을 탔습니다. 하지만 내면세계를 찾아 가는 그의 여정은 순탄하지도 않았고, 이데아도 없었습니다. 내면세계의 자아를 찾아 가는 여정이 힘들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정신병 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세 차례 이혼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는 당시 헬라인들에게 ‘이데아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도 요한의 복음은 충격인 것입니다. “태초에 로고스가 계시니라 이 로고스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로고스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존재 형태는 ‘말씀’입니다. 즉 ‘로고스’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형상이 아니라 영이며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요4:24)고 했습니다. “영과 말씀으로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영과 말씀은 인격이며 실체며 힘입니다. 로고스란 바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의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늘 이데아의 세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모든 종교에는 형상과 의식이 있습니다. 힌두교에 얼마나 많은 신들과 신상들이 있습니까? 뱀, 원숭이, 코끼리...... 불교도 부처의 형상이 수 십 가지 됩니다. 천주교도 예수의 형상, 마리아의 형상, 성자들의 형상이 수도 없이 널려 있습니다. 어떤 신상들은 수 십 미터 크기도 있고, 어떤 형상들은 손에 들어 올 정도로 작은 형상들도 있습니다. 인도 버스나 택시나 오토 릭샤 앞에는 성냥갑만한 신상들이 놓여 있고 불이 번쩍 번쩍합니다. 그들의 신들은 그들이 만든 형상 속에 갇히고 맙니다. 그 신들은 내 주먹 크기만도 못한 신들이 됩니다. 아무리 몇 십 미터 높이고 신상을 만든다 할지라도 그 신상 속에 갇혀 버린 신은 더 이상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신이 제대로 인식이 안 되기 때문에 형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형상이 있는 종교는 저급한 종교에 속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두 번째 계명을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은 우상 속에 갇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입니다. ‘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상‘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예정’ ‘하나님의 의지’는 영과 말씀의 형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번에 상해 갈 때 저를 특별하게 초청한 집사님이 계십니다. 작년 추수감사절 때 인도에서 CBMC, 세계기독실업인회 회의가 인도 하이드라바드에서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열 댓 분이 오셨는데 마지막 코스가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떠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 날이 마침 추수감사절이었습니다. 그 일행 중에 배양희 집사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예배 후에 저에게 명함을 주면서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다면서 중국에 오면 꼭 한 번 모시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번에 포럼 끝나고 한 나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점심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배양희 집사는 상해에서 ‘코리아 부동산’이라는 사업체를 운영하시는 분인데 상해에 온 지는 12년 되었다고 합니다. 부동산 개발로 어느 정도 성공을 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불황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중 이 사업을 접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기로에 서서 고민할 즈음에 인도에 회의 차 오게 된 것입니다. 열흘 인도 일정 지치고 힘들고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가는 날 우리 교회 추수감사절 예배를 참석하면서 설교 시간 내내 감격으로 울었다는 것입니다. 여태껏 추수 감사 예배를 수십 번 드렸으면서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몰랐는데 그 날 설교에 여태껏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뿐 아니라 중국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강력한 영감에 압도되어 접으려던 사업을 다시 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상해에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돌아 와서 남편인 박찬무 집사와 더불어 중국의 최고 지도자 시진핑의 고향이며 삼성전자가 중국투자사상 최고의 투자를 하고 있는 서안에 아파트 분양권을 따서 분양을 하는데 몇 달 사이에 70채를 팔았다는 것입니다. 사업이 확장이 되어 지금 중국 주요 다섯 개 도시에 지점을 내고 직원 수만 50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도에 보내셨는지 작년 추수감사절 예배 때 알았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사업체가 선교센타의 역할을 하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며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설교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숨결과 아이디어와 능력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통치는 역사를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서 말씀합니다. 배양희 집사는 인도에서 열린 CBMC라는 환경으로 인도 받았습니다. 서안시대가 열리게 되는 환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업체가 중국선교에 쓰임받기를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로고스’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 성도 안에 계십니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니까요. 창조주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세계를 품고 사는 그리스찬이 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에 신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헬라인들이 그렇게 찾던 이데아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니체나 헬만 헤세가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에 걸리면서까지 험한 여정으로 찾지 못했던 내면의 자아를 찾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자아는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최상의 자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최상의 자존감을 갖는 자아입니다. 이 자존감은 우리 내면에서 우리를 옥죄는 우울증, 죄책감, 죄의식, 강박관념, 분노를 날려 버립니다. 신과 같은 자존감으로 고상하고 탁월한 삶을 살게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들 속에 살아 움직이게 하려면 말씀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관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금번에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 참된 이데아의 세계, 말씀 안에 거하여 신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