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산사람들
역사의 중심에 선 사람들
본문/사도행전 11장 19-26절
하나님 아버지는 살아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의 가장 첫 절이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정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상입니다. 삼라만상이 잠든 것처럼 보이는 한밤에도 우주는 궤도를 따라 움직이고 있고, 풀숲의 벌레들과 동물들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움직임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고여있어 썩는 물이 아니라, 생명을 운반하는 흐르는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와 사랑을 흘려 보내주시고, 우리는 찬미와 기도를 올려 보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날마다 새롭게 형성되고 움직입니다.
이 세상 역사도 그렇습니다. 역사는 움직입니다. 흘러갑니다. 그러기에 흐름에 민첩하지 못하면 살 수 없습니다.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들은 모두 쇠퇴하여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한 때 중심에 서 있던 것들이 점차 변두리로 밀려나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지곤 했습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역사들은 스스로를 움직임의 중심에 세우고자 했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습니다. 성경도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은 영적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두 교회를 통해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교회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두 교회의 이야기는 곧 우리 개인의 이야기로 환원됩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교회와 민족을 생각하게 되길 원합니다.
한 때는 중심에 서 있었으나 나중엔 변두리로 밀려난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교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기독교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강력한 능력과 함께 임하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 교회는 대단한 분들이 중심이 된 교회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와 목회자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영락교회!> 하면 한경직 목사님을 떠올렸습니다. 요즘엔 <순복음교회!> 하면 사람들은 조용기 목사님을 떠올립니다. 그런가 하면 <그 교회엔 유명한 정치인이 있대. 이름난 학자도 있고, 연예인 아무개가 그 교회 장로님이래!...> 이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거기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등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기 다 있었습니다. 스데반 같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집사님들이 있었습니다. 구성원들만 보아도 대단했습니다.
또 예루살렘 교회는 능력이 많았습니다. 하루에 삼천 명씩 세례를 받기도 하고, 하루에 오 천명씩 교인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폭발적 부흥에 대하여 유대 지도자들은 우려하고 미워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사도들의 그림자만 덮여도 병든 자가 나을 정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감히 교회에 도전할 수 없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속이고 교회를 기만하다가 죽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성경은 사람들마다 두려워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이런 대단한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는 나중엔 급속도로 쇠퇴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이 이동했습니다. 중심이던 예루살렘 교회는 변두리로 전락하고, 새로운 곳이 복음의 중심지로 부각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중심지는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중심 이동을 보여주는 것은 사도행전 그 차제입니다. 사도행전 1-7장까지는 예루살렘 교회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엔 스데반 집사님 순교 후 핍박 때문에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중심지인 안디옥 교회가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출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나중에 어떤 교회가 되었습니까? 사도행전 11장에 등장한 안디옥 교회는 13장부터는 완전한 중심 교회가 되었습니다. 13장부터 사도행전 끝까지 바울 사도의 선교 여행을 담고 있는데, 이 선교 여행의 출발점이 안디옥입니다.
일찍이 주님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위대한 땅 끝 비전을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가는 복음의 비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땅 끝으로 복음을 전하는 중심은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주역을 준비하셨는데, 그들이 바로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최초의 선교사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전도여행이 끝날 때마다 안디옥으로 돌아왔고, 재충전하여 다시 출발하곤 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세계 선교의 출발지요, 재충전 장소요, 지원 부대와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가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 이름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안디옥 교회를 시작한 사람들은 이름조차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회의 초석을 놓은 사람들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들이었습니다. 결코 유명인사가 아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여주는 말씀이 13장 1절에도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여러분, 이중에서 나중에 바울이 된 사울은 우리가 잘 압니다만, 나머지 지도자들을 잘 아십니까? 생소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요,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인물도 아닙니다. 바나바도 구브로 출신의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보낸 인물이었지만, 제자들과 같은 반열에 설 수는 없는 신진 인사였습니다.
또 안디옥 교회는 역사도 자랑할 게 없었습니다. 당시 안디옥 교회는 신생교회였습니다. 역사로 말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가장 먼저 시작된 교회였고, 유대와 사마리아에 먼저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8장을 보면 빌립 집사님이 사마리아에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안디옥은 한참 후였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거룩한 복음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에 정복된 후 예루살렘 교회는 지리멸렬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펠라 지역으로 이동했고, 나중엔 매우 약해졌습니다. 2세기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최초의 교회로서 존경은 받았으나, 아무런 창조적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3세기, 4세기로 내려가면서 위대한 공헌을 이어 나갔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 형성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안디옥 학파라고 불리는 신학자들을 통하여 신학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황금의 입이라 불리던 존 크리소스톰 같은 설교자를 배출했습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현재도 많은 교회들을 이 두 유형에 따라 분류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교회가 있고, 안디옥 교회가 있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 그러나 더 이상 새로운 일을 시작하지는 못하는 교회, 아직은 과거의 전통과 규모 때문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교회, 그러나 새로운 창조의 씨를 뿌리지는 못하는 교회, 그래서 과거를 먹고사는 교회, 이런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역사가 짧고 두드러진 인재가 없지만, 날마다 새롭고 역동적인 힘이 흘러나오는 교회, 새로운 일에 도전하길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그래서 새 역사의 중심에 서는 교회, 이런 교회가 안디옥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는 어디에 속하는 교회일까요? <영도중앙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처럼 되고 있는가, 그래서 중심에서 변두리로 스스로 침잠해가고 있는가, 아니면 안디옥 교회처럼 영도와 부산과 세계의 복음화에 중심에 서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머지않아 60년을 내다봅니다.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예루살렘 교회처럼 될 위험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과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흐름의 중심에, 역사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의 중심에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처음 부임하던 날 <부산의 안디옥 교회>란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산의 안디옥 교회가 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런 기원은 교회에 대해서만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들도 그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지난 세월 주님을 섬겼던 것들만 회상하고 있지 말고, 늘 새로운 모습으로 주님께 우리를 드리길 원합니다. <한 때의 인물>로 스스로를 전락시키지 말고, <영원한 현역>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위대한 일들에 중심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안디옥 교회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길게 언급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몇 가지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선 안디옥 교회는 고여 있지 않고 흐르는 교회였습니다. 흔히 선교신학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여 있는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예루살렘을 넘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 끝으로 가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의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성벽 안의 부흥에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와 그 후의 박해를 통해 그들을 흩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는 고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계속 밖으로 뻗어 나갔고, 세계 선교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둘째로, 안디옥 교회는 열려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했던 사람들은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편견이 강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만> 전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의 초석을 놓은 분들은 달랐습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라고 했습니다. <헬라인에게도> 말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편견이 없었습니다. 가슴을 넓게 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관대했습니다. 누구나 주님 안에서 영접했습니다.
이런 열린 마음은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냈습니다. 핍박자 사울은 가는 데마다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5절을 보세요. 관용과 사랑의 사람인 바나바는 직접 다소에까지 찾아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복음 사역에 임했고, 사울은 후에 위대한 바울이 되었습니다. 열린 마음은 세계 선교 역사의 결정적 토대를 놓는 바울을 낳은 것입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새 역사의 주역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마음은 요나를 보내 악하고 또 악한 앗수르의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 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해야 합니다. 다른 교회와의 협력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영도를 넘어 부산으로, 부산을 넘어 한국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로 나가야 합니다.
셋째로 안디옥 교회는 희생적 순종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선교를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보내라고 하셨을 때,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두 사람이 우리 교회 핵심입니다. 이들이 없으면 안디옥 교회는 무너집니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장 핵심적인 두 분을 파송했습니다.
여러분, 샘물을 퍼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샘물은 퍼낼수록 더 맑아집니다. 우리들이 기꺼이 하나님께 순종하길 원합니다. 혹시 염려가 되더라도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채우실 것입니다.
넷째로 안디옥 교회는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적 신앙의 교회였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 아랫쪽의 27절 이하를 보면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 헌금을 모아 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교회 안의 구제는 있었지만, 교회가 다른 교회를 물질적으로 돕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시도요, 교회들을 사랑으로 묶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아무 교회도 시도하지 않은 일, 선교사 파송이란 일을 시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도 날마다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길 기원합니다. 교회 주보에 전에 없던 새로운 광고들이 등장하길 원합니다. 같은 것이라도 비전을 위해 투자하면 반드시 열매가 될 것입니다.
어떤 교장선생님이 학교를 떠나는 이임식 자리에 돌멩이 두 개를 들고 단위에 올랐습니다.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교장선생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갑자기 돌멩이 하나를 전교생이 모인 뒤편으로 멀리 던졌습니다. 학생들은 깜짝 놀라 선생님의 기이한 행동을 주시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남은 돌멩이 하나를 단상 밑에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항상 멀리 바라보며 꿈을 펼치십시오. 던지지 않은 돌은 그저 발아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대단한 능력과 자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새로운 일에 던지지 않으면 열매가 될 수 없고, 발밑에 그대로 있을 뿐입니다.
이 무더운 여름, 우리 모두 중심에 서는 일을 두고 기도하길 바랍니다. 무더위와 짜증은 우리를 주저앉게 만들 것입니다. 이 여름에 우리 개인의 인생과 교회를 두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이런 주제와 가장 잘 어울리는 기도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목사님께서 드린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에 <뵈지 않는 조선의 마음>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은 옮겨와 앉았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 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 곳,
지금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질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질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 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 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이런 개척자적 믿음으로 자신을 불사른 결과 언더우드 목사님은 한국 교회 역사를 여는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변으로 전락할 것인가, 중심에 설 것인가, 전적으로 우리 믿음과 태도에 달린 문제입니다. 중심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