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사역

제 목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사역\"(3)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사역\"(3)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대회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및 선교 목사, 한국복음주의의회 회장


8. “하나님께 붙잡힌 기도와 말씀의 사람 박윤선 목사”

지난 40여 년 동안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은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이십니다. 내가 총신대의 교수로 봉직하고 있던 1979년 3월 박윤선 목사님께서 총신대의 신학원장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그 이후 나는 총신대에서 1년 7개월 동안 그리고 합동신학교에서 7년 7개월 동안 박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고 함께 일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었습니다. 나의 한 평생에 있어서 이성봉 목사님 김치선 목사님 등이 나에게 깊은 신앙적 감화를 미친 분들이지만, 박윤선 목사님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분으로 내가 가장 존경하고 가장 좋아하는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과 상의하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도 나를 퍽 좋아하셨습니다. 박 목사님은 시간에 상관 없이 나에게 전화를 거시고 그리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곤 했습니다. 때로는 질문도 하셨고 때로는 “이 말은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마” 라?하시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박 목사님의 입장에 동조했습니다. 박 목사님이 말하지 말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하면서 박 목사님의 입장을 교수들 앞에서 내 세우곤 했습니다. 따라서 나는 박 목사님과의 친근한 관계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반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박 목사님이 언제나 좋았습니다. 신앙적 감화와 인격적 감화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박목사님 자신이 쓴 박목사님 자신의 ‘생애’의 일부를 여기 그대로 옮깁니다. “나는 (1905년) 평북 철산군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 때부터 시작하여 사서 오경을 다 마쳤고 논어와 맹자는 그 주해까지 다 외웠다. 대동학교를 졸업하고 오산중학교에서 한 학기를 편입하여 지낸 후 선천 신성중학을 졸업하였다. 이 무렵 내 생애에 잊을 수 없는 신앙 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 가까이 수청고개 밑에 있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있었는데, 나의 심중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고 자문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즉시로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음성같이 솟아오른 것은,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니라\" 하는 분명한 대답이었다. 나는 그 때에 놀랄 정도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깨끗이 사라졌다… 나는 1931년 4월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신학을 배우는 3년 동안 숭실중학교 사감으로 일하였다. 그 당시 재학생 몇 명(김진홍, 방지일, 필자)이 힘을 합하여 \'겨자씨\'라는 신앙지를 출판하였다.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만난 사람 가운데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있으니, 김린서장로(후에 목사)이다. 부흥가이기도 한 그는 단독으로 \'신앙생활\'이란 신앙지를 출판하면서 진리를 파수하며, 교회의 세속화를 방지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던 특수한 지도자였다…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기 전에 고려신학교에는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학교측에서도 강의를 전폐하고 학생들의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협력하였다. 이 기도운동이 점점 퍼져 고려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한국 땅에 환난이 이르기 전에 이처럼 회개운동이 일어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환난을 대비하도록 하신 귀한 섭리였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 후 두어 달 지나서 6.25동란이 일어났고, 국군의 후퇴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피난민들이 각지에서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특별히 그 해 9.28 수복이 있기 전에 초량교회당에서 열렸던 피난교역자 부흥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강사로는 박형룡 목사, 김치선 목사, 그리고 나도 함께 협력하도록 되었다. 우리는 매일 새벽 기도회와 낮 성경공부, 그리고 저녁 집회를 인도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새벽으로 기억되는데, 그 시간에 참석한 교역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크게 통회하며 자복하는 회개를 시작하였다. 그 뼈아픈 회개는, 각자가 과거 일제의 핍박시에 신사참배를 한 그 죄로 인한 것이었다. 나도 단 한번이지만 신사참배를 한 범과가 있으므로 나는 언제나 그 일로 인하여 원통함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 때에 그 죄를 회중 앞에 공 고백하였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은, 이처럼 교역자들의 통회, 자복의 회개가 있은 후에 유엔군이 승리하고, 공산군은 삼팔선 이북으로 물러가게 된 사실이다.”

첫째, 박 목사님은 하나님만 아시는 분이었고 하나님께만 붙잡혀 사신 분이었습니다.
박 목사님은 금욕주의자는 아니셨지만 다른 일에 시간과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별세하시기 얼마 전 안만수 목사가 박 목사님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서울대공원에 모시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원숭이나 호랑이를 보여드렸지만 박 목사님은 그것들에는 별 관심을 나타내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 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교수님들이 함께 모일 때 피차 농담하는 것을 박 목사님은 별로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 교수 세미나를 할 때도 언제나 기도원으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가까이 붙어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철없는 합신 강사는 “합신이 기도원으로 가느냐?“고 불평과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미국 유학 시절, 친구 되시는 방지일 목사님에게 편지를 하시곤 했는데 외로움 가운데 강한 우정을 느끼셨던 박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셨습니다. “나는 웬일인지요 방제를 생각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주님께 대한 회개의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주에게 끌리지 않고 한갓 우정이나 향정에 끌리었던 것입니다. 주를 떠나서 우정으로 주를 떠나서 향정으로, 이는 사단의 유혹이었나이다.”

둘째,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자연히 기도 생활과 말씀 연구 생활로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기도를 생활화하신 분이었습니다. 기도를 쉽게 하신 분이 아니라 수고스럽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총신에 계실 때 역삼동 개나리 아파트에 사셨는데 매일 새벽, 택시를 타고 총신에 오셔서 뒷산에 올라가 2,3시간씩 기도하시는 모습을 한 6개 월 동안 옆에서 목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도 박 목사님을 흉내 내며 새벽에 총신 뒷산에 올라가서 새벽마다 기도하곤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어디에 가실 때나 또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시간에도 간간히 “주여! 주여!” 라고 그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곤 했는데 이 음성은 영혼의 호흡 소리와 같이 들렸습니다. 1979년도 총신에 학생 소요 사태가 일어났을 때에도 박 목사님은 기도로 일관하셨습니다. 학생들이 이사회에 반기를 들고 일어서서 이사들과 교수들의 자동차를 뒤집어엎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의 책임자이신 박 목사님께서 학생 대표들을 불러 타이르거나 사태 수습을 협의하는 대신 특별 기도회를 선포하시고는 밤마다 강당에서 기도회를 인도하셨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좀 불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박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기도회에 참석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박 목사님보고 “제가 기도회를 인도할 터이니 집에 가시라”고 하고는 밤 기도회를 인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기도회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들이 저마다 일어나서 “내가 누구의 자동차를 뒤집어엎었습니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 일관의 박 목사님의 삶의 자세를 지금 돌이켜 볼 때 “바로 그것이다!” 라고 새롭게 감탄하며 나는 지금 그 길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 1주일간 세브란스 병원에 계신 박 목사님을 거의 매일 찾아 뵙곤 했는데 그때야말로 기도로 일관한 기간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안식년으로 (평생에 처음과 마지막으로 가진) 8개월간 미국 휫튼 대학교에서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박 목사님이 피를 토하고 쓸어져서 병원으로 옮겨져 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국에 전화를 걸었더니, 박 목사님께서 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의식 중에 “그러면 그렇지!” 라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와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박 목사님께서 병상에 계시던 일주일 동안 박 목사님은 매일 기도로 일관했습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다가 죽고 싶다”고 고백하시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소위 박 목사의 의를 제해 달라”고 호소하며 기도하시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결국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주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셋째,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평생토록 말씀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주경 신학자의 삶으로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평생을 신 구약 성경 66권의 주석 집필에 바쳤고 평생을 성경을 가르치는데 바쳤습니다. 박 목사님은 “죽었다가 깨어나 다시 한 세상을 산다고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하겠노라”고 자주 말씀하셨고 “내가 평생에 힘써온 중요한 일은 신학 교육과 성경 주석 저술이었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박 목사님의 주석들을 세상의 여러 책들 중에서 가장 귀중하게 여기며 가까이에 두고 자주 읽습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마다 자주 “박윤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했다”고 토를 달곤 합니다. 박 목사님은 성경을 하나의 성경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먹고 말씀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것을 최대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박 목사님에게 있어서 성경 말씀은 양식이요 생명이요 기쁨이요 보화요 등이요 빛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주석과 설교에는 항상 새로운 영감과 통찰력이 나타났습니다. 박 목사님은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이 무엇임을 삶으로 나타내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분이었습니다.

넷째, 하나님께 붙잡힌 박 목사님의 삶은 또한 겸손과 진실과 착함의 인격으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잔잔하고 순박한 소년의 미소가 깃들어 있었고 가식이나 꾸밈을 모르는 진실이 풍기고 있었습니다. 성역 50년 기념 논총을 증정 받은 박 목사님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이라”고 고백했고 임종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오해하는 소위 박 목사의 의를 모두 지워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호소하시기도 했습니다. 박 목사님은 종존 나의 손을 꼭 붙잡고 격려와 위로와 훈계의 말씀을 주시곤 했습니다. “김 목사, 마음에 기쁨을 잃으면 안돼!” “힘을 내!” “강의 준비를 더 잘해야 돼!” “주님을 바라봐!” 겸손과 진실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날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보여주신 분이 바로 박윤선 목사님이십니다.

다섯째, 박 목사님은 또한 인간 관계나 교파 또는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폭 넓은 이해와 시야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도와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통합측 인사들은 물론 루터파 인사들까지 교파를 초월해서 친하게 지내셨습니다. 독일 경건주의 계통의 학자 게르하르트 마이어 박사를 초청하여 말씀을 듣고 교제하면서 박 목사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매우 만족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성 사역에 있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여성인 이동주 교수가 합신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이와 같은 개방적인 입장을 일부 교수들이 비판하자 박 목사님은 매우 속 상해하셨고 매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여섯째, 박 목사님은 개혁주의적 삶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라기 보다는 근본주의 또는 보수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박 목사님은 한국 교회 안에 개혁주의 신앙이 무엇이며 개혁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은 하나의 신학 체계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 뜨거운 신앙과 삶의 원리로 나타남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칼빈주의 신학은 배타적 분리주의가 아니라 적극적 포용과 교제의 삶인 것을 나타내 보여주셨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반 문화주의가 아니라 구제 사역과 선교 사역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내는 문화 변혁주의인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목사님은 결국 현세적인 정치 사회 문제에 치중하기 보다는 하나님께 붙잡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기도하면서 한 평생을 사신 분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평생에 하나님과 기도와 말씀에 붙잡혀 사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그 분과 함께 일하게 하시고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분의 사랑을 받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그리고 나의 스승 박윤선 목사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합니다. 박 목사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9.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한 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1시45분 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한국의 언론은 그 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쳐” 또는 “살아있는 작은 예수” 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이 세상을 떠나신 다음 달인 1996년 1월 20일 「군복음화」 신문에 “빛을 남긴 사람”이란 제목의 글을 실어 장기려 박사를 추모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 분의 삶을 세 가지로 기려보았습니다.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 일평생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따뜻하게 사신 분, 일평생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 그 분이 바로 장기려 박사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 보다는 삶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감동적인 설교 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치가들의 말도 믿지 못하고 목사님들의 설교도 신뢰하지 못하는 어둡고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밤과 같은 우리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순수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 계셨습니다. 말이나 설교 보다는 삶을 실천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가난하게 살라고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가난하게 사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큰 소리로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부부의 사랑이 육체와 돈으로 추해져 가는 이 세상에서 진정한 사랑은 영혼과 영원으로 아름답게 승화될 수 있음을 친히 보여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를 섬기라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을 섬기며 사는 오늘의 시대에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긴 분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고귀한 삶을 사셨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분의 가슴에 맺혀있던 이산의 슬픔과 분단의 아픔이 그분의 삶을 그렇게도 순수하고 따뜻하고 고귀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작은 예수로 산” 장기려 박사의 삶의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장기려 박사는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나선 어떤 사람을 향해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도 평생 집이나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 검소하고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삶의 목적은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나눔과 베풂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주인이나 소유주로 간주하지 않았고 종이나 청지기로 간주하며 평생을 무소유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수 많은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습니다. 1975년 정년 퇴임 후 집 한 채 없이 고신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4평 남짓한 남루한 사택에서 그의 여생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것이 상호교환의 원리입니다. 장기려 박사도 스스로 가난해 지심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부요케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는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톤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자본주의와 물질의 노예가 된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이 되는 말과 삶인지 모릅니다. 그는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물질만능주의와 사회적 부정부패를 개혁하는 최선의 방법은 스스로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며 스스로 검소하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부요케 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본주의로 부패한 우리의 사회를 보다 의롭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둘째, 장기려 박사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과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지망하면서부터 이런 소원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하나님, 의과대학에 들어가게만 해 주신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평생을 바치겠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경성의전부속병원에서 일하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1940년 일본 나고야 대학에 제출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평양 연합기독병원의 외과과장으로 일하면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사랑의 손길을 폈습니다. 1947년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외과학 교수겸 외과과장으로 성실하게 일하다가 1950년 12월 둘째 아들과 함께 월남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 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오늘의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 4일 앰블란스를 타고 피난민들로 북적대던 평양의 종로 거리를 달렸는데 그때 피난민 대열에 끼어 있던 아내와 다른 자녀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차마 차를 세워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고 둘째 아들과 함께 남하했는데 그때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남하하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간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그 아픔과 한에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이, 자기의 죄 값을 갚으려는 듯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한 없는 끝 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 여명의 간질 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밤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 직원들의 볼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1976년까지 25년간 복음병원의 원장으로 일하면서 환자를 돌보는 일과 의학연구에 몰두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로, 부산대 의과대학 교수로, 서울 카톨릭대 의과대학 교수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수 많은 의학 논문을 발표했고 간암에 대한 연구로 1961년에는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그는 환자들에게는 한 없는 사랑을 한국 의학계에는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그는 1975년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므로 그의 사람 사랑과 사회 봉사의 업적이 아시아적으로 인정 받기도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의 삶의 목적이 명예도 행복도 부귀도 아니었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죄인인 한 여인이 주님의 사랑에 너무나 감격하여 옥합을 가지고 와서 울며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듯이, 장기려 박사의 사랑을 받은 수 많은 사람들도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사랑과 봉사의 삶을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건오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 박사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의 복사판이 되고자 노력했다. 그의 삶이 너무도 헌신적이고 투명해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장기려 박사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그는 신학이론이나 교리나 교회의 제도나 전통을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냉랭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을 움직이는 감동은 주기 힘들다 고 생각하며 사랑실천의 삶만이 가장 가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강조했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과 봉사의 삶은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고신대의 이상규교수는 장기려 박사의 삶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다.” 장기려 박사의 사모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척추결핵으로 경성의전부속병원에서 6개월 동안 치료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주치의가 27살의 젊은 의사 장기려 박사였다고 합니다. 춘원은 그때 장기려 박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요.” 그는 돈이나 출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점점 우리들의 사랑이 이기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되어가는 이 시대에 장기려 박사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이 어떤 것임을 우리들에게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미움과 적대와 대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한반도 안에서 우리가 힘써 실천해야 할 일이 바로 우리의 가족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일임을 우리들에게 말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병든 우리 사회를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깨어져 가는 우리의 가정을 치료하고 살리는 길도, 분단된 이 땅에 평화와 통일을 가져 오는 길도, 바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애와 삶은 참으로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었습니다.

셋째, 장기려 박사는 주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주님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고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이루는 삶이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도 사람들을 섬기면서도 사실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주님만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1947년 김일성 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부임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환자를 수술할 때는 항상 기도를 하고 시작했습니다. 의사로서의 성실함과 신실함이 인정되어 1948년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 하시던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 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월남 후에는 부산에 산정현 교회를 설립하고 초대 장로로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 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습니다. 박사라고 불리는 것도 싫어했습니다.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 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분은 실로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 이었습니다. 하나님 섬김과 순종의 삶이 퇴색되어 가는 이 시대에 그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실제로 보여주고 갔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둡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순수하고 따뜻한 사랑의 빛을 비추면서 사신 한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릅니다. 순수하고 가난하게 사신 분, 사랑하며 따뜻하게 사신 분, 충성스럽게 섬기며 사신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얼마나 훈훈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분은 작은 예수로 살았습니다. 그 분은 단12:3에 기록한대로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들이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몸소 실천해 보여 주었습니다. 빛을 비추면서, 순수하고 가난하게, 사랑하며 따뜻하게, 충성스럽게 섬기면서 살아가야 할 것을 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분단 민족의 슬픔과 아픔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분입니다. 고귀한 분을 우리들에게 보내주신 우리 하나님께 부끄러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분과 같은 삶을 조금이라도 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 드리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을 다시 듣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기도하시겠습니다.


10. \"기도와 전도의 사람 신현균 목사\"

나는 상당 기간 동안 신현균 목사를 가까이 대하면서 그 분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이성봉 목사처럼 신현균 목사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과 단순하고 폭 넓은 성품과 재미있는 유머를 고루 고루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이 나라가 사는 길은 영적 각성과 부흥을 새롭게 체험하는데 있다고 강조하는데 나는 이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리고 신현균 목사는 누구보다도 북한동포를 사랑하고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데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신현균 목사의 인물과 사상의 특징들을 적어봅니다.

첫째, 신현균 목사는 기도의 어머니가 낳은 기도의 아들이었습니다.
신현균은 유치원 시절부터 평양 중앙감리교회에 열심히 다녔지만, 국민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교회를 등졌고 17살 때는 술집을 출입했습니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두들겨 맞고 밤에 끙끙거리며 잠들었을 때 어머니는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현균이가 하나님의 사명을 분명히 깨닫고 돌아와 주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이성봉 목사 같은 부흥사가 돼 팔도 강산을 누비며 복음을 전하는 종이 되길 원합니다.” 신현균의 두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결국 신현균은 어머니의 계속적인 눈물의 기도로 19살 때인 1945년 11월 어머니와 함께 임종순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철저한 회개를 체험했습니다.” (신현균, 「부흥 이력서」, pp. 20-33).

둘째, 신현균 목사는 구술과 리더십의 재능을 부여 받은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신현균은 국민학교 4학년 때 평양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어린이 동화구연대회\" 에서 당당하게 1등을 차지했습니다. 신현균은 1947년 평양 성화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신학생 대표가 되었고 평양신학교와 성화신학교의 합동설교대회 때는 언제나 1등을 차지하곤 습니다.

셋째, 신현균 목사는 부모의 말씀을 순종한 효자였습니다.
평양 체신국에서 받은 첫 월급을 몽땅 어머니에게 가져다 드렸습니다. 신현균이 17세 되던 1945년 어느 날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 놓고는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현균아, 너 아버지 친구인 이필섭씨의 딸 태연이를 본 적이 있느냐? 너하고 태연이 하고 약혼을 시킬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신현균은 어리둥절하고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습니다. “아버님, 좋으실 대로 하세요.” 요사이는 이런 효자를 찾아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넷째, 신현균 목사는 양무리들을 끝까지 보살핀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을 탈했던 유엔군이 후퇴하던 때였습니다. 신현균 가정의 친절에 감동된 유엔군 장교 제임스 대령이 신현균에게 특별한 호의를 제안했습니다. 신현균에게 군복을 입혀 군용 지프에 태워 서울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한 신현균 전도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임스 대령, 호의는 정말 고맙소. 그러나 가족과 교우들을 놔두고 갈 수는 없소.” 결국 신현균 전도사는 며칠 후인 12월 4일 아내와 자식을 포함한 127명의 교인들을 모두 데리고 걸어서 출애굽의 험난한 길을 떠났습니다. 평양을 떠난 지 20일 만인 12월 24일 서울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교인들은 물론 가족까지 버리고 남하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현균 목사는 가족과 성도들을 사랑하고 끝까지 보살핀 의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현균, 「부흥 이력서」, pp. 39-44).

다섯째, 신현균 목사는 기도와 기도 응답 체험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현균 전도사와 127명의 교인들이 고향을 떠난 지 2 주일이 되던 날 임진강에 도착했습니다. 강을 건너야 하는데 살얼음이 덮여 있는 상태라 강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일행은 임진강을 앞에 놓고 철야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들은 모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밤새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급강하해 임진강이 꽁꽁 얼어붙었던 것이었습니다. 신현균 전도사는 부산과 서울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므로 생활 문제를 해결 받곤 했습니다.

여섯째, 신현균 목사는 고난 중에서도 감사한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송파교회에서 받는 사례비로는 온 가족이 생활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탁을 앞에 놓고 아내가 흐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지을 쌀이 없어서 성미함에서 쌀을 조금 퍼다가 아침을 지었는데 양심에 꺼려 견딜 수가 없어서 운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현균 전도사는 아내를 위로하고 여전도 회장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밥을 굶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헤어져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지켜 주시고 굶지 않게 하시고 헤어져 있지 않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부엌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가 보았더니 이 장로님 내외분이 쌀 한 가마니, 김치 한 항아리, 장작 한 단을 갖다 놓고는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감사와 설음이 복받치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날 아침 신현균 전도사는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일곱째, 신현균 목사는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신현균 목사가 해군 군목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의 남부교회에 초빙을 받았던 1961년 9월이었습니다. 남부교회의 부임을 하루 앞둔 9월 27일 토요일 아침 부산에서 신현균 목사는 신학교 동창생 정영문 목사가 시무하는 시온교회를 찾았습니다. 정목사를 만나서 그가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부르짖는 중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간증을 들으며 신목사는 갑자기 기도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습니다. 그날 밤 신 목사는 밤이 맞도록 회개의 기도를 계속하는 동안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진동이 왔습니다. 하늘에서 환한 빛이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분명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너의 지난 죄는 다 용서함을 받았다. 내가 너로 이 민족 앞에 소망의 종으로 세우나니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어라.” 이 음성을 듣는 순간 강물 같은 기쁨과 감사가 온 전신을 휘감았습니다. 신 목사는 그날 밤의 체험이 그가 부흥사가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부흥 이력서」, pp. 75-81).

여덟째, 신현균 목사는 부흥사로서의 소명을 받은 복음전도자였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남부교회에 부임한 후 성령 충만한 목회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보다 분명히 찾기 위해 1962년 1월 5일부터 삼각산 민족 제단에서 금식기도를 하는 중 부흥사로서의 소명을 받고 부흥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전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는데 특히 한민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메시지를 전파했고 한민족의 선교적 사명을 강조했습니다. 1963년 8월 대전 보문산 기도원에서 이성봉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으며 그의 후계자로 쓰임 받는 종이 되기를 소원하며 헌신한 후부터 신현균 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나타났습니다.

아홉째, 신현균 목사는 인간관계가 원만한 단순한 성품의 소유자였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가나안 농군학교의 김용기 장로와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1970년대 한국교회의 신학자들과 부흥사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을 때 신현균 목사는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신학자와 부흥사와의 대화” 라는 행사를 마련하여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화해를 시도하기도 습니. 신현균 목사는 한경직 목사를 존경하며 그 분의 지도를 귀하게 여기곤 했습니다. 신 목사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두루 두루 잘 사귀는 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열째, 신현균 목사는 민족복음화의 열정을 가진 애국자였습니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1974년 엑스플로 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성공적으로 치러지는 것을 보면서 신현균 목사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보다 적극적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꿈꾸며 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그의 사역의 사활을 걸다시피 하면서 “77 민족복음화대성회” 준비에 임습니다. 금식 39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렁찬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너의 기도를 잘 들었노라. 너는 나의 종으로 민족복음화에 더욱 앞장설 것이며 너희 민족은 복음으로 통일되리라.” 1977년 8월 15일, 77성회가 개최되었을 때 1백만명 이상의 인파가 몰려왔습니다. 77성회에 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뜨거은 은혜와 부흥을 체험했습니다. 77성회 후 신 목사는 \"민족복음화본부”를 만들어 지금까지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해오고 있는데, \"97 민족통일 성령복음화대성회”를 주관하기도 했습니다.

열한째, 신현균 목사는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는 통일의 일꾼이었습니다.
신 목사는 “민족복음화운동본부”를 “민족통일복음화운동본부”로 개칭하고 통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7월에는 북한선교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중국의 연길, 도문, 용정, 훈춘 등 8개 지역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복음화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또한 굶주리는 북한 동포에게 생명의 식량을 보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고, 1996년 5월에는 일본에서 북한교회 지도자들과 만나서 교류와 협력을 시도했고 1998년 6월에는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열두째, 신현균 목사의 사상의 특징들을 열거해 봅니다.
1) 신현균 목사는 “복음전파를 통한 하늘 나라 확장”을 그의 사명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2) 부흥운동이 복음전파를 위한 가장 힘있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부흥운동을 전개하며 부흥사 양성에 매진했습니다. 3) 한 민족에게 특별한 종교적인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4) 비관적인 한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낙관적으로 조망했습니다. 5) 기독교 문화 창달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6) 부흥신학 정립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시도했습니다. 7) 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도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신현균 목사는 최근 즉 1998년 5월 17일 주일 저녁 강변교회에서 우리 나라와 교회가 사는 길은 부흥을 새롭게 체험하는데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나님께서 늦은 비를 부어주시마 약속하신 대로 마지막 때에 보내 주시는 “종말적 부흥”을 이 나라에 보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