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젊은이에 자화상

제 목   세 젊은이의 자화상
 
눅 9:57-62

“세 젊은이의 자화상”


♧ 오늘 우리는 <눅 9:57-62절>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 「세 젊은이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 해 드리겠습니다.




★ 먼 저 : 한 젊은이가 예수님에게 -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고

말했습니다.

★ 다 음 : 두 번째 젊은이는 -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하고 말했습니다.

★ 그 다음 : 세 번째 젊은이는 -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하고

말했습니다.




어려서 해외에 입양되어 갔던 사람이 커서 우리나라에 다시 찾아와서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애타게 찾는 모습을 우리는 T.V화면을 통해서 가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렸을 때 헤어진 형제를 어른이 되어서 찾는 사람들도 있고,

살림이 어려워 어린 자녀를 어디다 맡겼다가 잃어버린 부모가 먼 훗날 다시 애타게 찾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요. 요즘 그런 사람 찾기가 참 쉬워졌다고 합니다.




그것은 부모가 아닌 형제나 일가친척이 어렸을 때 잃어버린 어떤 사람을 찾을 때에도 -.

그 사람의 어릴 때 사진만 한 장 가지고 있으면 -.

그 사람이 커서 어른이 된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대충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기술이 발달되었다 고 해요. 거의 비슷하게 맞춘답니다.

그렇지만 다 잘 맞추는 것은 아니고요 - 막상 만나보면 전혀 다른 엉뚱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혀 다른 엉뚱한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ㆍ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ㆍ가서 얼른 부친을 장사하고 오겠습니다.

ㆍ가서 얼른 가족에게 알리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 보면 정말 열심이

대단해 보입니다. 각오가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에게 면접 과정에서 실격 판정을 내리셨던 것입니다.



&#983729; 첫째 : 한 젊은이가 예수님에게 -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1절)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도다”(58)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ㆍ예수님의 이 말씀은 완곡한 거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러한 거절은 호의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기로 자청하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치고는 너무도 야박해 보이는 말씀이었습니다.

병행구절인 <마 8:19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한 이 사람은 다름 아닌

서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서기관은 상당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지위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또 대개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이 이 서기관의 직위를 맡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서기관과 같은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권위가 한층

높아지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 사람은 당시의 다른 서기관들과는 달리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열망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지도급에 있는 서기관이었지만 형식적이고 세속화된 종교 활동에 깊은 회의를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를 통해서 참목자상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의 측근에서 사랑받으며 수많은 양무리를 돕고 있는 제자들을 볼 때 부러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삶이야말로 고상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는 일평생 예수를 따르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패기 있고 씩씩한 젊은이입니까?

얼마나 용기 있고 남자답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주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내가 주를 따르리이다” 그랬습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려면 박력도 있어야 하고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T.V에 여자 대학생들만 모아놓고 이야기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남학생들이 가장 매력 없어 보일 때가 언제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남학생들의 가장 추한 모습은 여학생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덜덜 떠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용기도 없고, 박력도 없는 남자가 가장 매력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찾아온 이 서기관은 용기도 있고,열정도 있고, 박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셨습니까?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기로 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서기관이 인간적인 영광과 출세를 바라보며 주님을 좇겠다고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사람의 고백 속에 허점이 있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성급하고, 신중하지 못하고, 희생정신도 없는, 내용 없는 사람임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5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ㆍ주님의 이 말씀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우리 성도들이 모두

깊이 명심하고 있어야 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성도들이 아직도 이러한 자각 없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깊은 깨달음과 결단 없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실패자가 되기 쉽습니다.

오늘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교회만 다니면 복을 받을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전혀 틀리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니면 복을 받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복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병도 고치고, 건강해지며,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고 출세한다는 그런 식의 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현세의 복을 무시하지 않지만 보다 영적이고 내세적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그러한 내세의 복을 위해서는 현세에서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적인 복을 바라보며 교회에 나왔던 많은 사람들이 상황이 어려워지면 이내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육신의 떡을 생각하고 왔다가 예수님께서 영생의 떡을 말씀하시자 다 떠나버린

<요 6:66절>에 나오는 무리들처럼 말입니다.




어떤 이들을 보면 아주 열정적으로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보기에도 시원 하리 만큼 열심히 기도도 하고 열정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속으로 들어가 보면 십자가의 고백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만한 용기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이것이 겉으로 포장된 신앙입니다.

겉에서 볼 때는 그럴듯한데 속은 비어있습니다.

마치 만원짜리 선물 세트와 같습니다.

겉에서 보면 화려하고 큼직하고 볼품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싸고 하니까 사갑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뜯어보면 속에는 내용이 아주 빈약합니다.

팔다 남은 과자 몇 봉지 들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보다 우리 성도들이 내용이 충실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정적인데 속 내용은 빈약한 그런 신앙은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20년, 30년 믿은 신앙의 경력보다도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내가 지금 얼마나 변화된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감사하면서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상황이 변할 때마다 흔들리는 일차원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온전한 제자들로 성숙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두 번째 젊은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983730; 두 번 째 젊은이는 -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 하고 말했습니다.




<60절> 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이 젊은이를 보면, 매우 효심도 있고 대단히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여 집니다.




첫 번 째 찾아왔던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데도 예수님께서 거절하셨드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사람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 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59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번 째 사람에게는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 이 젊은이가 예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 하옵소서”(59) 그럽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단,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가서 얼른 장례를 치르고 와서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를 모시는 일은 인륜의 대사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면 전시중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들에게 휴가를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고 말씀하십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황당한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윤리적으로 충분히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조선 땅에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었을 때 이 말씀은

유생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조상도 부모도 모르는 상놈들의 가르침이라고 배척하고 핍박했습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여기(60)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죽은 자」는 문자 그대로 죽은 자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죽은 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를 말합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자, 살았으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케 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믿지 않고 죽은 불신자의

장례는 불신자들에게 맡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될려면 자기 부친의 장례도 치르지

말아야 된다는 그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만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앞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b)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두 번째 젊은이에게서 발견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이 젊은이에게서 그가 예수님을 따르고는 싶은데 용기가 없고 쉽사리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임을 발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ㆍ바로 이것이다ㆍ했으면 태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인정하시고 그를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차라리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 싶은 그런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데려가셨든지 아니면 죽이셨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백성들이 어떻게 했어야 했습니까?




좀 더 기다리든지, 후계자를 뽑든지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제 모세가 죽었으니까 모세의 하나님도 떠나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금패물을 거두어서 그것으로 송아지 우상신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예민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보아서 금송아지를 만드는 데 모든 사람이 찬성을 했을 것 같습니까?

그 사람들 중에는 아론도 있었고,

모세의 장인도 있었고, 백부장, 천부장, 이스라엘 지파 장로 70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대 없이 일사불란하게 금송아지를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 어디를 찾아 봐도 누가 반대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해서 그 환경을 우리로 하여금 유추해서 연구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구해 본 결과 목숨을 걸고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훌” 입니다.

훌은 아말렉과 전쟁 할 때 아론과 함께 모세의 팔을 좌우에서 들어 주었던 사람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훌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백성들이 송아지를 신으로 만들려고 할 때 훌이 나가서 목숨을 걸고 반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곧 올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자. 모세가 혹시 죽었다고 해도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은

죄다.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다.” 그러면서 극력 반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흥분한 친애굽파 백성들이 돌로 쳐서 훌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훌이 그때 죽었다고 밝히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유심히 보게 되면 출애굽기 <32장>에서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다시는 훌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훌이 그 때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훌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옆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아론이 있었습니다.

아론도 처음에는 훌과 같이 극구 반대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훌이 돌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반대를 못하고 군중의 뜻에 맡기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에 동조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론이 누구입니까? 애굽에 모세와 함께 대사로 파견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은 잘 하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용기가 없어서 진리가 왜곡되고,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당장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내릴 줄을 뻔히 알면서도 돌에 맞아 죽을까봐서 말 한마디를 못하고 백성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 얼마나 큰 불행이 찾아왔습니까?

말 잘하는 사람은 그 달변으로 죄 짓는 사람들 앞에 턱 나서서 일장 연설로 삐뚤어진

마음을 바로 잡아 놓아야 그게 말 잘 하는 것 아닙니까?



꼭 말을 해야 하는데서는 말을 하지 못하고,

말을 안 해도 될 곳에서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쓸데없는 말입니다.

용기 없는 말입니다. 힘이 없는 무의미한 잡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려고 작정을 했으면-. 가는 길에 장애가 되는 것들이

있으면 절단하고 나아가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결단이 없으면 오늘 같은 세상에서 신앙 생활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결단력 있는 마음으로 앞으로 나갈 때 -.

홍해가 갈라지고, 바위 속에서 생수가 터지고, 하늘에서 만나가 쏟아지고, 닫힌 문이 열리고,

얽힌 일이 풀리고, 길이 나타나는 것 입니다.


&#983731; 그 다음 : 세 번째 젊은이는 -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1)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세 번 째 사람은 앞의 두 사람과는 달리 예수를 따를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하소서”(61)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때 예수님께서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61)고 하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발견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 젊은이가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려고 할 때 붙잡는 가족들의

말과 정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 주님과의 약속을 번복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갈 때 자기 부인과 상의를 하지 않고 아침

일찍 떠났습니다(창 22:3).




아브라함이 부인과 상의를 했으면 그는 못 떠납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정이 약하기 때문에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할지라도

아들을 죽이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혼자서 결단을 내리고

떠났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고 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즉석에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눅 5:11절>에 “베드로가 배를 육지에 대고 배와 그물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집에 가서 부인과 상의했더라면 그 역시 떠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 그처럼 매정하게 말씀하셨는지를

아셨을 줄 압니다.

그것은 그가 큰 일을 하는 주의 종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그 마음속에 마지막 남은 한 가닥의 정을 부인하지 못함으로

큰 일 앞에서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밭을 갈기로 마음먹고 쟁기를 잡았으면 오직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마음속에 남은 한 가닥의 미련과 정을 부인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잔인하고 무정한 것 같습니다.

인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냉혈인간으로 보입니다.

이때 사단은 우리의 마음속에 ‘꼭 이렇게까지 해가며 제자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조차 못하게 하는가? 해도 너무하다’ 는 불만을 심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길을 가야합니다.




마지막 남은 정과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인본주의가 되어 예수를

배반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의 연륜도 있고 인간적인 능력도 있어서 큰일을 할 것같이 보이는데

신앙 성장이 어느 한계에 머물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 이 문제가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생각,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꿈과 이상, 마지막 남은 세상에 대한 미련, 삶에 대한 정욕과 욕심을 부인해야만 위대한 결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예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전진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전심으로 하지 않는 봉사에 대해서는 기쁘게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쟁기질 하는 사람은 앞을 바라봐야 합니다.

밭을 꾸불꾸불하게 갈아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직무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부름 받은 사명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은 예수를

진정으로 따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 조건입니다.

쟁기를 잡은 자가 자주 뒤를 돌아보고 주춤거리면 똑바로 밭을 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ㆍ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조건이나 핑계나 구실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주저하는 몸짓을 멈춰야 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놓아야 합니다.

내 주장을 버리고 핑계도 삼키고,

닫힌 입술을 열어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예수님의 뜻을 헤아려,

뒤돌아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뒤에는 죄로 얼룩진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셔서 이루어 가실 그 일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