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유익

제 목   사랑의 유익
 
요 13:34-35

“사랑의 유익”


♧ 오늘 우리는 “요 13:34-35절” 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사랑의 유익」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 해 드리겠습니다.




󰊱 먼 저 : 성도가 사랑해야 될 이유 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 다 음 : 어떻게 하면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세 번째로 : 사랑의 유익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의 사랑장(章)인 “고전 13:1-3절” 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꾕과리가 되고”

(2)“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山)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천사의 말을 할 수 있고, 나에게 산(山)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랑」이 빠지게 되면 -.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게 아무 유익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이 없는 봉사, 사랑이 없는 지식, 사랑이 없는 믿음은 위선자가 되고,

율법주의자가 되고, 독선주의자가 되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공허한 빈 마음만 서로의 가슴을 더욱 차갑게 냉각시키면서

불신과 반목의 간격만을 넓혀갈 뿐입니다.

사랑을 모르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 첫째 : 우리가 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ㆍ성도가 사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1)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3) 사랑해야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롬 5:8절> 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저에게 얼마의 돈이나 선물을 달라고 한다면 저는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내 아들의 손가락 하나를 달라고 한다면 저는 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죄인 된 우리에게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신다고 하는 “확증”입니다.




<요일 4: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습니다.

죄 범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오셔서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누명도 쓰고, 손해도 보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

마침내 인간의 허물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죄인에 대한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본문 <34절> 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의 믿음 생활이 사랑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직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믿는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성령」께서 기뻐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이기주의」요,

「기복신앙」이요,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산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산 것은 다만 세월을 허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사람도 없고 사랑할 이유도 없다면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가끔 상담을 하다보면, 용서해야지...미워하지 말아야지...하다가도

막상 그 사람과 마주치면 또다시 미워진다고 호소하는 이들을 많이 만나보게 됩니다.




맞습니다ㆍ그거 맞는 말이거든요.

여러분ㆍ용서하고 사랑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미운사람 미워하기는 쉬워도ㆍ미운사람 사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ㆍ「미움」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미움은 그 사람을 보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그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시작입니다.

이 미운 마음이 자라서 시기, 분노, 증오 등으로 바뀌게 됩니다.

시기, 질투, 분노, 증오가 「불길」이라고 한다면 미움은 그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 49:6절> 에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라고 하였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친형제 였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아벨을 미워했습니다. 시기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벨을 죽였습니다(창 4:8).




에서와 야곱도 친형제였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야곱을 미워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창 7:41).




사울이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시기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일려고 하였습니다.

그랬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자신도 망하고 자손들도 망했습니다.

미움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마 5:21-22).

예수님은 우리에게 -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 5:44).



성도 여러분ㆍ저와 여러분은 미워하면서 살아야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미운 마음을 떨쳐버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ㆍ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ㆍ나를 사랑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ㆍ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ㆍ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ㆍ그래서 그 주님의 능력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는 못해도,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미운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엡 5:22절> 에 보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좋은 남편ㆍ괜찮은 남편일 때는 그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일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가 문제입니다. 정반대일 때가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는 그 정반대일 때도 말씀 앞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그렇지만 이때의 순종은 어떤 순종이냐 하면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남편에 대한 순종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순종으로 나타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일 5:3절> 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고 말씀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함으로 -. 완고한 고집이 나긋나긋한 순종으로 바뀌고 -.

ㆍ나의 부족한 믿음을 한 단계 올려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셋째 : 사랑하면 여러 가지 유익이 따르게 됩니다.




(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여기 <요 14:21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요 -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 25:45).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2) 그 다음 :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우리 주님께서 그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그 자녀를 잠시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언제나 그 마음속이 남편으로 가득 차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마음이 기쁩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합 3:17-18절> 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ㆍ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




(3) 사랑하면 허물이 허물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옛말에 「혼인하기 전에는 두 눈으로 보고, 혼인 한 후에는 한 눈으로 상대방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결혼 전에는 냉철한 관찰과 판단으로 상대방을 평가하되ㆍ일단 결혼한 후에는 웬만한 허물이나 잘못은 이해하고 덮어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ㆍ허물을 가려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벧전 4:8절>에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하였고,

<잠 10: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에 다니다가 그만 둔 사람들을 보게 되면 대개는 어떤 기분 나빴던 일 때문에 그만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미워하고 「정죄」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나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가려주게 되면 대신 하나님께서 내 허물을 가려주십니다.




(4) 사랑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요일 4: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51922;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은

(1)나보다 강한 자를 만났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입니다.

(2)그리고 죄를 범했을 때 내 마음에 찾아오는 감정입니다.

(3)그런가 하면, 어떤 일이 나에게 맡겨졌을 때 과연 내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데서 오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들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두려움들이 감히 나로 하여금 도전하지

못하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ㆍ또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합니다.

나의 모든 힘을 뺏어갑니다.

두려워하게 되면 지나치게 긴장하게 되고,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두려움은 사람을 마비시킵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하고 확신하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무척 아끼는 여자 청년이 미국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축전을 보낼 때에 -.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느니라”고 하는 말씀이 들어있는 <Ⅰ요 4:18절>의 성경구절을 택해서 보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침 전신 전화국 담당 직원이 예수 믿는 사람이었는데 보니까 -

「요한복음」을 잘못 적은 것 같이 생각 되서 축전에다가 그냥 <요 4:18절>이라고 적어 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마친 성도가 그 날 저녁에 남편과 함께 <요 4:18절>을

찾아보았더니 -.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라”고 적혀있더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혹시 전신전화국에 다니시는 분 있으면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5) 사랑하면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계 2:4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은 「처음 사랑」입니다.



(1)처음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2)처음 사랑은 때가 묻지 않은 깨끗한 사랑입니다.

(3)처음 사랑은 순수한 사랑입니다.

(4)처음 사랑은 꾸밈이 없는 사랑입니다.

(5)처음 사랑은 요구조건이 붙어 있지 않은 사랑입니다.

(6)사랑하는 이를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사랑입니다.

(7)조용한 것 같아도 그 중심에서는 언제나 사랑의 불길이 일어나는 사랑입니다.




ㆍ화산의 중심부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 펄펄 끓는 용암의 흐름처럼 -.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 처음사랑은 이렇게 열심히 있습니다.

◇ 처음사랑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ㆍ이 사랑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ㆍ이 사랑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6) 사랑하면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수고」하는 것이고, 사랑의 내용은 「주는 것」이고,

사랑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내가 사랑하고 있다면 힘든 것이 하나도 없어야 그것이 정상입니다.




사랑은 항상 주고 싶어 하고 사랑은 항상 줄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타적이요, 자기희생적이기 때문에 자기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




ㆍ짐이 되는 법도 없습니다.

ㆍ해도 해도 모자라고 -. 자꾸만 더하고 싶어집니다.

ㆍ망설임이 없습니다.




하향적인 사랑은 받는 사랑이지만, 상향적인 사랑은 바치는 사랑입니다.

성도는 받는 사랑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바치는 사랑에 대해서도 민감해져 있어야 합니다.




(7) 사랑하면 같이 있고 싶어집니다.

밥 먹다 말고 할머니가 건넌방에 가서 운 얘기 아십니까?

어느 날 할아버지 하고 할머니 하고 둘이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영감님이 할머니한테 대고 생전 안하던 소리를 한마디 했습니다.

「여보ㆍ할멈 사랑하오」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할머니가 “원- 영감도 노망이슈!”하고 말을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건너 방으로 건너갔습니다.

할머니가 건너가서 안오길래 할아버지가 가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울고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듣고, 너무 감격해서 가서 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 후로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가 더 좋아졌을까요? 더 나빠졌을까요?

(속으로 더 좋아져 봤자지 뭐...하는 분 없습니까?)




(8) 사랑하면 불평이 사라집니다.

사랑은 그가 받았던 어떤 나쁜 감정에 대해서 그 기억을 오래 쌓아두고 불쾌해

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어디 두고 보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고전 13:6).




(9) 사랑하면 화목해 집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신앙생활」과 「사랑하는 것」은 항상 「직결」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랑하면 화목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과 화목도 서로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0) 사랑하면 내가 좋은 성품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 성도가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이기적이던 기질이 이타적인 기질로 바뀌게 됩니다.

◇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게 됩니다.

◇ 눈물이 많은 사람으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ㆍ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이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게 되면, 그것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이기주의」요,

「기복신앙」이요, 「위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항상 직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면서 살아야 산 것이고, 사랑하지 못하고 산 것은 다만 세월을 허비한 것에

불과합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사람도 없고, 사랑할 이유도 없다면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사랑」은 사는 것이요,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요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