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문 : 사 6:1-8 ◎ 제 목 : 이사야의 세가지 발견
♤ 오늘 우리는 “사 6:1-8절”까지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이사야의 세가지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 첫 째 :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 둘 째 : 이사야는 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 셋 째 : 이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갑자기 기막힌 일을 당하거나 - 。너무너무 실망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면 - 。 「기도」도 않나오더라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 이사야는 바로 그런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러 성전을 찾은 사실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성전을 찾은 이사야가 기도중에 세가지를 발견한 사실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첫 째 :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해에 하나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1절>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 뵌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주전 739년의 일이었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위에 올라 52년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대하 26:3). 열왕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유다를 통치한 왕이 바로 웃시야 였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매우 선한왕 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신뢰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개혁 해야 될것은 개혁 했습니다. 농업을 진흥 시키고 산업발전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국방을 튼튼히 하고 영토를 확장 하였습니다(대하26:1-15). 블레셋 사람과ㆍ아라비아 사람과 마온 사람들을 쳤습니다(대하26:7). 휘하의 군사의 「수」만도 30만 7천 5백명이나 되었습니다. 웃시야 왕의 치세때에 유다는 전성기였던 다윗ㆍ솔로몬 시대의 국력을 다시 회복할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웃시야는 유다의 역사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왕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때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후 유다는 점점 국력이 약해졌습니다. 제6대왕 「아하시아」가 예후에게 살해된 후 그의 모친이자 바알 우상 숭배자인 「아달랴」가 유다를 손아귀에 넣고 다윗의 씨를 말리려 들때(대하 22:1-12). 왕자 가운데 요아스 하나만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 여호사브앗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은 적도 있었습니다. 약해질대로 약해져 있던 유다는 제9대왕으로 웃시야가 즉위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하 26:5절>에, “웃시야가 하나님을 구할동안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하셨더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웃시야의 긴 치세 기간동안 반란도 없고 크게 걱정해야 될 일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모두들 안심하고 자기일에 열중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웃시야 왕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정치를 잘해서 나라가 평안하고 나라가 발전 하는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웃시야는 그만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하26:16절>에 “웃시야가 강성하여 지매 마음이 교만하여 졌더라”고 하였습니다. 교만해진 웃시야 왕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전 제사도 자기가 직접「집례」할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사장 「아사랴」가 노를 발하였습니다. 그때에 웃시야 王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웃시야는 별궁에 격리되어 있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대하 26:19-20). 그동안 백성들은 정직한 왕이 들어서고 나라가 점점 부강해 지는것을 보면서 모두들 좋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마음 든든하게 생각해 오던 웃시야가...실족하고 세상을 떠나는것을 보면서...백성들은 크게 「실망」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변정세까지 심상치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불안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습니다.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면서 근동지방이 긴장과 불안으로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불안하기는 이사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웃시야의 죽음은 유다 백성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웃시야는 유다가 기댈수 있는 기둥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 이제 유다에는 더 이상 비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웃시야 왕의 죽음은 이사야에게 있어서도 절망 그 자체 였습니다. 그러면 이때 이사야가 한일이 무엇입니까?성전에 간 일입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간 일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낙심될때. 소망이 없다고 생각될때. 그때에 하나님께 나와야 됩니다. <히 4:1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던 중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만나 뵐수가 있었습니다(1절). 왜 하나님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자신의 모습을 이사야에게 보여 주셨습니까? 그것은 웃시야 같이 뛰어난 왕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는데 있었습니다. 웃시야처럼 특별하게 보이는 사람이 세상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이처럼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매우 암담하던때에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 지금 한창 위세를 떨치고 있는 「앗수르왕 디글랏 빌레셀 3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 교만해진 웃시야 王을 폐하시는 하나님。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 의와 진실과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 지극히 높으시고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이사야도 유다 백성들도 모두 다 낙심과 슬픔에 빠져있던 바로 그때에 - 。 큰 영광으로 성전에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 하나님을 바라 볼수 있어야 합니다. <시 42:12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고 말씀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실망 되는일이 있을 때 주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문제가 있을때 - 。답답한 일이 있을때-。 염려 되는일이 있을때-。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망되고 낙심되는 일이 있을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둘 째 : 이사야는 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사야가 무엇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하였습니까? ㆍ사업이 잘 않되서 였습니까? 아니었습니다. ㆍ보증을 잘못섰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ㆍ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 본 결과 중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인인 자기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천사의 한 부류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스랍들이 두 날개를 가지고 자신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하나님은 천사들조차도 직접 뵈올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스랍」은 문자적으로 불타다입니다. 뜨거운 신앙을 가진 천사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스랍들에게는 각기 여섯 날개가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그 중에 둘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스랍들은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있었습니다(2절b). 그것은 자신들의 불경건과 죄된 모습을 가리 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사야는 스랍들을 보면서 - 。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며 창화하는 스랍들을 보면서 자신이 너무 너무 뻔뻔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영광 앞에서 자신과 온 유다 백성들의 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과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악 중에 살고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절)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 받아야 할 사람들은 죄악의 도성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소돔과 고모라 사람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유대사회도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 34:29절>에 보면, 모세가 시내산 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받아 가지고 내려올 때에 그가 하나님과 말하였음을 인하여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나게 됩니다. 그 얼굴에 광채가 나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세 앞에 가까이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출34:35). 신약성경 <눅 5:8절>에도 보면, 처음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의 반응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당시 어부였던 베드로가 밤이 새도록 수고를 했지만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그 아침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베드로야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고기가 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그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깊은 물속의 사정까지 다 아시는 것을 보면 저분이 나에 대해서도 다 아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보면서 그분에게서 「신적 권위」를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 자들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에 의해 자신의 모든 죄가 다 훤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사야도 그랬습니다. 결코 사람이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앞에서 탄식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와 수치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나의 죄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 순간 - 자기가 더러운 죄인인것과 죄악중에 살고 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죄를 그대로 두면 망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자기죄를 자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사야가 - 자기가 죽일 죄인임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제단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게 해주셨습니다(6-7). 그것은,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내 백성도 입술이 부정한 사람들 이라고 고백을 했기 때문 이었습니다(5절). 여기 본문에서 말씀하는 입술의 죄는 총체적인 사람의 죄를 가리킵니다.「말」은 그 사람의 사상이요, 그 사람의 삶의 내용이요 그 사람의 인격이요,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그 사람의 전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랍을 시켜서 화저로 제단에서 취한 핀숯을 가져다가 그의 입술에 갖다 댄것입니다. 그것은 핀숯 자체가 어떤 정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사해졌음을 확신시켜 주기위한 하나의 상징 이었습니다. 그후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제 네 악이 제하여 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1: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자기죄를 자백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사죄의 은총을 받을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사야는 헌신에 앞서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죄의 고백에 이어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헌신에 앞서 먼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받을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 째 : 이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8절>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사야에게 「네 죄가 사해졌느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두 번째 말씀하는 소리가 이사야에게 들렸습니다.“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사야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러자 이사야가 즉시 응답하고 나섰습니다. 그것은 이시야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동안 웃시야만 회복되면 문제 될것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을 뵙고나서 완전히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나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죄인인 나를 용납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웃시야보다 더 충성스런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메신저」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백성을 깨우쳐야 하는 선지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 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선뜻 대답하고 나섰습니다. 조선땅에 태어나서 일제시대를 살고간 우리의 신앙 선배중에 이사야가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부름에 응답한 사람이있었습니다. 박관준 장로님(1885~1945)이 그중의 한분이었습니다. 그의 간증에 의하면 그가 평북 영변에 있는 그의 고향교회에서 새벽기도를 드리던중-。“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듣고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즉시 응답하고 나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 들을수 있습니다. <삼상 3:4절>에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어도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박관준 장로님은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나서 이사야처럼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날 아침 조간 신문에 보니까 「신사참배 문제로 조선 기독교도들에게 위기가 도래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일본 제국주의 승인하에서 신봉할수 있도록 종교 단체법을 개정하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 국회에 상정해 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박관준 장로님은 이의 부당성을 규탄하고 저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 갔습니다. 건너갈 때 그의 아들 연창씨도 같이 가겠다고 해서 같이 갔습니다. 선천 보성여학교 교사로 있던 안이숙씨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면서 같이 가겠다고 해서 같이 갔습니다. 세 사람은 1939년 3월 22일 일본제국주의 국회의사당 2층 방청석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종교법 개정안이 상정되자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격문을 뿌리며 항거 하다가 체포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그길로 투옥되었고 연세가 제일 높으셨던 박관준 장로님이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순교 하였습니다. 안이숙 여사와 박연창 선생도 옥중에서 심한 고문과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이사야도 그랬고。 박관준 장로님 부자도 그랬고。안이숙 여사도 그랬고。 모두다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1) 나라가 어지러울때, 큰 문제가 나의 앞을 가로 막고 있을때 -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망 가운데서 자기를 찾는자를 만나주시고 위로와 소망과 힘을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 어떤 절망에도 짓눌려서는 안됩니다. (2) 나와 내 백성의 죄를 회개 해야만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죄사함의 은총을 체험한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 지금은 우리가 각처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나에게 감당 해야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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