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편에 있는 자가되라

제 목   오른편에 있는자가 되라
 
본문: 마 25:31-46
⊙ 제목: 오른편에 있는자가 되라


★첫째: 주님께서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때에 오른편에 둘 자와
왼편에 둘 자를 구분하시게 됩니다.
★둘째: 사랑에서 나온 선행은 보상을 바라지 않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보상에 따르게 됩니다.
★셋째: 내 이웃에게 한 것은 곧 주님께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 25:31-46절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오른편에 있는자가 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가끔 묻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양옆에 강도 두사람이 같이 못박혔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구원받았지요? 어느편 강도가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물으면 대부분 「오른편 강도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눅 23:40절에 보면 「그 중에 하나」라고만 되어있지 ... 오른편 강도니 왼편 강도니 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본문에는 분명히 「오른편에 있는자가 복받을자」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영광중에 천사들과 함께 다시 오실때에 오른편에 둘자와
왼편에 둘자를 구분하시게 됩니다.


31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라고 하였고 33절에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재림」이라고 그럽니다. 주님께서 언제 재림 하십니까?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마24:36절>에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다시 오십니까?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큰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천사장의 호령과 큰 나팔 소리 가운데 많은 천사들을 대동하고 구름을 타고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살전 4:16) 그날에는 하늘과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가득하고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 떨게 됩니다. 주님께서 처음에 이 땅에 오실때에는 낮아질대로 낮아지셔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 드랬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때는 다릇습니다. 큰 영광 가운데 오십니다. 심판주로 오십니다. 그때는 성도들도 주와함께 영광을 얻게 됩니다. 믿는자는 누구든지 다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요 5:24절>에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자의 구원은 이미 확정적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구별」은 무엇을 말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보게 되면 마치 최후 심판날 「구원의 기준」이 「그 사람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좋게 묘사 되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의 「비유」는 「구원의 조건」이 「선행여부」에 달려있다는 것을 말하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라면 그 믿음이 마땅히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구원받을 믿음으로 합당한 믿음의 될수 있다」는데에 있습니다. <약 2:17절>에도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행함이 따르지 않는 거짓 믿음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씀 입니까? 분명히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상(賞)을 주시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행위」가 그 「기준」이 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지금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것입니다. 본문은 심판 날에 우리 주님께서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는 분명한 분별을 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32-33절)

33절에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양과 염소는 서로 같은점도 있고 다른점도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같은점
① 똑같이 성전제사에 제물로 사용되었다.
② 같이 생활하며 같은 목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
③ 먹는 것이 같으며 둘다 젖을 짠다.
④ 둘 다 뿔이 있고 둘 다 새김질을 했다.

*양과 염소의 다른 점
① 양은 성질이 온순한데 염소는 성질이 사납다.
② 양의 털은 백색이고 염소의 털은 검은색이다.(대체적으로)
③ 양은 털을 주인에게 바치는데 염소의 털은 깍을 수 없다.
④ 양은 동료들과 서로 협력하나 염소는 서로 싸운다.

심판때에는 이러한것들이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됩니다. 심판때에는 밝히 드러나지 않을것이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그때 양으로 구별된자들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염소로 구별된자들은 예수님의 왼편에 있게 됩니다. <갈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 했습니다. 하나님은 착오가 없으신 분 이십니다. 친정 어머니가 모처럼 딸들하고「연 날리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것이 어느 딸의 「연」인지 잘 모르겠더랍니다. 그래서 그냥 큰 연이 올라간다. 작은 연이 올라간다. 지금 꼬리치는 연이 올라간다 그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연세 많은 친정 어머니는 어느 연이 어느 딸의 연인지 잘 모를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양」은 순종을 “상징”하고 있고 「염소」는 “불순종”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가 이끄는대로 묵묵히 따르지만 염소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그에게 온전히 순종 하지만 그에게 속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서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성품을 본 받을수가 없고 예수님의 뜻대로 행할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성도가 어떤 위대한일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성도라면 누구나 어린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정도는 기분 좋게 줄 수 있어야 한다는데 그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비록 작은 선행이라 할찌라도 앞장 섬으로 해서 주님의 오른편에 선자가 되고 복받을자가 되어질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에서 나온 선행은 보상을 바라지 않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보상에 따르게 됩니다.

34절에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자들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임금」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님」을 가리 킵니다. 이 「임금」이 지금 누구에게 이런 “은총”을 베풀고 있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임금」이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그동안 자기에게 한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릴 때에 먹을것을 주었고 목마를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때 영접 하였고 헐벗을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때에 가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오른편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지고 아닙니다. 저희들은 임금님에게 그렇게 해드린적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랬는데도 「임금님」은 오른편 사람들보고 자꾸만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이 오른편 사람들에게 분명히 대접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본문 40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것은 곧 나에게 한것 과 같기때문」이라는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 입니까?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을 보실 때 그것을 남의 일로 생각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수님에게는 너 따로 나 따로 라고 하는것이 없습니다. 행 9:4절에 보면 그 사실을 잘 알수 있습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날도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중 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불러 세웠습니다. 불러 세워놓고 하늘에서 음성으로 그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지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도와 자기 자신을 「하나」로 인식하십니다. 주님은 특별히 고통 당하는 자들에게 마음을 두고 계십니다. 언제나 고통 당하는자에게 가까이 가 계시고 그들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우리 주님에게는 너따로 나따로라고 하는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 볼때에 우리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같은 마음을 품되 보상을 바라지 말고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마6:3절에 “너는 구제 할때에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것 입니까? 구제한 사람 자신도 그 구제 한것을 잊어 버리는것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하는 구제라야 합니다. 광고하지 않는 구제라야 합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하는 구제라야 합니다. 남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구제라야 합니다. 사랑의 빚진자가 되어하는 구제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구제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구제를 기뻐 하십니다. <고전13:3절>에 “내가 네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씀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르게 됩니다. <잠 19:17절>에 가난한자를 볼쌍히 여기는 사람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요 그의 선행을 여호와께서 갚아 주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는 남을 도울 때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더큰 보상을 받을수가 있습니다. <전 11:1-2절>에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누어 줄지어다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할수 있으면 많이 할수 있으면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 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많이 많이 갚아 주시고 싶어서 그러십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한일 다 기억하고 계시다가 여러날 후에 엄청나게 좋은것,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갚아 주시고 싶어서 그러십니다. <눅 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 했습니다.




★셋째: 내 이웃에게 한 것은 곧 주님께 한 것입니다. 34절에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40절에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내게 한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자」는 글자 그대로 미미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주님께서 지금 이 사람을 가리켜서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내 형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저와 여러분의 이웃이고 누가 저와 여러분의 형제 입니까? 지극히 작은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눅10장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대인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가진것 다 빼앗기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데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도 보고 그냥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평소에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하나가 지나가다가 그 강도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도와주게 됩니다. 그러면 누가 이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 입니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은 이 강도만난 사람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사실은 이 사마리아 사람이 먼저 강도만난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물론 잘 사는 사람 권력가진 사람 호의호식하는 사람도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마음을 두어야 할 우리의 이웃은, 강도 만난 사람들입니다. 다 빼앗긴 사람들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저와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중세기」에 「라운풀」이라는 기사(騎士)가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운전기사가 아니라 「말」을 탄 「무사」로서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의 평소 꿈은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제자들과 함께 최후만찬을 나누시면서 사용하신 은잔을 찾는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은잔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선후에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세계 여러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이가 어느것 머리가 히끗히끗한 노인이 되게 되었습니다. 입고 있던 「기사복」도 낡고 헤어져서 누더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습니다. 「라운풀」이 지치고 병든 몸을 이끌고 「샘」을 찾아가 주린배를 채우기 위해 표주박으로 물을 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온 몸에 진물이 나는 나병환자 하나가 다가와서는 「물」을 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라운풀」은 자기가 마시려던 「물」을 그 나병환자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한손으로는 그의 턱을 받쳐주고 한손으로는 정성스럽게 물을 먹여 주었습니다. 그때 였습니다. 갑자기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으로 변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라운풀」아! 네가 「은잔」을 찾겠다고 지금까지 헤메고 다녔지만 찾지 못한것 내가 알고 있다. 「네 손에 들고 있는 표주박을 자세히 보아라- 그것이 네가 찾는 은잔이니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표주박이 은잔으로 변했습니다. 「라운풀」은 깜짝 놀랐습니다.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시사」하고 있는것이 무엇입니까? 만찬석에서 사용한 「은잔」을 찾고 갈보리 언덕에 세워졌던 십자가를 찾는것이 주의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보다는 배고픈 사람, 헐벗은 사람, 목마른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그일이 비록 작아 보이지만 그 일이 주님의 일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그리고 「교회」가 우리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한국」에온 초기 선교사들은 이 땅에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고통 당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께 책망 받아 마땅한 죄가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41-46) 우리 모두 선한일에 부요한 자가 되어 주의 오른편에 있는자가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 복 받을자들이 다 되어질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