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살라

제 목   일하고 살라
 


오늘 우리는 <창세기 3:17-19>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일하고 살라”고 하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일은 저주가 아니고 복입니다.
★둘째: 일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셋째: 받은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을 얼른 보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생이 저주를 받게 되었고, 그 결과 사람에게「노동」이라고 하는 벌이 주어지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노동은 범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일은 저주가 아닙니다.





★첫째: 일은 저주가 아니고 복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17절>에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라고 말씀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 보면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죄는 사람이 지었는데 어째서 이처럼 땅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피조물의 대표자와 주관자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람이 피조물을 통해서 누리게 될 혜택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담이 범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에게 일을 할 수 없게 하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그에게 맡기신「일할 수 있는 특권」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창 1:28>에 보면, “천지만물을 다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관리하고 환경을 개선하고 문화 영역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사명과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일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았습니다. 땅에 충만할 것과 땅을 정복할 것에 대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런 특권을 부여해 주실 때가 언제였는가 하면 아직 아담이 범죄하기 전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사건은 한참 후의 일이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사건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그러면 일과 간련해서 범죄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인간이 피조물을 통해 누리게 될 혜택이 그만큼 줄어든 것입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이 그만큼 더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일이 더 힘이 들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일을 못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뺏어가지는 않았습니다.
일은 인류의 범죄의 댓가가 아닙니다. 일할 수 없고, 할 일도 없는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요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하게 됩니다. 그랬을 때,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일복을 주십니다. 일은 저주가 아니고 복입니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일 안하고 사는 것이 복(福)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과거 소위 양반이라는 사람들은 일하지 않았습니다. 선비들은 굶으면 굶었지 노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교와 유교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불교는 원칙적으로 삶에 대해 부정적이고, 노동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노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는 그들의 출가수행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들의 목표는「해탈」이며「그들의 생활신조」는「무소유」로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동냥으로 물질생활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일, 특히 육체노동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땅을 판다든지 나무를 벤다든지 하다가 혹 생명 있는 것을 죽일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땅을 파고 일구는 것을 살생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나 출가하지 않고 속세 가운데 사는 사람들까지 꼭 그렇게 해야 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속인들에게는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노동관은 확실히 이중적입니다. 유교는 어떻습니까? 일은 천민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것이 유교의 인식입니다. 유교는 처음부터 노동을 천시하였습니다. 유교에서는 사람을 우선 군자와 소인으로 구분합니다. 유교에서 생각한 백성들의 노동은 군자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 계층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쯤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유교에서는 농업을 비롯해서 공업과 상업은 상민(常民)들이나 해야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특히 정육점에서 고기 파는 것을 불교나 유교에서 다 같이 못된 직업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공무원 사회의 권위주의가 바로 이 유교의 산물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일하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져 왔던 것은 불교와 유교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성경이 들어오면서 노동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일제 치하와 6.25 동란을 겪으면서 일대 의식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맨주먹으로 일어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때마침 세게 정세는 서서히 냉전에서 벗어나 경제 전쟁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고, 세계 자본주의 시장이 우리나라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1960년대의 박정희 정권이 그 일을 떠맡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와 1870년대의 한국경제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이 나라 백성들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자!”고 하는 기치 아래 땀 흘려 일한 결과였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일」곧「노동」은 신성하다고 말씀합니다.「일」은 「인류의 범죄의 댓가」가 아닙니다.





★둘째: 일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말씀합니다. 여기 “누구든지”라고 하는 말은 “소유가 많든지 적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신분이 높든지 얕든지, 모든 사람이 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람도 여기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은 다 일을 하고 살라.”고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는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할 일이 있고, 사랑할 대상이 있고, 건강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1)내가 일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생명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2)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입니다. 병든 사람은 일할 수 없습니다. (3)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쓰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일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노동의 결과만 복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노동 자체를 복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정도 결과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일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건강합니다. 일거리를 잃어버린 사람은 그만큼 더 빨리 늙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람이 다르게 됩니다. 일하고 먹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하는 사람만 먹을 수 있고,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굶는 것이 피조세계의 법칙이면서 하나님의 법입니다. 한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밥맛이 언제 나게 됩니까? 놀 때 밥맛이 납니까? 일할 때 밥맛이 납니까? 일할 때 밥맛이 나게 됩니다. 일하는 사람은 밥맛이 나고, 밥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밥맛이 나야 살맛도 나는 것 아닙니까? 낮에 일한 사람은 밤에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단잠을 자게 되면 건강에도 좋습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펴낸 보고서에 보게 되면 일을 하게 되면 일한만큼 힘이 생기지만 놀면 노는 만큼 체력이 소모된다고 합니다. 노는 사람이 빨리 늙고 빨리 죽는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에는 남자 환자보다 여자 환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자 환자 가운데 5명 이상의 자녀를 둔 여성은 정신질환을 앓는 여성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자녀들을 돌보느라 정신질환을 앓을 새가 없고, 대신에 독신이라든가 자녀를 적게 둔 여성들이 정신병원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한가한 것이 문제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이 바쁠 필요가 있습니다. 약해지면 결국 병들게 됩니다. 건강은 부지런한 자의 것입니다. 일을 앞에 놓고 기뻐할 줄 알아야 됩니다. 일 자체가 복인 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도, 지혜도, 능력도, 보람도, 모두 일을 통해서 주십니다. 일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사회, 어느 공동체를 막론하고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불한당(不汗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 땀 흘리지 않고 먹고 살겠다는 자들입니다. “아니 不, 땀 汗”을 서서 不汗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불한당과 게으른 자는 사촌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한당은 자기는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것을 등쳐먹으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고, 게으른 자는 땅의 소출만을 소모하고 헛된 꿈속에서 안일만을 도모하는 자입니다. 성경에 게으른 자의 속성 가운데 하나는 핑계를 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잠 26:13>에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게으른 자들은 빈둥빈둥 놀면서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려 듭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실업자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소기업에서 운영하는 공장에는 지금 네팔, 방글라데시, 필리핀 등에서 외국인들이 수만 명씩 들어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1)우리나라 사람들이 힘든 일 안 하려고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2)더러운 것 만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3)돈을 많이 줘도 위험한 일은 안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4)돈이 적더라도 폼나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일을 할 때가 없다.”고 하는 말은 “내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만들어 놓고 나를 모셔가는 데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면, 게으른 사람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과 수고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는 일을 안 하겠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차차 하겠다.”고 그럽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사탄 4부자가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하였습니다. “지옥에 우리가 맡은 구역에 빈자리가 너무 많은데 어떻게 하면 그 빈자리를 빨리 채울 수 있겠느냐?”라고 아버지 사탄이 아들 사탄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큰 아들 사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서 사람들에게 성경은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 사탄은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가서 하나님도 없고, 천당도 없고, 지옥도 없다고 말하겠습니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가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막내아들 사탄이 말하기를 “나는 세상에 나가서 믿는 것도 좋지만 차차 믿으라고 말하겠습니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나서 얼마 후에 아들 사탄들이 사람들을 데려왔습니다. 큰 아들 사탄과 둘째 아들 사탄이 데려온 사람은 몇 사람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내아들 사탄이 데려온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여러분, “차차 믿겠습니다. 차차 봉사하겠습니다.”라고 하다가 때를 놓치고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셋째: 받은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그 사람이 잘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소질이 있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은사」라고 그럽니다.「은사」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에 의해서 우리 인생들에게 “재능과 소질과 능력과 한계”를 나누어 주십니다. 루터는 이 은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소질이나 재능은 나로 하여금 바로 거기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하는 부르심이요 명령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바람직한 직업은 어떤 직업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는 직업이면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좋다는 것이 답입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은 성경적인 말입니다. 불교나 유교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직업, 그러니까 술집, 사행성 업소, 마약 밀매 등 비도덕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직업은 안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떤 직업을 가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직업의 인기도나 매우 때문에 직업을 선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이 단순히 사회의 인정 때문에 교수가 되었을 때 그가 학생들 앞에서 당하는 좌절과 수모, 동료 교수들로부터 느껴야 하는 열등감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있습니다. 대우가 아무리 좋고, 수입이 아무리 많아도 신앙생활에 방해가 되는 직업은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마 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순위를 먼저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나의 일이 먼저 잘되고 나서 주님의 일이 잘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주님의 일이 먼저 잘 되고 나서 그 다음에 나의 일이 잘 되어야 합니까? 주님의 일이 먼저 잘되고 나서 그 다음에 내일이 잘 되어야 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2003년 2월이었으니까, 벌써 3년 반이 넘었습니다. 그 대 죽은 것으로 판명된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의사가 이미 죽었다고 판정을 했는데, 죽은 것으로 판정을 내린 지가 벌써 2시간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 죽은 젊은이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내 소원이니까 제발 딱 한번만 산소 호흡기를 갖다 대봐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가 그 어머니의 소원이라도 들어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소 호흡기를 갖다 댔는데, 그 때 그 아들이 살아 난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여러분, 그 아들의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그 아들을 그만큼 생각하겠습니까? <엡 2:1>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멸망 길에서 건져 내신 이가 누구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고 한 것입니다. 성도는 나를 위해 사는 자가 되기 전에 주님을 위해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

리빙스턴은 말하기를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아프리카에서 희생했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생한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즐거운 마음으로 일했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일 자체가 복인 줄 알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일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일은 저주가 아니고 복입니다.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일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