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고린도전서 2:1-5 ⊙ 제목: 어떻게 증거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고린도전서 2:1-5>의 본문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어떻게 증거해야 합니까?”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드리겠습니다.
★첫째: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증거해야 합니다.
<1절>의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한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시작하신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에”라고 하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내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할 때에”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전도할 때에”라고 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기 증거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는 누가합니까? ?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행 1:8).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까?
★첫째: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은「전도의 대원칙」을 확인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원칙이 우리에게 전해지기 전에 이것은 먼저 바울 사도의「전도의 대원칙」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은 당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소유한 높은 수준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풍부한 교양과 폭넓은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의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논리적인 말 자체가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하는 냥 그런 것에 그런 것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우직하리만큼 있는 그대로를 전했습니다. 자기가 만난「예수」를 전했습니다.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처음부터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고린도」에서 전도하기 전에 거기서 가까운「아덴」에서 먼저 전도했었습니다. 오늘날의「아테네」에서 먼저 전도했습니다.「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의 바울의 전도 연설은 너무도 유명합니다(행 17:22-34). 그 때 바울은 그들의 상황과 문화에 가장 알맞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스토아철학과 에피쿠로스철학에 심취한 그들에게 바울은 그의 철학적 지식을 총동원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ㅡ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응은 냉담했습니다. 단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조롱하였습니다(행 17:16-34). 그것이 바울의 아테네에서의 쓰디 쓴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바울이 그 후에「고린도」에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가면서 바울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등의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 때 “앞으로의 전도는 절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론이나 수단으로 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그렇게 함으로 해서 아테네에서와는 달리 고린도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사를 보게 되면, 최봉석(1869-1944, 평양)이라고 하는 목사님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전도를 열심히 한 목사님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전도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예수 천당!”이라고 외쳤습니다. 그에게는 이론이나 방법론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만히 들어가 있다가 갑자기 “예수 천당!”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때에는 사람들 가운데 “웬 미친 사람 다 보겠네!”라고 투덜대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투덜대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집에 가서 잠만 자려고 하면 그 말이 떠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이 최봉석 목사님에게「최권능 목사」라고 하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본명 보다는 별명이 더 유명해 지게 되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랬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듣기 편하도록 다듬어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각색을 하고 다듬어서 전했더라면 핍박을 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전했습니다. 액면 그대로 전했습니다. 상대방이 듣기 편하도록 다듬어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각색을 하고 다듬어서 전했더라면 핍박을 덜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전했습니다. 액면 그대로 전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말이 얼마나 거칠었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런 원색적인 욕을 먹으면서도 꾸역꾸역 요단강으로 나와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를 전하는 데는 말로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십자가의 신비를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총각이 자신의 마음을 사랑하는 애인에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복음 전도는 유식한 말이나, 잘 다듬어진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힘이 있고, 생명력이 있고, 거기서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도에 필요한 사람은 유식한 사람이 아니라「우직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너무너무 세련된 말은 오히려 거부감을 줍니다. 또 너무 완벽하면 상대방이 피곤해하게 됩니다. 너무 달변이면 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 전도는 매끄러운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투박하지만 자신감이 배어 있는 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훨씬 더 힘이 있습니다. 예수는 좀 우직하게 믿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전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증거해야 합니다.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그것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롬 8:6>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과 평안을 우리가 어떻게 획득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음으로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빌 3:8>에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갈 6:14>에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과 평안을 얻는 직통 코스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고전 1:18>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10가지 재앙이 내릴 때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재앙”이었습니다(출 11:5-6). 문인방과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 사람의 장자들은 그 때 다 죽었습니다(출 12:13, 30).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문인방과 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집의 장자들은 다 살았습니다. <요 1:29>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 가셔서 십자가 위에서 도말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십자가의 도」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믿고 “아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민 21:4-9>에 보면, 광야를 통과하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이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모세에게 불 뱀과 똑같은 모양의 놋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높이 달아 놓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불 뱀에 물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쳐다보게 하셨습니다. 쳐다보면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 일부는 비웃었습니다. 비웃으면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 까짓것 쳐다본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네!”하면서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더러는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놋 뱀을 쳐다보았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면 살 수 있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의심 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막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서 쳐다보았습니다. 그 결과, 비웃고 의심하면서 쳐다보지 않은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미련해 보이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방법에 순종해서 믿음으로 바라 본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한「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사람이 이성의 눈으로 바라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사람이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라볼 때에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뱀은 원래 저주 받은 동물입니다. 그런데도 저주받은 뱀이 광야에서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물어버렸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놋 뱀을 만들어서 장대 위에 높이 달게 하신 사실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창 3:14-15>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만든 뱀을 저주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그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여자의 후손」은 누구를 말합니까?「여자의 후손」은 보통 생육법에 의해서 출생하지 않고, 남자를 경험하지 않고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실「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갈 4:4).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의 세력을 깨트리시기로 작정해 놓고 계셨습니다. <요 3:14-15>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높이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놋 뱀」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놋 뱀 자체에 무슨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불 뱀에 물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를 보셨습니다. 불 뱀에 물려 금방 죽어가던 사람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놋 뱀을 바라보고 살아난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그러면, 이런 역사가 오늘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이런 역사가 오늘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 사는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 죽을 생명이 사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구원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것이「주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이것이「십자가의 신비」입니다.
★셋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증거해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말씀과 그의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령강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에 불같은 성령이 권능 있게 임함으로 해서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이제 승천하시고 나면 그 때부터는 제자들이 나서서 일할 차례였습니다. 제자들이 능력 있게 일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권능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복음 사역을 수행하는 일에 유대의 학식 있는 자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산헤드린공의회 의원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웅변가나 로마의 군사력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을 택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천하고 학식이 없는 자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를 기뻐하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로 하여금 오순절 성령 강림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되리라!”고 그러셨습니다. “되어 달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권능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증인의 역할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 전파 사역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와 같이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권세 있는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이 아니었습니다. 의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도 아니었습니다. 모두 다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유대의 교원으로도, 로마의 군사력으로도, 헬라의 철학으로도, 그 무엇으로도 그들에 의해 전파되는 복음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실 때 바윗덩어리 같고, 험산 준령 같은 강퍅한 마음도 능히 무너뜨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내 힘이 아닙니다. 이것은「신적 능력」이요, 이것은「영적 폭발력」입니다. 폭탄은 제 아무리 커도 폭발하지 않으면「쇠붙이」에 불과합니다. 폭발해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이「폭발하는 힘」, 이「엄청난 능력」을 가리켜서「권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에 엄청난 장애가 따를 것을 아셨습니다. 아시고 그들에게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율법의 시내산을 헐어버리고 유대인의 돌 같은 마음을 부서뜨리고, 거기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로마의 강압에 대항하면서, 십자가로 로마를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이 이 나라에 들어오게 하시고, 불교의 산을 헐어내고, 유교의 바위를 깨뜨리고, 열화 같은 대원군의 박해를 무릅쓰고 이 땅에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하셨습니다. <슥 4:6-7>에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두가 주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령의 폭탄적인 권능은 계속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고 은혜인지 모릅니다. 이 능력은 바로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힘입니다. 이 능력이 바로 우리가 전도할 수 있는 힘입니다! <고전 4:20>에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세상을 이기고 많은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도의 책임을 맡겨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①하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2:4). ②하나님께서 전도한 자에게 신령한 기쁨과 복을 주시고 상급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눅 10:17, 단 12:3). ③우리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도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기를 고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