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

제 목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본문: 열왕기상 19:9-13
⊙ 제목: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오늘 우리는 <왕상 19:9-13>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하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낙심하는 엘리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엘리야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평소 우리가 생각했던 엘리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엘리야를 보게 됩니다. 불의 사자로 불려진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갈멜산 꼭대기에서 우상을 섬기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하여 승리한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그 땅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고 있었으나 저 지중해 바다 쪽에 손바닥만한 구름 한 점이 떠오르는 것만 보고도, 큰 비가 올테니 속히 하산하라고 아합 왕에게 전갈을 보냈던 사람이 엘리야였습니다. 그리고 그 때 실제로 비가 흡족하게 내렸습니다.그런데 그처럼 믿음 좋고, 그처럼 당당하고, 그처럼 멋있는 엘리야가 바알 우상을 섬기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내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도망하고 또 크게 낙심하는 엘리야답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처럼 엘리야로 하여금 심한 절망을 맛보게 하였습니까?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낙심하는 엘리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절>에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라고 하였습니다.
(1) 이 때 엘리야는 이세벨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낙심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마 14:22-23>에 보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믿음으로 바다 위로 발을 내디뎠고「주님」을 바라보면서 걸었습니다. 그 때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면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볼 때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결을 때는 물 속으로 빠지지 않았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바라볼 때 물 속으로 빠졌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하는 소리를 듣고 생명을 검지기 위해서 도망했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생각했다거나 엘리야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엘리야가 낙심하게 된 원인이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문제를 만났을 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탄의 세력만 볼 것이 아니라 사탄의 세력을 능히 멸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 다음에, 엘리야가 낙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직 남은 것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0절> 하반절에 보면,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그랬습니다. 엘리야는 이제 자기 혼자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18:4>에 “왕궁 관원 오바댜가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굴에 숨겨 보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9:18>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은 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7천명」을 남겨두셨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앞으로 튼 선지자가 될 엘리사도 들어 있었습니다(19:16). 그런데도「엘리야」는 생각하기를 남은 사람은 오직 자기 한사람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혼자 고독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혼자 남았다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멀리「브엘세바(3)」로 도망을 쳤습니다.「브엘세바」는 엘리야가 활동하고 있는 이스라엘 땅이 아니었습니다. 남쪽 유다에 속한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 하게 되면 저 북쪽「단」에서부터 시작해서 남쪽으로는「브엘세바」까지를 가리킵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기 혼자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인물도 한번 두려움의 물결에 휩싸이다 보니까 거기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하기위해서는 먼저 나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정한 후에 주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연약함을 탓하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동정하시고, 싸매주시고 강하게 해주십니다. <히 4:15-16>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치 않는 자가 아니시니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3) 또 한가지, 결과에 너무 민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만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볼 때, 자기가 그 정도 했으면 아합 왕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왔어야 옳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리고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왕과 그 백성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모두가 다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이세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는커녕 도리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회개는커녕 오히려 더 완악했습니다. 엘리야가 볼 때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거센 흐름에 비해서 우리의 선(善)을 향한 의지나 믿음으로 살려는 애씀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기도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밝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보면서 “정말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정말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때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갈 6:9>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과에 민감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음: 엘리야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먼저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그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를 어루만져 주시고 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브엘세바로 간 엘리야는 그 곳 광야로 들어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 가서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오서”하고 말했습니다. <4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천사를 통해 그를 찾아가십니다. 찾아가셔서 물과 빵을 주면서 일어나 먹으라(5절)고 하시면서 그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7절>에 보면, 두 번째 또 와서 먹을 것을 주시고 그를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엘리야다운 엘리야로 다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해주신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책망도, 설교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창조의 손, 사랑의 손, 치료의 손, 위로의 손으로 그냥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때로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도 지칠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쓰러지고, 다 집어 치우고 싶고,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 곁에 와계십니다. 그 때 하나님이 왜 우리 곁에 와 계실까요? 어루만져 주시고 힘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힘을 얻은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시내광야에 있는 호렙산으로 가게 됩니다. 엘리야가 갔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호렙산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거기서 받았습니다(출 24:12-28). 호렙산의 다른 이름은「시내산」입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모세와 대화하셨습니다. 호렙산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셔서 백성들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곳으로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교제하시고 그로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2)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곳 굴에서 엘리야를 나오게 하셨습니다. 본문 <9절>에,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로 하여금 그 곳 굴에 들어가 있으라고 엘리야를 그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엘리야는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그 누구의 위로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아직도 굴속처럼 어둡고 답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두려움, 낙심, 절망, 이런 것들이 우리를 굴속으로 끌어 드립니다. 누구의 위로도 받고 싶지 않게 만들고 반항하게 만들고 혼자 있고 싶게 만듭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답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굴속처럼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굴속은 성도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곳은 엘리야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러고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엘리야의 믿음의 회복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명 감당을 촉구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거기서 그 굴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요 성도는 어둡고 답답한 곳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데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은 책망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사랑의 말씀」이었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이해하시고 용납하시는 마음이 더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욘 4:2>에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아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요나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책망보다는 이해하시고 용납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끝으로,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셨습니다. <12절 하반절>에, “불 후에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조금 있다가 드리고, 먼저 제가 들은 얘기부터 한 가지 해드리겠습니다. 어느 농부가요 집 앞에 있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그 남편을 향해서 “이제 점심 드시고 하세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하는 말이 “알았어요! 나 곡괭이 좀 숨겨놓고 들어갈게요.”하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점심을 먹으면서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크게 말하면 안 잊어버릴 곡괭이도 잊어버리겠던데요.”하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남편이 곡괭이 숨겨 놓은 데를 가보았습니다. 가보았더니 그새 누가 가져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집에 들어온 남편이 이번에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누가 곡괭이를 가져가 버렸어요.”하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아주 작은 소리,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엘리야로 하여금 굴속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산 앞에서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위엄찬 모습으로 엘리야 앞을 지나가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서뜨리고 있었습니다(11절 중반). 땅이 갈라지고 지축이 뒤흔들리는 지진도 일어났습니다. 엘리야가 잔뜩 긴장한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지진 후에「불」이 있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12절). 그「불」은 뇌성병력을 동반한 불이었습니다. <12절>에 “그러나 거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거기서 하나님 보기를 원했지만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다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이제 나 같은 것은 아예 돌아보시지도 않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신자의 영적피곤이 언제 찾아오는가 하면 바로 이런 때에 찾아오게 됩니다. “나 같은 것은 이제 생각도 안 하시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 때 영적 피곤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너무 “기적 기적” 말라는데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눅 11:29).”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그 표적밖에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크고 굉장한 방법만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크고 굉장한 것을 사모해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폭풍이 일어나고 지축이 뒤흔들리는 커다란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고요한 중에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순경 중에 주의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역경을 주셔서「주의 음성」을 듣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고요한 중에 말씀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 사실을 증거해주는 말씀이 <12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고 하였습니다. 불 후에 들려진 세미한 소리는 글자 그대로 고요하고 작은 소리였습니다. 아주 가늘게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 작거나 다른 소리에 압도되어 어떤 이는 무시해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세미한 소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바로 그런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교훈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조용한 가운데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 등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심판의 수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벌만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셔서 일꾼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엘리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그 음성이었습니다. 진노하여 책망하는 음성은 크고 격분한 음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들려진 음성은 사랑과 은혜가 듬뿍 담긴 고요한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음성 들려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떠들어야만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란해야만 무슨 일이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고요한 중에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나가십니다.





◈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

오늘 우리는 엘리야의 낙심을 보면서 “인간의 위기는 실패했을 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낙심과 낙담은 실패했을 때 찾아오게 마련이지만 성공했을 때에도 찾아옵니다. 어쩌면 갈채 소리 다음에 오는 외로움이 더 위험합니다. 낙심했던 엘리야는 손해를 많이 보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마음고생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육신적으로도 말할 수 없이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었습니다.
현대는 큰 것을 중히 여기고 작은 것은 경히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많은 경우 고요한 중에 말씀하시고 고요한 중에 역사하십니다. 고요한 중에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