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창세기 3:1-9 ⊙ 제목: 사탄의 전략
오늘 우리는 <창 3:1-9>까지의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사탄의 전략”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넘어지게 한 사탄의 전략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첫째, 둘째, 셋째로 나누어서 말씀드리지 않고 그냥 본문을 한 절 한 절 읽어 내려가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참으로 슬픈 기사입니다. 인간이 시험에 빠져 죄를 짓고 타락하는 내용입니다. 사탄은 인간을 멸망시킬 수는 없어도 타락시킬 수는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명을 뺏을 수는 없어도 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는 있습니다. 사실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 동산에는 먹을 것이 풍부했으며, 동산을 관리함으로 적당한 육체의 운동을 통해서 건강을 유지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곳에도 시험하는 자가 뱀을 이용하여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1절 상반절>에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그랬습니다.「뱀」역시「피조물」입니다. 단, 뱀이 처음부터 기어 다녔는지, 아니면 처음에는 서서 다녔었는데 저주 받은 후부터 기어 다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여기 <창 3:1>에 나오는 뱀의 정체는 사탄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하였습니다(계 20:2). 뱀의 생리가 간교한 것을 이용해서 사탄이 그 도구로 삼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뱀이 어떻게 하와와 대화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민 22장>에서 나귀가 발람을 책망하는 것을 보면 이 역시 납득할 수 있습니다.
<1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말하게 됩니다. 뱀이 대화를 통해 하와에게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뱀도 하나님께서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라고 말한 것은 하와와 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었습니다. 얼마나 간교한 질문입니까? 직선적으로 묻지 않고 의문을 야기 시키는 질문을 합니다.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하시더냐”고 말함으로 의문을 야기 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마귀가 “나는 마귀다! 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너를 넘어뜨리려고 왔다!”고 말하면서 공개적이면서 직선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한다면 아마 그 누구도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마귀가 하와 혼자 있을 때 그에게 접근하여 교묘한 방법으로 대화의 물꼬부터 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옆에 남편 아담이 있었다면 하와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경고를 받은 사람은 아담이었습니다. 하와는 그 후에 지음을 받았습니다(창 2:22). 그 후에 지음을 받은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는 말을 아담에게서 들었습니다. 따라서 하와는 상대적으로 경계심이 덜했습니다. 다음, 여자가 더 연약하다는 것을 알고 사탄이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여자들이 섬세한 것은 남자들이 못 따라 갑니다. 그러나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고 합니다. 칭찬에 약하다고 합니다. 무너질 때 보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사탄이 하와를 공략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사탄이 왜 하와 혼자 있을 때 그에게 접근하였습니까?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고독하다고 느낄 때 또는 지금은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할 때 사탄이 그 틈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부부는 언제나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잠시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 상 떨어질 수는 있으나 곧 다시 합하라(고전 7:5)”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잠도 같이 자고, 식사도 같이 하고, 자동차도 같이 타고, 교회도 같이 나오고, 휴가도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라고 하는 신앙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향상되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기르게 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6개월 정도만 교회에 나오지 않고 세상에 파묻혀 살게 되면 그 대는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할 수 없게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성도의 교회 생활과 성도와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마귀는 하오가 금단의 나무 가까이에 있을 때 그 때를 이용해서 그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마귀의 유혹의 대상은 하와가 아니었습니다. 하와가 아니라「아담」이었습니다. 아담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그와 가장 가까운 하와를 미혹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를 통해서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구원 사역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것이 사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사단이 지금도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합니다.
<3절>을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3절>은 누가 누구에게 한 말입니까? 뱀이 하와에게 한 말입니까? 하와가 뱀에게 한 말입니다. 여기 “죽을까 하노라”고 한 이 말은 사실 먹고 싶기는 한데 죽을까봐 못 먹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먹어도 괜찮을까?, 괜찮겠지?」하고 뱀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현저히 약회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약 2:17>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죽을까 하노라”고 말씀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또,「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보탬으로 해서 말씀을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개혁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하는 것은「신비주의」요 하나님 말씀에서 삭제하는 것은「자유주의」입니다. 우리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서는 큰일 나는 줄 아는 것이 우리 개혁주의입니다. <계시록 22:18-19>에,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고 하였습니다. 하와는 “나도 이 열매를 먹고 싶기는 한데...”라고 사탄에게 틈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하와에게 바짝 다가섰습니다. <엡 4:27>에 “너희는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무엇을 가지고 하와에게 바짝 다가섭니까?
<4절>에 보면,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왔던 사탄이 이번에는 아예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반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은「거짓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모든 인생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요 8:44>에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말하기를 “너희가 그 금단의 열매를 먹더라도 절대 죽지 않는다! 오히려 너희 눈이 밝아져서 너희가 하나님이 같이 될 것이다!(5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5절>에 보면,「너희가 하나님같이 되리라」고 했는데요, 원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쓸 때 “여호와”라고 쓰지 않고 “엘로힘”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전능자”라는 뜻의 “엘로힘”을 쓰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 입니까? “죽기는 왜 죽어? 도리어 전능자의 반열에 올라서게 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이기심, 질투심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이간질」하였습니다. 사람들을 보게 되면「이간질」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이간」하는 것은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합을 깨고 불화와 분열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 이기심, 이간질 이런 것들은 다 파괴적 요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이용한 시험이 아담과 하와에게만 있었던 것 아닙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왜? 어째서?”라고 하는 의문이나 불만이 생기게 되면 즉시 “사탄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이 무엇을 이용합니까? 그들의 허영심을 이용합니다. 사탄이「너희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을 빼고 그냥「따 먹으라!」고 했으면 아담 부부는 절대로 그것을 따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 대해서도 허황된 마음과 허영심을 곧잘 이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걸면 100% 넘어갑니다. 사기꾼들은 모두 사람의 허황된 마음을 건드려서 걸려들게 만듭니다. 아담 부부도 그것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약한 부분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여자가 그 나무를 본 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범죄의 단계를 볼 수 있습니다. (1) 하와가 그 나무 열매를 보았습니다. 보니까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죄가 눈을 통해 들어옵니다. 눈을 통해 유혹받는 것을 성경은 안목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 2:15-16). 그래서 영어로「eye gate」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눈을 세상의 허황된 것에서 돌이켜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다음에, 하와가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습니다. 죄악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입니다. 죄악의 길은 물꼬를 터놓은 봇물처럼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2)”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그 다음, 자기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죄는 이렇게 전이(轉移)됩니다. 자기 혼자서만 범죄하지 아니하고 가장 가까운 남편을 끌어들였습니다.
<7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가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지기는 밝아졌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의 말대로 하나님처럼 되지는 않았습니다. 도리어 눈이 열리면서 수치심과 두려움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하기 전에는 벗었으나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범죄」하고 나니까 부끄러움이 생겼습니다. 이처럼「수치」는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상당부분 상실한 인간이 느낄 수밖에 없는 죄에 오염된 감정입니다. 이것을「양심」이라고 그럽니다. TV뉴스에 보면 죄지은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립니다.「양심」의 두 번째 반응은「두려움」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겁이 나게 됩니다.「두려움」은 사람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수 없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고 도망가게 만듭니다. 불순종의 죄를 범하기 전에는「선과 악」양쪽을 다 아는 양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범죄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었고 양심이라고 하는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하면 “양심껏 살면 되는 것 아닌가요?”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심이라는 것이 실상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어떤 미군 부부가 한국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한국인 고아 한명을 입양하기로 하였습니다.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봤는데 그냥 봐가지고는 아이의 성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기사를 생각하고는 아이들을 한번 테스트 해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일주일동안 아주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부부가 외출을 하면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우리가 나가서 볼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네가 좀 집을 보고 있거라. 만지고 싶은 것은 다 만져도 되고 먹고 싶은 것은 다 먹어도 상관없는데 저 문밖에 있는 상자는 열어보지 말아라!”하고 말했습니다. 아이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마음이 자꾸만 문 밖에 있는 상자로 갔습니다. 그래서 ‘살짝 열었다가 닫으면 되는 거지 누가 알랴!’ 싶어서 조심조심 가서 뚜껑을 살짝 열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안에서 새 한마리가 나와서 푸드득 하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다 똑같았습니다. 단 한명도 열어보지 않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서이요 실체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양심 양심”하기는 하지만 실상 그 양심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주 보잘 것이 없는 것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심을 결코 인간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숨으려고 할 뿐입니다.
<8절>에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떄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의 상태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아담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던지신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어째서 거기 있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지금 네 사명을 감당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예 - 왕상 19:9). 이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행한 대로 갚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죄대로 갚지 아니하십니다. 지금도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주(主)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입니다. 지혜롭습니다. 참으로 간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과 허영심과 성숙하지 못한 인격 등을 이용해서 아주 교묘하게 유혹하고 넘어뜨립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사탄의 시험이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신앙의 길, 진리의 길, 천국의 길에서 유혹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전략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엡 6:10-17), 깨어 근신하기만 하면(벧전 5:8-9) 반드시「승리」할 수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