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누가복음 18:9-14 ⊙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18:9-14>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세리의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는「신앙」의 바로미터(Barometer)입니다. 기도내용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수준과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 사회에 있어서의 두 극단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철저한 신앙생활의 상징으로서의 바리새인과 죄인의 대명사로서의 세리, 이렇게 극단적인 두 인물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비유인 동시에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창작도 설화도 아닙니다. 언제나 사실을 들어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이고, 하나님께서 역겨워 하시고 외면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진다는 법칙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바리새인의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바리새인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리새인의 기원은 주전 539년 이후, 그러니까 유대민족의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중에 회개하게 되었고, 회개하는 중에 어떻게 하든지 고국에 돌아가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려고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들은 613가지의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613가지의 규례를 경건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하였습니다. 성경 구절을 몸에 걸고 다녔습니다. 긴 기도를 하였습니다.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들은 숫자는 비록 많지 않았지만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을 대단했습니다. 포로기 이후 백성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형식과 껍데기만 남게 되면서, 형식주의, 외식주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소개된 바리새인의 기도는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바리새인의 모습을 잘 나타내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이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① 그들은 따로 서서 기도하였습니다(11절). ②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않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11절b). ③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했습니다(12절). 여러분들이 보실 때 어떻습니까? 이 기도가 잘된 기도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잘된 기도가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께 아무 것도 구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랑, 다른 사람 고발한 것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문제 있는 기도입니다.「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자랑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어떤 경배도, 어떤 고백도, 어떤 간구도 없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고 의롭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슴 칠 필요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사람을 두 계층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의인과 악인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혼자만이 의인인 것처럼 자처하였습니다. 자기의 죄는 지적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죄만 지적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다른 사람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있습니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과 세리를 자기의 기도 속에 끌어들여 자신의 선행의 화려한 색깔을 더욱 돋보이게 할 어두운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따로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은 함께 기도하러 간 세리를「멸시」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로운 자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실상을 모르는 영적 소경들이며(마 23:16), 회개를 모르는 병든 신앙인들입니다(눅 7:29-30).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외적인 행위만 중요시하고 마음의 생각은 아무래도 상관치 않는 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남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의(義)를 내세우고 있을 뿐, 자기 마음속에 숨어 있는 토색, 불의, 간음, 음도 등 온갖 악한 생각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해 버렸습니다. 또 여기 보면, 바리새인은 자기의 공로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기의 공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금식」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어찌하든지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는데 있습니다. 금식이 주목적이 아닙니다. 기도가 주목적입니다. 기도를 보다 깊게 하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식은 공로가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금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잘만하면 웬만한 병쯤은 뚝 떨어져 나가는 효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육신에 대한 과잉보호와 약물남용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항병력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병균이 침투해 들어오면 스스로 싸워서 이길만한 항병력을 갖추지 못한 채 치유능력을 잠재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금식을 하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온 몸에 비상이 걸리게 된다고 합니다. 항병 예비 병력이 총동원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식 중에는 감기도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웬만한 병쯤은 거뜬히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건강이나 미용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좀 더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해서 금식합니다.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십일조는 소득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다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으로 1/10을 대표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또 자기를 위해 사용하기 전에 소득의 1/10을 구별하여 먼저 하나님께 드림으로, “내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드리겠다.”고 하는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말 3:10, 마 23:23).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이 명하신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러므로 금식이나 십일조 생활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공로도 아닙니다.「십일조」드리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될 것을 내가 드렸을 뿐인 것입니다. 또 자랑할만한 일을 했다하더라도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다음: 세리의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세리는 유대사회에서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그것은 세리들이 로마 정부로부터 징세 업무를 청부 맡은 후 온갖 착취와 못된 짓을 일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 정부는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민족으로부터 나쁜 감정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세금 거두는 일」을 자기들이 직접 나서서 하지 않고 주둔지 국민을 내세워서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 땅 세리들은 대부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세리」치고 부자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금 징수 업무를 청부 맡은 세리들은 로마 정부가 요구하는 액수만큼만 입금시키면 되었습니다. 나머지는 적당히 자기 몫으로 챙길 수가 있었습니다. 때문에「유대인들」은 같은 동족이면서도 이 세리들에 대해서만큼은 창기처럼 취급하였습니다(마 21:13). 모든 세리들이 다 악역을 맡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세리들은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러면 세리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할 말이 많았던 반면에 세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세리는 진지한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을 자랑했지만 세리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생각하고 다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떤 소망의 근거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대개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그 사람들은 눈을 뜨고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기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세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그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수치심 때문에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세리도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10절).”고 했는데요, 사실은 성전 내부인 성소가 아니라 성전 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도하러 성전까지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것은 지금 이 세리가 그동안 자기가 세리 노릇을 하면서 잘못한 것을 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성전에 나온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혼자 고민하지 않고, 또 자포자기 하지 않고 죄를 자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장소인 성전으로 나온 것입니다. 때문에 이것이 잘한 것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세상 법도 자수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선처를 해줍니다. 그렇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후에 가장 먼저 취해야 될 행동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이 볼 때, 이 세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유대 최고의 법정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는 세리나 창기 같은 사람은 아예 법정이나 선민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게 하였습니다. 때문에 세리는 선민의 자격을 잃고 버림받은 존재로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 세리를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정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리는, 하나님만은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실 줄 믿고 성전으로 나왔습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이 세리와 같이 떳떳하지 못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실족하여 큰 죄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와야 됩니다. 나와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5:32).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와야 합니다. 이웃 사람들이 비판하고 세상 사람들이 멸시할 지라도 하나님은 용납하시고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께 범하는 가장 큰 죄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토색도 아니요, 불의도 아니요, 간음도 아닙니다. 바로 어떤 죄일지라도 회개하면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 세리와 같은 자세로 하나님께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오는 성도를 반갑게 맞이해 주십니다. <시 1:18>에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범죄」후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창 3:8). 그런데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가서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죄를 범한 후에 우리가 취해야 될 최선의 태도는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리가 바로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와서 죄를 자복한 후에 하나님의 사유하심의 은총을 입고 은혜를 힘입고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육신의 질병도 환자가 의사에게 고해야 의사가 효과적으로 고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질병인 죄악도 우리가 먼저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죄를 낱낱이 하나님께 고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잠 28:13>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성전에 갔지만 한사람은 자랑하기 위해서 갔었고, 한사람은 기도하기 위해서 갔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눈에는 모든 사람이 죄인으로 보이고, 자기만 의인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세리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의인으로 보이고 자기만 죄인으로 보였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이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바리새인 노릇하면 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주의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도「바리새인 노릇」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도 차별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요 동시에 모든 성도는 똑같이 구원받은 의인입니다. 오늘 성경에 이 사람 세리가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라고 인정을 받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14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