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누가복음 24:13-35 ▣ 제목: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4:13-35>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 해드리겠습니다.
★첫째: 두 사람이 낙심한 채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셋째: 두 사람은 그 시로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문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글로바(18)라고 하는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제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 속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무척 사랑하고 존경하던 일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고향은 예루살렘에서 25리 떨어진 엠마오였습니다.
★첫째: 두 사람이 낙심한 채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13~14절>에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25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 하더라”고 하였고, <17절 하반절>에 “그들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소개해 주고 있는 대로 이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째 되는 날(21절), 엠마오에 있는 시골집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된 이 두 사람은 슬픈 모습으로 시골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날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사흘 째 되는 날인데, 왜 이날 이 두 사람이 슬픈 기색을 하고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마디로「불신앙」때문이었습니다. <본문 25절>에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하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분명히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째 되는 날 새벽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로부터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혀 들은 바 있었습니다. <22~23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신 것만 생각하고 슬퍼할 줄만 알았지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뻐할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자기 스승의 비참한 죽음에 대한 슬픔과 번민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배반당하고 패배당한 느낌이 그들 가슴에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불신앙은 우리를 낙심시키고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할 그 시간에 기뻐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 믿음이 없어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가 되어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의 믿음 없는 것만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그들에게 믿음 주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과 같이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그들과 대화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사람은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불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같이 걸으면서도 그 분이 예수님인 줄 알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육안」이고, 하나는 「영안」입니다. 육체의 눈은 세상 만물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산과 강, 하늘과 바다, 나무와 새, 사람 등 만물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사람의 눈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한지요. 눈 속에 30만 개의 회로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억 만개의 시신경 세포가 있어서 크기와 거리와 색상과 광도를 자동 조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안으로는 신령한 세계는 바라볼 수 없습니다. 또 너무 큰 것도 볼 수 없고 너무 작은 것도 볼 수 없습니다. 지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고, 미생물도 현미경 없이는 볼 수가 없습니다. 신령한 세계는「영안」으로라야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내내 같이 길을 걸으면서 대화도 나누고 성경을 풀어 주시는 말씀을 듣고 하면서도 두 사람은 옆에 계신 분이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의 눈은 죄를 범하면 어두워집니다. <마 5:8>에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일단 흐려지고 어두워진 눈은 회개의 눈물과 믿음의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내야 합니다. 그래야「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들을 책망만 하시고 그냥 훌쩍 떠나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깨달을 때까지, 그들이 회개할 때까지,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때까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때 왜 “내가 바로 부활한 예수다!”라고 두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너희가 왜 슬퍼하느냐? 너희에게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나를 자세히 보라.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고 가슴의 창 자국을 만져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들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를 “내가 누구다!”라고 잘 말씀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라! 이 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거하면 그 때가서 고개를 끄덕끄덕 하셨습니다(요 1:29). 그리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하게 되면 그 때가서 그것을 인정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사람의 이성(理性)으로 이해가 가능한 일만 하시는 분이시라고 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람의 지식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은 이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주셨습니다.
<본문 27절>에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속에 길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 그의 인격이 들어 있고,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이 들어 있고,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그의 능력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어떻게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까? 그는 본래 투사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평범한 한 사람의 천주교 신부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신부였기 때문에 성경을 소유할 수 있었고, 성경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그에게 능력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역점 사업으로 펼친 것 가운데 하나가 성경 번역이었습니다. 루터는 성경 번역에 힘썼고, 칼빈은 성경의 정확한 해석에 힘썼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킬 당시에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어서도 안 되고, 성경을 읽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오직 신부들만 성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루터가 카톨릭을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 본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성경을 못 읽게 하는 것이 누구겠는가? 사단 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카톨릭의 방해와 박해에도 불구하고「성경 번역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경이 오늘 우리 손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을 통해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얻고 변화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가장 오래된 책이면서도 늘 새로운 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해줍니다. 성경에는 항상 진리의 샘이 솟아오릅니다. 성경은 보는 사람에게 각각 다른 감동과 교훈을 주며 변화를 일으킵니다. 성경은 예리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선과 악을 구별합니다. 의와 불의를 예리하게 구분합니다. 참과 거짓을 골라 잘라냅니다. 의사가 수술할 때 환자의 몸에 있는 암세포나 종양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고 그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불의한 것, 거짓된 것, 악한 것들을 도려내게 됩니다. 다른 책을 읽을 때는 내가 책을 읽지만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이 내 마음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내 마음을 읽음으로 해서 나를 바로 잡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 점점 멋쟁이로 변화를 받게 됩니다(행 17:11). 그런가 하면, 성경은「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출 15:26). 성경 말씀은 우리가 낙심될 때에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슬플 때 위로를 주고, 용기를 잃었을 때 용기를 심어줍니다. 우리가 상처를 입고 고통당할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성경 말씀, 곧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롬 1:16).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없고, 능치 못한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곧「성경이고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복음은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살아 있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 4:12). 그래서 복음이 죄악을 파괴하는 힘이 된 것입니다. 복음은 곧 새로움을 창조하는 힘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쳐부수는 힘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힘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 교육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만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은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롬 1:17).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효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해서 우리가「하나님의 의」를 덧입게 됩니다. 복음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복음은 참된 기쁨과 승리를 주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복음은 겸손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나의 친족과, 내 이웃과, 내 백성과, 인류를 살려내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들고 나가서, 율법의 시내산을 헐고, 유대인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숴 트리고, 예루살렘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부패한 혼혈족이 살던 사마리아를 변화시키고 로마 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성경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의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성경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과 저의 마음도 뜨거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언어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고, 육신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듣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숨기에 바빴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말씀에 사로잡히고 나니까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의원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여러분, 성도를 성도되게 하는 것, 성도를 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말씀」입니다.「말씀」에 사로잡힐 때, 우리가 본연의 모습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 되어지기 바랍니다!
★셋째: 두 사람은 그 시로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문 33-34절>에,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고 하였습니다. 엠마오에 도착한 두 제자가 길에서 자기들에게 성경을 풀어주면서 함께 거기까지 동행해 준 그 분을 집으로 모셔다가 음식을 대접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식사 기도를 누가 했느냐 하면, 같이 오신 그 분이,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서 두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 두 사람의 눈이 밝아지면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곧 그곳을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찬식 때 나누는 떡과 포도즙은 각각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신 것은,「영적」으로 제자들이「신령한 몸」에「접촉」한 것이 되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의 눈이 밝아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풀어주실 때에는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감동」을 받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예수님이 주신 떡을 받아먹을 때에는 영의 눈이 밝아지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슬픔과 수심으로 가득 차 있던 두 제자의 얼굴이 드디어 확신과 감격과 환희가 넘치는 얼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그 시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알라갔던 것입니다. 하루 종일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 날은 그냥 거기서 자고 다음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체하지 않고 즉시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엠마오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를 하나 들어드리겠습니다. 저한테 밤중에 걸려오는 전화는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누가 돌아가시게 됐을 때라든지, 아니면 갑자기 사고가 생기든지 했을 때 전화를 걸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너무 괴로워서 전화를 걸어오는 수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괴로우면 밤중에 전화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닌 때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경우가 다 아닌데도 밤중에 전화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화를 받아보니까「걱정스런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카랑카랑하고 명랑한 음성이었습니다. 아주「기쁨이 가득한 그런 음성」이었습니다. 그는 대뜸 따발총을 쏘듯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됐어요! 저희 애가 됐어요! 우리 애가 붙었다니까요.”라고 숨 쉴 새도 없이 따발총을 쏴대는 그런 전화를 한밤중에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 다음에 만나서 밤에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해요. 저는 그 분을 이해합니다. 얼마나 기분이 좋으면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 가지고 “붙었다!”고 소리소리 지르겠습니까? 그 분 입장에서는 도저히 날 샐 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기쁜 소식을 빨리 알리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그 분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애기 생겼어요.”라고 좋아서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남편과 시부모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애기가 생겼다고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어떤 사람은 자기 딸이 시험에 합격했는데, 너무 좋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아는 사람한테 다 전화를 했다고 그럽니다. 그래도 직성이 풀리지 않더래요. 그래서 그 때부터는 자기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보고 얘기를 했다고 그럽니다. 강아지 이름이 메리인데, “메리야- 우리 딸 합격했다! 메리야· 우리 딸 합격했다!”하면서 점심때부터 저녁때까지 그 소리만 했다고 그럽니다. 그랬더니 속이 좀 후련하더래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사람은 너무 좋은 일, 너무 기쁜 일을 만나도 알리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거예요. 오늘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그랬습니다. 너무 기뻐서 그 자리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빨리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이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교회도 보면, 항상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실망해서 떠나고, 시험에 들어서 떠나고, 고난이 두려워서 떠납니다. 나름대로 타당하고 정당한 이유들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이유로 떠나든 주님께서 한결 같이 그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모든 인생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비로소 슬픔, 걱정, 근심, 그리고 미래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가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방황하던 믿음도, 슬퍼하던 그들의 마음도 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순간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는 이제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가서「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부활의 증인」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