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누가복음 14:16-24 ▣ 제목: 핑계가 많은 사람들
오늘 우리는 <눅 14:16-24>까지의 본문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핑계가 많은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에,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각각 말하기를 나는 밭을 사서, 나는 소를 사서, 나는 장가를 들어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둘째: 초청을 받고 -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앞세우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셋째: 오늘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내리신 명 령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을 초청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16절의 큰 잔치를 배설한「어떤 사람」은「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병행 구절인 마 22:22절에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마 22:22절>에서 말씀의 임금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 본문 17절의 보냄을 받은 종들은 선지자 또는 복음 전도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잔치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교회를 가리킵니다.
★첫째: 오늘 본문에,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각각 말하기 를 나는 밭을 사서, 나는 소를 사서, 나는 장가를 들어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16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보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잔치를 배설한 곳은 어디를 가리키는가 하면 교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불교는 초상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유교는 제삿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잔칫집으로 비우되고 있습니다. <눅 15:4-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것은 잔치를 벌일만한 경사라고 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천국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천군천사들이 잔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잔칫집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도 잔칫집과 같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엄숙한 모양을 내야하고, 즐거움을 버려야 하고, 울어야 하고, 금욕 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입니다. 기독교는 빛과 즐거움과 구원으로 인도하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롬 14:17>에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신다(롬 15:13)고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그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구원의 즐거움과 하늘의 평화와 주님의 위로와 주님과 동행하는 즐거움과 주님의 사랑을 맛보며 사는 곳이 바로 교회요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곧 축전(祝典)입니다. 구원의 축전이요, 부활의 축전이요, 승리의 축전이요, 감사의 축전입니다. 이렇게 가슴 벅찬 축전을 즐길 수 있는 곳이 교회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 안에 이런 잔치를 준비해 놓고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하십니다. 잔치를 준비한 사람은, 손님이 많이 오기를 바라기 마련입니다. 잔칫집에 손님이 없으면 그 잔치는 끝난 잔치입니다. 음식도 좋아야 되고, 분위기도 좋아야 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손님입니다. 음식을 준비한 잔칫집 주인은 이사람도 부르고 싶고 저사람도 부르고 싶게 마련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딤전 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닌데 이리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천국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대면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밭에 가봐야 하고, 소를 길들여야 하고, 장가들었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면서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한결같이 자기 입장만 내세웠습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편안히 밭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 소를 길들일 수 있게 되었고, 어떻게 해서 장가들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안중에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 잘나서 된 것이라고 보았고, 자기 유익만 생각했고, 자기 편리를 위하여 초청에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이 말씀을 지금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에게 한 번 적용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잔칫집의 즐거움을 뺏겨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잔칫집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 예배 시간에 잘 나와야 합니다. 나와서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도 주일 오후 예배 시간 같은 때에는 아예 교회에 나올 생각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 즐거움과 육신의 안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TV에 시간을 투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잊어버릴만한 때가 또 되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각성제로 삼으실 수 있도록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한 <시편 23편>을 어떤 이가 각색해 놓은 것을 다시 한 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TV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소파에 편히 눕게 하시며 나를 생명의 믿음에서 떠나게 하시는도다. 나를 항상 TV 앞에 앉게 하시고 나의 모든 여가를 요구하시니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나이다. 내가 책임과 의무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음은 TV가 항상 나와 함께 하심이라. TV의 케이블과 리모콘이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가 나의 세속성 앞에서 상업 광고를 하시고 내 머리에 인본주의와 소비주의의 기름을 바르셨으니 나의 욕심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나태와 무지가 정년 나를 따르리니 내가 TV가 있는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왜 이런 글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러분 때문은 아닙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 때문입니까?
★둘째: 초청을 받고 -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앞세우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자기 입장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잔치집 주인이 그만 몹시 화가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하면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는 말씀입니다(눅 12:20).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이 부자가 곳간에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많은 재물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곳간을 새로 하나 더 짓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영혼에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편안히 지내면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눅 12:18-19).”고 말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자의 말이 시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이 재물만 많이 있다면 인간은 행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사의 특성은 현대에 들어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마음이 불안해서 보험도 들고, 예금도 하고, 부동산도 사 놓고 하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보험도 들고, 돈도 좀 모아 놓고 하면 그 때부터는 안심해도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불시에 찾아오는 재앙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최고급 승용차라고 할지라도 덤프트럭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이미 깨어진 가정, 잃어버린 건강은 회복할 수 없습니다. 재물이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헛된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습니다. 재물은 나의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덮인 비늘을 벗겨 내듯이 그런 환산은 아예 벗어버려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 차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물질만으로도 족한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감사할 줄 알아야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하나님만 저와 여러분의 완전한 보장으로 삼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어리서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많은 사람이「자신의 생명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있더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내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도로 찾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인간의 생명은 물론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하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연장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만큼만 살아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재물 또한 영원히 소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달라고 하시면 그 때는 재물도 놓고 가야 합니다. 재물도 놓고 가고, 명성, 지위, 재능, 가족 할 것 없이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안개와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약 4:14>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였습니다.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하였습니다. 안개는 햇볕이 비쳐오든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게 되면 금새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고 하였습니다.「어거스틴」은 인생을 「죽어가는 삶」이라고 해야 될지 「살아가는 죽음」이라고 해야 될지 말하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쉐익스피어」는 사람의 일생은 한낱 어른거린느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내가 잠을 자고 있을지라도 쉬지 않고 가는 것이 시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죽음을 재촉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엡 5:16>에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①기회를 속량하라 ②기회를 값을 주고 사라 ③ 기회를 내 것을 만들라”의 뜻입니다. 사람이 시간을 보냈는데 허라방탕하며 보냈다고 하십시다. 그것은 버려진 시간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고민 가운데서 보낸 시간 역시 버려진 시간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고민 가운데서 보낸 시간 역시 버려진 시간입니다. 누구를 미워하면서, 증오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십시다. 그것은 빼앗긴 시간입니다. 그것은 내 시간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빼앗겨 버린 시간입니다. 여러분! 감사드린 시간, 헌신한 시간, 기뻐한 시간, 자유를 누린 시간 - 그 시간만 내 시간입니다.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하고, 헌신하고 헌신하면서 기뻐하고 그리고 감사하는, 그 시간만 바로「내가 산 시간」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이름하여「목숨」이라고 부릅니다. 목구멍으로 숨 쉬는 것을「목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생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구멍에서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우리가 이 땅세서 숨 쉬고 있을 수 있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 기간이라는 것이 아주 보잘 것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와 여러분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 5: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또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셋째: 오늘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내리신 명령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되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말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너희는 나가서」라고 한 이 말씀입니다(23절, 마28:19). 나보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관 둬! 하지 말아! 그 힘든 걸 왜 하려고 그래?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별 소리를 다 들어야 되는데 그런 걸 왜 혀하려고 그래? 그렇다고 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아서라! 관 둬라!”라고 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래 놓고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라고 거침없이 찬송을 부르시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하지 말고 몸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먼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으면 가까운데 가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하나님의 집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의 소식은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 전해져야 할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1945년 8월 15일에 전해진, 세계 2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는 소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해방의 기쁜 소식이었지만 일본 사람들에게는 패망의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모든 민족 모든 족속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언청이 입을 수술 받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수술이 잘 되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화장을 안 해도 거의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여자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예쁘다는 소리 듣기를 바라고, 거울보기를 좋아하게 마련인데 이 사람이 얼마나 좋았겠습니다. 여인이 어느 날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인이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언청이 입 수술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한 여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 앞으로 다가 갔습니다. 물론 그가 앉았던 자리는 벌써 다른 사람이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좀 보세요! 저도 수술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깨끗하게 잘 됐어요. 수술 딱 한번만 더 하세요. 돈도 얼마 안 들어요. 제가 잘 하는 데를 가르쳐 드릴게요.”하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을 때, 언청이 입을 가진 사람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 받은 사람, 은혜를 맛 본 사람이 복음을 전하게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잠잠하고 있어서든 안 됩니다. 모두가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행 5:24>에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고전 12:3), 내가 전도할 마음을 가지고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전도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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