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풍랑을 넘어라

제 목   인생의 풍랑을 넘어라
 
▣ 본문: 마가복음 4:35-41
▣ 제목: 인생의 풍랑을 넘어라

오늘 우리는 <막 4:35-41>의 본문 말슴을 같이 보았습니다. 이 시간 본문 말씀에 의지해서 “인생의 풍랑을 넘어라!”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증거해 드리겠습니다.

★ 첫째: 이 항해는 주님께서 떠나자고 해서 시작된 항해였습니다.
★ 둘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마치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 셋째: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릴 평안이 어떤 평안인 가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은 인생의 삶을 “항해하는 인생”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풍랑을 만난 사실이 증거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 풍랑이 예수를 믿는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데 있습니다.





★ 첫째: 이 항해는 주님께서 떠나자고 해서 시작된 항해였습니다.

<35절>에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갈릴리 해변 마을인 가버나움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바다」라고 부르는 이 곳은『디베랴』라고도 하고,『갈릴리』라고도 하고 『게네사렛』이라고도 부르는 이 곳은, 넓이가 무려 22Km에 달하는 큰 호수입니다. 남북의 길이는 170Km나 됩니다. 이곳은 수면이 지중해보다 200m나 더 낮습니다. 요단 계곡에 위치해 있는 이 갈릴리 바다는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잦은 기압 변동으로 예기치 않는 풍랑이 자주 일어나는 곳입니다.
낮 동안에 뜨거워졌던 열기와, 밤이 되면서 저 북쪽 헤르몬 산에서 내려온 찬 공기와, 서쪽 지중해에서 불어온 훈훈한 바람이 서로 맞닥뜨리면서 이 곳은 삽시간에 커다란 바람통이 되게 되고, 압축된 바람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럽게 맹렬한 폭풍이 불어 닥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다에 거센 물결이 자주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저물 때에 떠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같이 배를 타고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 항해는 예수님께서 가자고 해서 시작된 항해였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저물 때에 떠나자고 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배가 밤에 출항했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론 요즘 같으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그 옛날에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 때는 기선도 없었고, 등대도 없었고, 항해 기술도 발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때는 낮이 아니면 배가 나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저물 때에 배를 띄워 바다 저편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대목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밤에 배로 떠나자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려는데 있었습니다. 시련을 통한 훈련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37절>에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마 14:24>에 보면, “제자들이 밤에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곤충학자가 애벌레에서 나비가 나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안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칼을 가지고 출구를 조금 열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나비가 쉽게 나왔습니다. 곤충학자는 자기가 그렇게 해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나온 나비들이 날지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자고 하셔서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배에 같이 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다 한 가운데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풍랑이 찾아올 때가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딸에 거할 때 그에게 기근이 찾아왔었습니다. 그것은 베들레헴의 엘리멜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성도의 시련은 하나님의 진노부터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풍랑을 만나게 하신 것은 앞으로 어떤 어려움에 부딪치더라도 그 어려움을 믿음으로 이기게 하려는데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시는 고난은 없습니다. 성도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훈련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 둘째: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마치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습니다.

성경은 인생의 삶을 “바다를 항해하는 인생”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행 27:1-4).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일엽편주와 같은 배를 타고 인새의 바다를 노 저어 가고 있는 항해하는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인생의 바다는 마치 갈릴리 바다 같아서 평화스럽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이 몰아닥치게 됩니다. 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데없는 폭풍이 불어 닥쳐옴으로 해서 우리를 당황케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37)에 “바다에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 등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무서운 폭풍 앞에서는 그들의 경험이나 기술이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내 힘으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길이 없는 그런 어려운 때를 만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광풍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불경기, 불행의 파도가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 애매한 고난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의 풍랑, 질병의 풍랑, 사고의 풍랑, 가정 파탄의 풍랑 등이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은 말할 수 없는 어려운데 주님은 주무시고만 계시고 내 사정은 아예 거들떠보시지도 않는 같은 그런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나서 사업도 잘되고, 사람도 좋은데 좋은 사람들만 만나게 된다고 자랑하는데, 나는 어째서 사업도 잘 안되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만 마나게 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많이는 못하지만 십일조도 드리고 감사헌금도 드리고 건축 헌금도 드리고 나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 예배에 안 빠지고 기도회때 나와서 기도하고 봉사도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데 어째서 나에게는 이처럼 어려운 일만 많이 찾아오는 것입니까? 어째서 응답이 없으십니까? 나의 죽게 된 것을 왜 돌아보지 않으시는 것이십니까? 하고 하연하고 싶은 그런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다고 했습니다. \"지금 파도가 산더미처럼 밀려와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어째서 주님은 주무시고만 계십니까? 왜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까?(38)\"하고 소리를 질러댔다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We are going to die. don\"t you care?\" 그랬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게 생겼는데 왜 안 도와 주십니까? 그랬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때가 제일 어려운 때입니다. 사실 시험도 시험이지만 내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꿈쩍도 않으실 때 그때가 정말 힘든때 입니다. 그때 시험들기 쉽습니다. 그때 믿음에 손해 보기 쉽습니다.
그런데요, 사실은 그 이전에 제자들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걸 알아야 됩니다. 어디가 문제였는가? 하면, “지금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38)고한 이 대목에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어려움 당하는 것을 모르고 계셨을 것 같습니까? 다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 오늘 성경에, “이때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배 고물이면 배 뒤쪽입니다. 배 뒤쪽 약간 올라간곳입니다. 우리가 오늘날의 배들도 보게되면 선장이 배를 지휘 하는데가 배의 약간 뒤쪽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가 다른데보다 더 높습니다.
따라서 오늘 성경에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주무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풍랑을 예견하고 계셨다. 풍랑에 대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지회 하셔야 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에게 깊은 신뢰를 쏟아 놓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방정을 떨었습니다. 이 부정적인 언어가 문제입니다. 죽겠다는 부정적인 언어가 문제입니다. 죽겠다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통용어입니다. 속상해 죽겠다. 지겨워 죽겠다. 매워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매사에 죽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 때문에 죽을 상황이 아닌데도 자꾸만 죽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부정적인 말을 하면 생각이 부정적이 되고 일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간다는데 있습니다. 죽겠다는 말은 믿음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보여드릴려고 그제 금요일(24)에 나온 일간신문을 오려가지고 왔습니다. 아마 보신 분들 많을 겁니다. 여기 보면 암에 걸렸다고 다 죽는 것 아니다 말기 암환자 절반이 살아났는데 이 사람들은 다 \"나는 꼭 낫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이 병을 낫게 하는 으뜸비결이다!\"고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위기의식을 느껴야 할 때 감당할수 없는 큰 폭풍을 만났을때 해야될 일이 무엇입니까?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주님께 전폭적인 신뢰를 쏟아 놓는 일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시 23:5).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 지라도“(시46:2) 성도의 믿음은 흔들려서는 않됩니다.






★셋째: 우리는 오늘 본무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릴 평안이 어떤 평안이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풍파 중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의 평화로우심을 보게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오늘 본문에서 풍파중에도 주무실수 있는 예수님의 여유와 평화로우심을 배울수 있어야 합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은 저렇게 당황하고 있는데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있는데 예수님은 태연히 주무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바로 이런 평안입니다.
어느날 화가 세 사람이 마주 않아서 어떻게 하면 참 평안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각각 붓으로 자기 나름대로의 평안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한 사람은 이제 막 전쟁이 끝나게 되어 전쟁터에 나갔던 병사가 벼가 누렇게 익은 들녘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또 한 사람은 은빛을 발하며 잔잔하게 뻗어있는 맑은 호수를 그렸습니다. 그러자 그것을 보고있던 다른사람이 전혀 다른 엉뚱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그림은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절벽아래로 떨어지는 폭포 옆에 자작나무가 서있고 그 자작나무에 둥우리를 짓고 로빈새 한 마리가 물보라에 흠뻑 젖은채 조금도 동요없이 앉아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그림중에 어떤 글미이 그리스도인의 평안을 가장 잘 나타낵 그림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물론 세 번째 그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안은 잠시총성이 멎는 평안도 잔잔한 호수같은 그런 평안도 아닙니다. 그것은 잠시 숨을 고르는 것 뿐이고 바람이 없기 때문에 조용할 뿐입니다. 잔잔한 호수도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비가 쏟아지면 흙탕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것을 가리켜서 평안 이라고 하시 않습니다.성경은 폭포와 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는 분위기 속에서도 동요없이 평안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평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 12:1~7>에 보면 박해 받던 초대교회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왕이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이고 나서, 다시 베드로 사도를 죽이기 위해서 그를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착고를 채워 감옥에 가둔 다음에 군사 넷씩 네패에 붙여 철통같이 지키게 했습니다. 날이 밝는대로 베드로 사도를 처단 하겠다면 헤롯이 벼르고 있었습니다(행 12:6). 그랬는데 그날밤 베드로 사도가 어떻게 했습니까?
군사들 틈에서 곤한 잠을 잤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바로 이런 평안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원수가 둘러싼 감옥에서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니 안심이 되었고 죽음을 눈앞에 놓고서도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옥에 갇혀있던 그 날 밤 교회성도들은 모여서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 그날 밤으로 베드로 사도를 건져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은 이때만해도 제자로 부름 받은지 얼마 않되었을 때 였기 때문에 아직은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 없는 것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아야 했습니다.
<40절>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그리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까? 어떤「믿음」입니까? 환경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풍랑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골리앗처럼 크고, 나는 언제나 다윗처럼 어립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골리앗을 무서워 말라고 하십니다. 골리앗과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를 믿고 골리앗과 싸워야 합니까? 하나님을 믿고 싸워야 합니다. 맞서 싸우면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시므로 해서 내가 골리앗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본문 39절>에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꾸짖다!”에 사용된 성경 원어는 “에페디메센”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실 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사물에 대해서는 이 단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막 1:25, 9:25). 여기에 대해서 한 성경학자는 “바람의 배후에 사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음 장인 <막 5장>에 군대 귀신이 등장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만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셔서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곧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어째서 바람과 바다가 순종했을까요? 그것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끝을 맺겠습니다◈

주님은 만물의 주인이시자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사나운 개도 주인에게 순종하듯 사나운 폭풍도 주님 앞에서는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난 그 어떤 역경이나 어려움도 주님께서 개입하시면 해결 받지 못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곤경은 우리 주님의 기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튼튼한 배도 아니요 풍부한 항해 경험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굳건한 믿음입니다. 폭풍 중에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들 뿐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고 언제나 우리에게 이김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