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목회 탈진을 극복합시다.
가락동교회 : 김신국목사
제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오늘의 얘기는 목회의 탈질 그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이며 나는 그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고민하는 것 입니다.
이는 필자의 솔직한 고백으로써 한껏 저의 부끄러움을 내보여드리는 것이지만, 동시대를 사는 한 목회자의 실재(Reality)를 말함으로써 피할 수도 감출 수도 없는 우리의 목회적 한 신드롬(Syndrome)을 파악 내지는 해결해야겠다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필자는 선지학교 문을 나선 후 목사안수를 받고 일터에 임하지 꼬 15년 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동안에 선배들이 종종 말씀하시던 목회력 고갈 (Ministry Exhaustion;Ministry Burn-out)의 문제가 바로 그 선배들이나 특정인 곧 어떤 하나의 문제에 골똘한 분들에게 나타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1084년경 Sanford의 <Ministy Burn-out> (Arthur J- ames LTD,London)의 책 제목을 볼 때만 해도 이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 정면 대결해야 할 목회력 탈진의 증상
그런데 근자에 와서 Raymond Bakke의 <TheUrban Christian> 의 책 속에서 Minstry Burn-out의 부분(PP.121 ff)을 숙독한 뒤부터 그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의 문제요 시급히 정리되어야 할 급선무로 부상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정면도전을 받아서라도 확실히 해결되어야 할 일로 직감되었다는 뜻 입니다.
그간의 수 많은 목회적 시행착오에서 오는 부끄러움과 허물은 차치하더라도 왠지 모두 그렇고 그런 것 같은 무감각 내지는 의욕 없음 등이었는데 그런 것들이 대체로 늘상 신경쓰이게 하는 당회나 비 활성화된 제직회나 정체된 각 기관의 사역에서 오는 표면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인즉 맥빠진 느낌과 자꾸 지치는 듯한 무력감 또는 실어증으로 나타나는 저의 모습은 시간이 갈수록 깊은 늪이 되었고 산너머 산같이 산적되어가는 두려움으로 변신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저의 \'목회의 탈진\' 문제는 막연히 얼버무릴 것이 아니라 또한 회피하거나 변명될 것이 아니라 확실히 정면대결의 장으로 나아가 꼭 이 과제를 극복해야 하겠다는 것이 이 고백으로써 종내 추구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 무엇이 목회탈진의위기를 가져오는가
무엇보다 서둘러 말씀드리는 것은 목회 탈진은 저같은 한 목회자가 마땅히 전념해야 할 \'말씀과 기도\'의 연습분량이 부족된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같은 목회의 대전제 앞에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탈진의 현존을 얘기하는 것은 적어도 다음부터 설명 드리는 네 가지 이유일 것입니다.
네가지 이유란 건강관리와 경제력확보, 과다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시간소비와 영적 분별력 약화 등입니다. 이상을 다시 설명 드립니다.
* 목회자의 건강관리
첫째로 저는 육적 건강관리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점입니다. 피곤이 누적되어 간이 녹고 있다는 강박감 속에 간기능 치료제나 고혈압에 좋다는 \'휘참탕\' 허리춤에 차고 다니는 만보기 얘기가 우리 40-50대 동기 목사들이 대화의 주종이 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모두가 은근히 건강 컴플렉스에 걸려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나아가 성대 과사용으로 인하여 목수술을 해야 할만큼 어려운 지경에 있거나 휴유증으로 요양중에 있기도 하고 운동부족으로 인한 비만증으로 인하여 종내 찾아오는 문화병을 하나씩 둘씩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원보다 목욕탕, 헬스센터에서 자거나 쉬고 싶어하는 동병상린 의처지 앞에서 서로서로 말하기를 \'이런 모습들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회의 실제는 아닐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왠지 우리들의 목회가 익어가고 있다는 느낌보다 아직 미처 못다해 드린 목회적 불충의 열매를 보는 듯 개운치가 않습니다.
* 목회자 가정의 경제적 압박
두 번째로는 목회자 가정의 경제적 압박이 목회의 탈진으로 가는 길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배님들이 말하기를 \'목사가정은 많아도 남는 것이 없고 적어도 모자람이 없는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항상 해방되지 못한 식민지 종처럼 쪼들리고 비겁해지는 목사가정의 경제문제, 이는 분명 목회자 부부가 당하는 두 번째 탈진요소인 것입니다.
그래서 1년치 은행자동대출에서부터 여러 은행카드를 사용해서 용통해가는 작전은 매달마다 우울한 삶의 모퉁이 모습니다. 따라서 규모 있게 살고자 하는 노력에 앞서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목사의 청빈은 탈진을 야기시키며 연립주택 방 두 칸이라도 내집이 필요하다고 동분서주하는 친구목사의 뒷모습에서 왠지 함께 힘이 빠져 나가는 허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런 현상은 생활비보다 목사의 재교육경비와 자녀교육비 그리고 수범적인 교회 헌금생활 때문임도 감안해야 될 부분 입니다.
과연 목회가 삶의 절대방편만은 아닐 진대, 왜 이 같은 금전문제에 그 토톡 연연해야 하고 그로인한 중압감은 훌훌 떨쳐 버릴 수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감사의 간증과 물질이 없어 구차해도 온 가족이 모여 드리는 가족 예배시에 맛보는 행복감은 종종 있지만, 목회자의 경제적 쪼들림은 오늘의 필자의 실존임에 틀림없습니다.
* 과다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시간낭비
다음으로 많은 모임과 사람과의 과다한 만남 때문에 결국 겪게 되는 탈진입니다.
본시 목회의 제1과제가 말씀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여, 듣고 믿는 이로 하여금 구원의 복락을 얻게 함에 있다고 한다면, 많은 모임에의 참석, 많은 사람과의 교제는 전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구령의 차원보다 인간관계의 형평에 쏟는 여력이 전화로, 교제로 한없이 누수되는 것은 분명 목회탈진의 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친구를 줄이 자는 얘기가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Meeting)이 주님과의 만남 (En- counter by Confrontation)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일찍 침소에 누워 피곤을 회복하고 일찍이 성소에 나가 새벽을 깨우며 그 후 서재에서 목회구상에 및 독서량을 늘리며 산책의 시간도 가져야 할진대, 무슨 그리 만나야 할 사람이 많은지, 또 그리 해야 할 전화가 많은지, 분명 목회자는 과다한 시간악용으로 지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 정보사회에 있어 목회자의 재충전
끝으로 저는 다원화된 첨단사회에서 많은 정보를 갖추어야 하는 지도자로써 서야 할 기대감이 앞섭니다. 그러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의 반복이 결국 목회탈진을 낳고 있습니다. 그래서 컴퓨터(pc)를 배워보기도 하고 최소한 몇몇 주간 잡지 등을 읽고 있지만 미친 듯 달려가는 종말론적인 지식의 더함은 자꾸만 거기에 달하지 못한 미련으로 누적되곤 합니다. 나아가 각종 세미나 모임에도 가끔씩 나가 관심을 기울여보지만, 그래보아도 되려 재충전되지 못하기 일쑤이고 늘 그곳에 남아 있는 앙금은 더 갈급한 목회력 회복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 할 수도 없고 그냥 그런데로 한세상 살 수도 없고, 엉거주춤거리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일수도 없고 아닌게 아니라 미상불저의 목회탈진증상은 실로 큰 문제입니다. 이리하여 저는 근자에 저의 병적증상에 대해 두어 가지 처방을 내리고 있습니다.
* 목회탈진을 극복키 위한 처방
먼저 목회의 소생(Rencwal)은 \'말씀과 기도\"의 시간투자에 그 관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언뜻 식상한 얘기를 반복하여 듣는 것 같지만 사실 상 부끄러워도 목회의 기본적 내신을 말하자는 것입니다.
본문연구, 본문 필사, 본문낭독, 본문암송 등 보다 담백하면서도 단순한 작업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실을 만들고 거기에서 금식기도도 하고 거기에서 묵상도 하고 면벽기도도 하며 허물어졌던 자기를 응시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의 소생은 선교여행을 훌쩍 떠남에 있다는 것과 너무 멀면 혼자 가도 동해 바닷가에 한번씩 다녀오는 것과 광릉 내 수목원 숲속에서 심호흡이라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안식년까지 못 찾아 쉬어도 한 주간 하루는 목사가 목사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시간을 정하고 자신을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말씀을 보고 하늘을 응시하고 다시 주어진 목회현장에 서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상 목회의 탈진은 서글픈 일입니다. 더욱이 십대초년의 소년소녀가 엘리스 신드롬(Alice in Wonderland Syndrome:정신적이나 육체적으로 생명 존재감을 상실한 상태) 속에서 무동기 무작위의 자살상태를 지켜만 봐야하고, 작은 소녀가 한시대의 범죄자에게 생매장 당해야 하는 사회적아 노미현상 속에서 이 시대의 목회자라고 자처하는 나는 무엇을 가슴이 답답해 옵니다.
그 무엇보다 존경받는 선배목회자가 자꾸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저의 쫓김을 더하는 요인일 것입니다. 이같은 저의 목회력의 아노미 현상이 속히 청산되지 않는 한 종말을 부진할 것이 뻔할 것입니다.
이제는 저의 부끄러운 고백 그러나 이렇듯 넋두리로 보셔도 할 수 없지만 이 같은 참회적 자기고백을 아직도 제가 빌점들이 나타나고자 하는 안간힘이 남았기에 탈진에서의 탈출(Exodus From Exhaustion)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동시대적인 2중과제(The Cameostic Subject)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저의 한 가지 문제가 결국 말씀과 기도에 진력 못함에 있었음을 자인하는 시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래도 행복감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새 출발점 앞에 서있는 기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분명 하나의 가능성에로의 한줄기 빛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