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것을 향하여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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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1157)  빌3:12-14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운동경기에다 종종 비유했습니다.
고전9:24-27, 딤후4:7, 행20:24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달리기에 비유했습니다. 달리기 중에서도 마라톤경기에다 비유했습니다.

 여러분,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 토끼가 이긴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은 거북이가 이기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빨리 잘 달린다는 것만으로 우승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달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막연히 공부하는 것과,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 아무런 의식 없이 직장을 다니는 것과,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다니는것과는 비교할 바 못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자신이 세운 목표만큼 된다’고 했습니다.

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러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어떤 목표를 세우고 신앙생활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다름질이 향방 없는 것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고전9:26).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경주에서 실격당하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동경기장에서 보면 잘 달리는 선수들 중에 실격판정을 받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1.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속 뗌습?들어낸 말입니다.    
바울은 강권적 역사로 그처럼 박해했던 나사렛 예수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온 생이었습니다.
바울처럼 극적인 회개와 변화된 삶을 살은 사람도 드물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제일로 울어러 보는 신분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히브리 종교에 완벽한 자요, 정통적인 바리새인이며,
당시 유행한 헬라철학에 능통했던 자였습니다.
그리고 로마법으로 보호받는 로마시민권 자이었습니다.
이만한 신분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 입장에서도 엘리트중에 엘리트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유대인의 종교적 정통으로 보면 마땅히 나사렛 예수는 이단이요, 그의 추종자들은 다 검거의 대상일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스데반의 처형때는 마땅히 처 죽일자를 죽인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 일입니까?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던 그가 이제는 십자가의 증인으로 변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모든 것을 걸게 하였고, 세상적인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에게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던 유대인의 전통과, 바리새인의 율법과,
헬라의 학문과, 로마의 시민권까지 포기하면서 예수를 좇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고 했습니다.(빌3:10-11)
‘예수의 부활과 그 능력에 참여하기 위하여 어찌하든지 그것을 위해 달려온 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젊음도, 가정도, 세상적 성공도 다 포기했습니다.
오로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능력에 참여하려고 달려온 삶이었습니다. 이제 그렇게 살아온 자신의 걸어온 삶을 되돌아 보면서 그는 아직도 자신이 미완성임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12절입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고 했습니다.
계속해 앞에있는 것을 위하여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여기서 우리가 크게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 신앙생활은 경주장의 선수들처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장거리 선수들처럼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달려야 하되,
<법대로> 달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달릴때 실격하지 않고 메달을 걸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의 고백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2. 저도 이제 지난 세월의 삶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내 어찌 사도 바울과 비교할 수 있으리요 마는,
사도 바울과 몇가지 유사점이 있다고 봅니다.
그 첫째가 나도 내 의지대로 목회의 길을 들어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길에서 교통사고로 주님께 항복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37년전 미국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도 망각하고 어찌하던지 목회의 길 보다는 다른 길로 가려고 했던 나였습니다.
그것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교회의 부정적인 면을 보아왔기에 그러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나같이 도망치려던 나를 하나님은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 37년전 부활절 날(1969년) 미국의 81번 하이웨이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여 항복하게 되었고, 그후 오늘까지 그의 손에 붙잡혀 이 자리까지 이르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후 이왕 목회를 하려면 나름대로 바르게 해야겠다는 스스로의 다짐하에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회의 정도(正道)를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딤후2:15절 말씀을 책상 옆에 걸어 놓고 매일 그것을 푯대로 삼아 왔습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까지 나의 목회를 이끌어준 길잡이의 말씀이었습니다.
먼저 말씀의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억지로 풀지 안했고, 사사로이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왔고,
누구에게나 편벽되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는 말대로,
가정보다 교회를 먼저 생각하면서 노력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가족들에게 인간적으로 미안할 따름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권을 다 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볼때 나도 그리스도 복음 때문에 포기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이후에 판결해 주실것이겠지만,
결코 이것이 자랑으로 들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3. 사도 바울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내린 결론이 이러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3-14)
그는 이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행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겠다고 했습니다.
 신앙생활에서 과거에 대한 감사는 필요하지만,
거기에 머문다는 것은 전진을 막는 것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급하여 홍해를 건넜지만,
광야길에서 조금만 어려우면 과거를 기억해 내며 애급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사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 신앙생활에서 뒤에 있는 일들은 잊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 애급의 일들만 그리워한다면 그에게는 신앙의 전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의 직분을 맡고서도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뒤에 있는 것이란 어쩌면 복음을 위해 받은 모든 능욕과 고난과 역경과 괴로움일 것입니다.
지금 이 빌립보서를 쓸때도 좋은 환경에서 쓰는 것이 아니고 옥중에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교회일을 하다가 누구로부터 상처받은 일을 늘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반면 교회를 위해 무엇을 한 것을 늘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뒤에는 눈을 내지 않았는가 하면,
뒤에 것은 돌아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 성경의 인물 중에 뒤를 돌아보다가 낙오한 사람들 많습니다.
롯의 아내가 그러했고, 삼손이 그러헸고, 사울왕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으로 교회의 일원이 되었지만 물질에 눈이 어두워 뒤를 돌아보다가 성령을 속인죄로 죽어 버렸습니다.
☞ 그런가 하면 끝까지 앞만 바라보면서 승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에서도 상주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꿈을 키워 나아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두느냐에 달렸습니다.
마지막 골인 점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식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럴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감옥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절망과 좌절과 후회로움이 있을 것 같은 환경이었지만,
결코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 사람에게서 힘든 일은 자신이 쌓아놓은 것을 잊는 일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경력을 자랑하고 내 세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뒤에 있는 것이 아니고 앞에 있는것입니다.
지난 세월이 아무리 화려했어도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적절치 못합니다.
왜냐하면 더 크고 보람된 상을 바라보면서 계속 달려야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자신이 걸어온 뒤안길은 잊어버려야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자랑, 능력, 성취의 모든 것을 잊어 버려야 하겠습니다.
가끔 사람들에게 걸리기 쉬운병이 <회고병>(回顧病)과 <섭섭병>이라고 합니다. 그런 병에 걸리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어떤분들은 자신의 헌금한 내용까지 기억합니다.  
☞ 그리고 누구를 도와주고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 그런 사람에게는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이 얼마나 더 귀한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 저도 이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이 강단을 후임자에게 인계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함께 전진해 나아갑시다. 여러분, 영원토록 사랑합니다.♣  /끝.

☞ 지금껏 말씀의 샘을 통하여 은혜를 나누신 여러분:
   오늘로 저의 소임은 다 마쳤습니다.
   강단을 떠나면서 만감이 교차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종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