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가정
노아의 가정 (창10장)
오늘은 뜻깊은 어버이 주일입니다.그동안 자녀를 낳아 기르시면서 말없이 온갖 수고와 정성을 다하신 여러 부모님들께 우리 주님의 한 없으신 위로와 은총이 이 시간 함께 하시기를 먼저 기도드립니다. 흔히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노래하게 될때에 산 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식어나 형용사를 가지고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리라 믿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일일히 열거하자면 한이 없겠지만 그중 몇 가지를 꼽아 본다면,
1)우리를 낳아주신 은혜입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부모님을 내 생명의 뿌리요 원천입니다. 지금은 이전에 비해 훨신 나아지고 있습니다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산모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생사를 가름하고 엄청난 모험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볼때 부모님과 나 사이는 생명을 맞바꾸면서 존재하게된 생득적인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부모님의 은혜는 우리를 길러주신 은혜입니다. 곡식이나 과일이 열매를 맺게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소독을 하면서 마지막 열매를 맺을때까지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한 농부의 피와 땀의 결과적으로 나타난 것 뿐입니다. 아마도 자녀를 키워보신 분들은 자녀하나 키우기가 얼마나 힘이드는지를 잘 알것입니다. 만일 그 자녀가 정상인이 되지 못하고 한다면 그 키우고 마음의 고통과 수고가 몇배나 더 할것입니다. 신문 보도에 보면 천안에 있는 어떤 어머니는 오른쪽이 반신불구가 된 딸을 6년동안 없고 다녀 6년 개근상을 받게 했고, 서울 석관동에 사는 어떤 아버지는 생후 11개월만에 소아마비로 하반신을 못쓰는 딸을 매일 없고 다니면서 국민학교 수석에다가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수고와 희생이 아닐수 없습니다. 25세까지 한 자녀를 양육하는데 교육비와 결혼비를 합쳐서 약 5천만원이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은 도저히 돈으로는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3)그리고 세번째로, 부모님의 은혜는 우리를 가르쳐주신 은혜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있는 말한마디 행동한가지를 모두 부모님에게서 보고 배운것들입니다. 특히 옛날에는 교육제도자 지금과 같지 않았으므로 도덕이나 윤리, 문화, 가치관, 그리고 삶의 전반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을 부모님에게서 소상히 배웠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아이들이 부모님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TV나 집밖에서 듣고 배우는 일이 더욱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전통이라는 개념이 점점 더 희박해지고 부모님을 존경하고 효도하는 마음이 더욱 더 멀어져 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전통이나 옛 교육방식이 다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좋은 전통은 항상 계승시켜 나가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리라 믿습니다. 특히 윤리나 도덕적인 교육은 부모님에게서 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실로 우리는 지금 부모는 있으나 효도와 존경을 찾아보기 힘들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신문지상이나 메스컴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너무나 깜짝 놀랄만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용돈을 넉넉히 주지 않는다고 아버지를 때린 몹쓸 아들이 있는가하면 잔소리한다고 연탄집계로 시아버지를 때린 독부며느리가 있고 또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부모를 칼로 찔러 죽인 패륜아도 있습니다. 효도나 존경은 못해드릴 망정 나이많아 기력이 없어진 부모님에게 푹언과 폭행을 하고 심지어 흉기로 찔러 죽인다는 것을 도저히 사람으로서는 있을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특히 십계명을 통해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셨고, 만일 효도에 역행하는 자들이 있다면 가차없이 ‘죽이라’는 실로 무서운 명령을 말하였습니다. 사실상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인간의 모든 관계에 있어서 가자아 중요한 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핵심적인 원칙과 기준이 깨어지게 되면, 연쇄적으로 가정윤리가 파괴되고 사회도덕이 무너지게 되고, 온인류는 겉잡을 수 없도 혼돈과 무질서 가운데서 스스로의 멸망을 자초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딤전1:9-10절 말씀가운데에서 ‘아비를 치고 어미를 치는 죄’에 대해 엄중히 경고를 하고 있고, 딤후 3:2절에서는 ‘부모를 거역하는 죄’를 말세의 한 현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딤전 5:8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천국,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하는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부모에게 효도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은 단지 인륜의 문제 뿐만 아니라 믿음의 문제요, 심판의 문제요, 종말론적인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지 못하면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심판 때에 하나님의 무서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봉독해두린 말씀에는 노아의 가정에 있었던 효도와 불효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노아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홍수로 멸하실때 방주를 짓게하며 그 가족 여덟을 구원하여 제2의 인류의 조상이 된 사람입니다. 본문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실로 그는 하나님과 더불어 5백년 동안이나 동행하면서 120년 동안이나 방주를 짓고 오랫동안 홍수 속에서 끝까지 견딘 불굴의 신앙의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포도주 몇잔을 마시고 실로 눈으로 보기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혹 어떤 분은 성경말씀이 노아에게 있어서 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는 이 부분을 덮어두지 아니하고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가라고 의아해 하실 분들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자칫 잘못하면 죄를 지을수도 있고, 또 만일 죄를 짓는다면 그 죄를 철저히 드러내고야 만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즉,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았고 노아도 말년에 범죄를 했으니 하물며 너희들이야 어떻게 죄 본제에 대해 장담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노아의 나이는 6백세입니다. 요즈음 과학자들은 지구의 역사를 철저히 연구해본 결과 노아시대만 해도 오존층이 두터워서 사람들은 물론 동물들도 수명이 길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어쨌든 지금 노아는 6백세가 되었어도 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차 잠이 적어지고 생각이 단순해지며 점점 낙이 없어집니다. 젊은 이들은 책을 읽는다, 모인, 토론한다 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무엇을 해도 그저 다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유익한 낙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일입니다. 이때 언론하신 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닌 것 같지만 표정들이 매우 진지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들을 엮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는 먹는 것인데 이때는 특히 집사외 소모하는 체력을 보충시키기 위해 단 음식이나 고기류를 잡수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노아는 포도주가 먹고 싶어서 그것을 만들어 좀 과하게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이 취하여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벌거벗고 누워서 잠을 잔것입니다. 이때 아들 중에서 합이 제일 먼저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바람직하기로는 누가 아버지의 모습을 볼까해서 재빨리 덮어드렸으면 좋았을텐데 그는 다른 형제들에게 달려가 소문을 냈습니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전국 사정으로 볼때 좋지 않은 내용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제 나이많아 노망을 해서 주책없이 포도주를 많이 잡수시어 지금 취해 벌거벗고 누워있다고 흉을 보았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합의 불효가 있었습니다.
1. 첫째로 그는 연로하신 아버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적어도 합에게 있어서 아버지 노아는 자신을 낳아 길러주었을 뿐만 아니라 방주를 지어 자신을 구원해준 이중적인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쩌다 한번 마신 포도주 때문에 벌거벗었다고해서 그것을 돌아다니면서 흉까지 볼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지금 술취해있는 아버지의 형편과 서정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해야만 했었을 것입니다. 한편 6백세가 된 노아의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그 길고 고통스러운 홍수의 지루함과 따분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홍수와 같은 무서운 심판에 내한 두려움 같은 것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입니다. 더우기 지금 온 인류가 다 멸망하고 난 후라 누구하나 자기 또래의 말동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외로움을 느끼게되고, 마음이 약해지고, 사회를 판별하고 능력이 희미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찾게된 것이 술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됩니다. 바로 이것을 아들 함 은 아해하지를 못한 것입니다.저는 종종 연료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젊은 부부 성도님들에게 하소연 비슷한 상담을 해오는 경우를 대하게 딜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말들을 들어보면 ‘자신들은 하느라고 하는데도 늘 아버님이나 혹 어머님은 못마땅하거나 섭섭해 하실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말끝마다 ‘그전에는 안그러셨지만 요즈음에 와서는 더욱 그러시는데 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곤 합니다. 바로 이점에 자녀들은 특별히 유의해야만 합니다. 연세가 많아질수록 그 결과는 점점 달라진다는 사실에 대해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연로할수록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분명히 실수하는 일도있고 잘못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술취해서 벌거벗고 눕는 것같은 수치스러운 행동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함과 같이 이것을 돌아다니면서 흉을 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비록 그말에 타당성이 없고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모님이기에 연로하신 분이시기에 오히려 존경하고 효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말이 부모가 소금섬을 물로 끓이라 하면 끓여야 하고, 소를 지붕위로 올리라고 하면 올려 놓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소금을 물로 끌이면 다 녹아 버리고 소를 지붕위로 올릴수는 도저히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굳이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치에 맞지 않아도 논리에 어긋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부모님과 연로하신 분이 하시는 말씀이기에 순종하고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가만히 보면 자신은 부모에게 불효하면서 자기 자녀에게는 효도하라고 강요하는 것을 보게됩니다.
포도열매는 포도나무에서 나지 엉겅퀴에서는 나지 않는 것처럼, 효자도 효자 집안에서 나지 불효자 집안에서는 날 수가 없습니다. 이시간 다시한번 내 자신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과연 나는 이시간까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효도를 해왔습니까? 아니면 말대꾸를 하고 흉을 봄으로써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불효해 왔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엡6:1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골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그리고 신5:16에는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주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님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말씀대로 주안에서 모든일에 부모님에게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효도하는 마음으로 경청하며 끝까지 이해하고 존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의 약속대로 땅에서 잘되고 오래 장수하는 축복을 베풀어 주시리라 분명히 믿습니다.
2. 그리고 두번째로 함이 저지른 잘못은 벌거벗은 아버지 노아를 그대로 방에두고 나와 버린 것입니다. 이때 그는 얼마든지 옷가지로 그의 수치를 덮어 줄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제들에게 가서 단지 그 사실만을 고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제들을 깜짝 놀라서 달려와 얼른 아버지를 덮어 드렸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그 부끄러움을 덮어드렸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도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질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뒷걸음질 했다는 말이 그렇게도 아름답고 마음에 들 수가 없습니다. 이미 아는 것은 덮어두고 자기들의 생각속에 조차 넣어두지 않으려는 실로 귀한 행동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효도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효도는 부페음식이나 사드리고 효도관광 여행이나 보내드린다고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이름과 명예를 높여 드리는 데에도 강한 효가 있음을 알아야만 합니다.
잠10:12에는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운다’고 했고 벧전4:8에는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죄를 덮을 뿐만 아니라 아예 보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점만 보일때는 사랑할때이고 단점만 보일때는 미워할 때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거나 남의 약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수치와 허물을 용서와 사랑의 옷으로 다 덮어버립니다. 우리가 잘아는 사도 바울은 자기몸에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다고 말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은 못생긴 그의 얼굴, 혹은 간질병 등등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어쨋든 이 육체의 가시가 그의 목회 사역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가는 각4:14에 보면 잘 알수가 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이르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끝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해준데 대해 ‘할 수가 있으면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눈이라도 빼어 주었으리라’고 감격해 하였습니다. 눈이라도 빼어줄 수 있는 사랑! 만일 우리가 이러한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한다면 모름지기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는 고부간의 갈등이나 패륜이라는 말이 자취를 감추게 되고, 날마다 웃음과 기쁨의 꽃이 피어나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행복의 동산을 꾸밀수 있게 되리라 분명히 믿습니다.
3. 이제 마지막의 세번째로 생각할 것은 합의 불효한 행동은 결국 저주를 받게 되고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어렵게 보면 합이 저지른 실수는 그렇게 대단한 것처럼 보여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수는 그 자손들이 대대로 저주를 받게 되는 엄청난 결과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부모가 그 자녀에게 축복을 빌고 있는 것을 볼수 있고, 이삭도 야곱과 에서에게 복을 빌고 있으며, 또한 야곱도 영? 아들을 놓고 각각 복을 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을 내린 기준들을 보면,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했느냐에 따라 각각 복이 분배가 되고 있습니다. 즉, 효도를 얼마나 했는가에 따라 복의 정도가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를 공겅할때 땅에서 잘 된다는 말씀과 일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경우에는 불효한 아들에게는 복대신 저주를 내리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가나안은 곧 합의 자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대신 자신의 수치를 덮어주고 보지 않으려고 했던 셈과 야벳에게는 창대케되는 축복을 내렸습니다. 물론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는 것을 꼭 어떤 복을 받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부모님의 명예를 높이며 효도하게 될때 내가 다하고 효도의 정성만큼 하나님께서는 내게 복을 주시고 후손들에게까지 복을 내리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맞이할때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 그동안 부모님의 마음을 늘 아프게하고 편안하게 모시지 못한 불효를 생각할때에는 목이 메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어버이주일은 내가 그동안 못다했던 효도와 불효에 대해 철저히 눈물로 회개하시고 날이 될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예배가 끝나는 즉시 내가 이제 앞으로 어떻게 효도할 것인가를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면서 교회문을 나설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는 여러 성도님들에게 그 얼굴을 비취사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또한 그 영광스러운 얼굴을 여러분들에게도 말하사 그의 평광과 축복을 자손만대까지 풍성히 베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