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창세기11장 10-32 강해
오늘 그 다음 창세기 11장 10-32절까지는 홍수이후 노아의 아들 셈의 후예에 대한 족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셈의 족보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까지 언급되고 있고, 그 이후는 아브라함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 홍수족보의 특징은 몇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사람들의 수명이 갑자기 좋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 사람으로 가장 오래 산 셈까지도 홍수 이전 시대에 가장 짧게 살았던 라멕보다도 177년이나 적게 살았고, 아르박삿도 그 아버지에 비해 162년이나 덜 살았습니다. 따라서 수명은 205년이나 감수되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에 대해 심판을 받아 각처에 흩어져 살게된 벨렉 이후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결국 우리의 수명이 줄어들게된 것은 인간이 번죄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잠언10:27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 지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사는 장수 바울은 소련의 어느 산악지방에 있다고하는데 나이 8,90은 젊은 측에 든다고 합니다. 그 장수 이유를 물었더니 욕심없이 늘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우상들을 모조리 다 때려 부수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돌아와보니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 누가 이런짓을 했느냐고 서슬이 퍼르게 물어보았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태연하게 ‘내가 밖에서 놀고 있는데 글세 가게 안에서 무슨 싸우는 소리가 나서 들어와 보니 우상들이 서로가 잘났다고 때리고 싸우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러다 보니 어떤 우상은 머리가 터지고 또 어떤 우상은 팔이 부러지고 엉망이 되고 만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때 데라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우상들이 어떻게 싸운단 말이냐! 너는 왜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라고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얼른 ‘그렇다면 아버지! 왜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우상을 마치 살아있는것처럼 돈을 받고 팔고 있습니까’ 이 말을 듣고 데라는 곧 우상 장사를 그만 두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가 죄악과 우상으로 가득찬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시작이 되었다는 것은 어딘가 이해가 안되는 일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2. 믿음은 분리의 역사임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결코 어두움이나 불의와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울타리를 벗어나야 다른곳에 갈것 없이 우리 자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엄격한 율법의 심판대로하면 나는 이미 열번이상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주님께서는 탐심만 가져도 살인이요, 정욕만 품어도 간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오늘까지 끝까지 할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해야만 하겠습니다.
3. 이 족보는 경건한 신앙의 후손의 분리적인 역사입니다. 창세기는 이 족보를 중심으로 크게 두가지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즉 창세기 1-11장까지는 우주와 인류, 민족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고, 12-50장까지는 그 중에서 특별히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볼때 인류 역사의 전반부는 죄와 불의를 말미암아 캄캄하게 어두어진 불신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면, 11장을 기점으로 그 후반부는 새로운 소망의 빛이 점차 환하게 떠오르는 신앙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출발 지점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갈대아 우르와 하란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갈대아 우르는 역사적으로 보면, 우상숭배가 가장 성행하였고 특히 달을 섬기는 월신의 큰 신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장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렸을때 아버지가 잠시 어디로 출타한 적이 있었는데 만 합니다. 그 죄악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역사를 보면, 범죄한 인류가 가인의 역사로 이어지려고 할때 하나님께서는 셋을 분리하여 신앙의 역사를 이으셨고, 그 후 노아 시대에 죄악이 관영했을때, 셈의 후손들 중에서 데라를 데라 가운데서도 특히 아브라함을 골라 세워 신앙의 역사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맨 먼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분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나가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모든것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뜻이나 생각에 맞지 않는 것은 강하게 거부해 버리는 본능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이 말씀은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죽음의 고통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린 걸음이 있다면 그것은 사형수가 사형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라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곧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이 길은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더디고 고통스러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길은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더디고 힘든 길을 믿음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믿음은 위대한 것이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울만큼 모범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길이나 오늘 우리가 걸아가는 믿음의 길은 시간과 공간만이 차이가 있을뿐 그 근본원리와 법칙에는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그 명령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갈때 위대한 믿음의 역사는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다가 하란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왜 그가 하란에 머물렀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곳이 살기 좋아서 그러지 않았나 생각듭니다. 그러다가 끝내 가나안땅을 가지못하고 말았습니다. 믿음의 발걸음에는 중단이나 멈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전거가 가다가 서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자는 끝까지 쉬지말고 걸어가야 합니다. 고전 9:24에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박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얻는 자는 하나인줄 아나니’-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집 달라다가 나중에는 실패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