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의근원이 될찌라 -창세기 강해
복의 근원이 될찌라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을 인식론상의 명제로서 하나의 메론판톤, 즉 ‘만물의 척도’라고 규정한 이후로 인류문화의 최대 관심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놓여져 왔었음을 너무도 잘 알려진 인간학의 기본적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본질과 내면성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정의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다양한 중심축과 구조적인 복합성을 많게 공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인간을 Homo Sapipms라고 합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존재’라는 뜻인데, 오직 인간만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Homo Faber라고도 하는데, 그 뜻은 ‘도구를 만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담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도구와 무기를 만들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컴퓨터와 핵무기, 레이저 광선, 우주선까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인간을 Homo Ludems라고도 합니다. 그뜻은 ‘유희하는 존재’라는 뜻인데 여행이나 레저붐을 일으키면서 삶 자체를 즐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또는 Homo Negans, 즉 ‘부정할 수 있는 존재’라고도 합니다. 즉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 뿐이라는 것! 그런가 하면 인간은 Homo Esperan라고 합니다. 그것은 ‘희망적인 존재’라는 뜻인데, 인간만이 내일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면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내일도, 희망도 없습니다. 이러한 희망적 존재를 토인비와 같은 역사가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대칭적 역사관의 입장에서 재 해석하고 있습니다만 마주치는 현실문제에 대한 도전이 정신이나 전쟁사 혹은 개척사에서 미래에 대한 응전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역사가 제공해주는 값진 교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탈레스라는 고대 철학자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조직적인 분석이해를 갖지 못했을때 그것을 시도함으로써 자연철학의 효시가 되었는가 하면, 그와는 반대로 모든 철학자의 객관적인 세계만을 관칩할때 오히려 사람 자신을 관칩의 대상으로 삶은 소크라테스같은 사람은 인상철학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더우기 중세기에 모든 전통과 신앙이 주고동성을 주장하고 있을때 생명을 내걸고 지동성을 주장했던 코포기리이쿠스니. 세반이에니 매틀 뛰어 새로운 세계로 찾으려고 망망대해는 도저히 나갔던 콜롬니스나. 유럽에서 동양에 이르는 비단길을 개척한 바르코폴로, 자유의 땅을 찾아 메이플라워호에 모든 것을 맡기면서 건너갔던 청교도들.검은 아프리카 대륙에 복음의 빛을 들고 첫 말을 내리셨던 리빙스턴이나 스탠리와 같은 사람들은 분명히 역사의 한페이지를 개척의 영광으로 장식했던 위대한 인물들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험이나 개척의 동기를 따져본다면, 신앙이나 선교적인 동기이외의 것은 대부분 내적인 불안이나 갈등, 세상에 이름을 알려보려고 하는 야심에 찬 포부, 새로운 것을 찾아보려는 심리적인 충동등이 강하게 작용되고 있음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우리는 저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는 메소포타미아의 한 광야 어귀에서 살았던 한 Homo Esperan, 희망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우리는 흔히 보험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야심에 가득찬 꿈이나, 개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한 충동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쨌든 그는 후에 성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이 되었고,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시간 아브라함이 접어갔던 믿음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게될때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 성도들에게 풍성히 임하게 되시기를 빕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의 역사는 그의 고향을 떠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한 명령의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어떤 미지의 땅이나 신개척지를 찾아 떠나려는 사람은 사전에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하는 법입니다. 인류 사상 처음으로 히말라야의 최고봉 에베레스트산을 올랐던 힐라리라는 등산가는무려 20년동안 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다른 나라로 이민 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몇년동안 떠날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다못해 가까운 곳을 나들이 가려고 해도 간단한 준비정도는 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리셨던 명령은 사전에 떠날 어떤 준비나 생각할 여유마져 주지않는 급하고 강한 것이었습니다. ??즉시 지체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어구가 창세기 19:에서 천사들이 롯에게 유황불로 망하게 털 소돔과 고모라를 급히 떠나라고 말할때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이나 동물에게는 소위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디를 갔다가도 다시 자기의 보금자리로 돌아오려고 하며 또한 될 수 있는대로 자기의 생활환경과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활의 요람과 인척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을 두고 떠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명령을 받은 자의 쓰라린 고통과 고뇌가 있었던 것입니다. 더우기 아브라함은 지금 조국과 고향을 등지고 급히 떠나가야할 절박한 경제적인 이유나 심각한 가정적인 문제가 없었습니다. 최근에 발굴된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당시 아브라함은 인구 약 2천명 정도가 되는 촌락의 한 성구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 적어도 의식주 문제만은 염려하지 않아도 될만큼의 부유한 생활을 누렸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즈음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왜 떠나가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 이유가 ‘자녀문제’때문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국에서 살던 사람들도 한국으로 되돌아 오려는 이유가 ‘자녀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아브라함이 이 부르심을 받았을때는 나이가 75세, 그 아내 사래의 나이가 65-66세였습니다. 나이도 늙고 자식도 없는데 살면 얼마나 더 잘 살고 오래 살면 얼마나 더 오래 살겠습니까?
어느것을 보다 아브라함에게는 힘겨운 결단을 강요하는 조건들입니다. 외악된 세상에 살던 사람이 이 죄악된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떠나야 될줄 알면서도 버려야 되겠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끊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도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대로 있다가 이 죄악때문에 말할줄 뻔히 알면서도 차마 떠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버렸다고 했습니다.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위대한자입니다. 막10:29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몇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빨리 핍박을 경험하고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버려야 다시 찾는 다는 것입니다. 포기해야 다시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6.25사변이 되었을때 공산당이 어떻게다고 하는 것을 안 사람들은 다 포기하고 피난 보따리하나 들고 이남의 피난을 내려왔습니다. 와서 얼마큼 고생을 했지만 그때 두고온 재산이나 물건들을 아쉬워 하거나 후회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혹시나 하고 재산붙들고 눌러 앉았던 사람은 있는 것 다 뺏기고 지주 출신이라고 대부분 처형되거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자기의 생명까지 미워하면서 포가할 줄 아는 자의 진실된 삶입니다. 죄에서 떠나 구원으로, 낙망과 실의에서 떠나 소망으로, 인간적인 생각에서 떠나 하나님 중심으로, 방관자의 삶에서 떠나 이제 사명자의 삶으로 떠나가는 분뢰의 결단인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면류관을 분명히 얻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가 누리게 될 그 영광과 축복은 이 땅위에서 잠시 받는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없다는 사실을 이시간 다시한번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은 말씀을 쫓아갔다고 하였습니다. 4절 말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고’ 여호와를 쫓아갔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 갔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쫓아가는 것도 귀한 믿음임에는 톨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만져 볼 수도 없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쫓아간다는 것은 더욱 더 귀하고 값진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더 복이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복음 전도자 D.r.Moody는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모실 수 있는 줄 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데 필요한 것은 말씀을 붙잡는 일입니다. 그 말씀이 인도하는데로 떠나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직 붙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하나님 자신의 권위를 알고 보이지 않는 일을 보이는것 같이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뵐지라도 귀에는 아무소리 아니들려도 믿음만을 굴게 붙잡고 나가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성도가 됩시다. ‘어디로 갈 것인가! 왜 갈 것인가! 어떻게 갈것인가?’를 묻는 것은 실로 무의미한 질문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지시할 땅’으로 떠나 가기만 하면 됩니다. 보여주면서 가라고 하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기자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직면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히브리서 11:8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때 아브라함에게 들려진 여호와의 말씀은 관념속에서 이해된 말씀이기 이전에 믿음의 양심이 들려주는 인격적인 표현이었고 행동적인 실천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이 갔던 길은 하나님께서 그려놓으셨던 그 이정표와 한치로 틀림이 없었고 친히 지시하셨던 그 방향과 한푼의 각도로 어긋남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요!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고향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5절에는 ‘아브라함이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떠났다’고 했고, 6절에는 ‘아브람이 그 들을 통과하였다’고 했습니다. 8절에는 거기서 ‘벧엘 동편산으로 옮겨 장막을 했다’고 했고, 9절에는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다’고 했습니다. 만일 내가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선다면, 모든 수고는 내가 책임져야 할 수고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내 길을 모두 여호와께 맡겨 버리면 그가 책임지시고 내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 우리 성도님들은 말씀에 굳게 서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아브라함처럼 말씀을 쫓아가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길로 나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첫째는
3. 아브라함은 단을 쌓는 생활을 했습니다. 7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샇았다’고 했습니다. 족장들의 생활을 보면 3가지 공통점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든지 먼저 가면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돌로 제단을 쌓았습니다. 거기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원하면 얼마든지 큰 저택을 짓고 정착된 목축생활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치 외방에 있는 것처럼 장막 생활을 했던 것은 히브리서 11:10절 말씀대로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기’때문입니다. 계속해서 14절은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사실상 아브라함이나 족장들에게 있어서 장막과 우물을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생명샘이라고 할 수 있는 우물까지도 누군가가 달라고 하면 그대로 주고 떠났습니다. 장막도 하루치고 살다가 이들날되면 다시 접에서 어디론가 떠났습니다. 한마디로 이 세상의 삶에 어떤 비련이나 애착을 두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보다 더 나은 영원한 본향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바라보는 원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옛날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늙은 추장이 병들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자기의 후계자를 택해 세우려고 후계자 3인을 정한 다음 그들에게 시험을 치뤄 합격하는 자에게 자기의 추장 자리를 계승시키려고 했습니다. 추장은 후보자 3사람을 부르고 문제를 내기를, ‘그대들 3사람은 저기 보이는 사철눈이 덮인 저 산봉우리에 올라갔다 오리 갔다 왔다는 표가 될만한 것은 것ㄹ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추장의 명령을 받은 첫째 청년은 그 높은 봉수리을 단숨에 올라가 고산식물의 예쁜 꽃 한송이를 들고 내려와 추장앞에 내어놓자 추장은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둘째 청년도 쏜살같이 산정에 올라가 바위에 돋은 이끼플 뜯어다 주장에게 바쳤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기쁜 얼굴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째 청년은 어쩐 일인지 빈손으로 돌아왔읍니다. 그는 추장에게 말하기를 ‘추장님! 죄송하게도 저는 물건을 가져오지 못했으나 한가지 사실만은 보고 돌아왔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남쪽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비할 수 없이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기름진 평야, 밝게 하르는 시내, 울창한 산림이 보였습니다. 추장님! 어서 완쾌하십시요, 그래서 우리 백성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가서 살도록 하십시오’ 추장은 꿈이 있는 이 세번째 청년을 자기의 후계자는 지명하고 그로 하여금 백성을 데리고 산 저편의 세계로 가서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저 앞에 펼쳐져 있는 희망의 세계를 바라보는 꿈이 있어야만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북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면서 모험적인 생을 믿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모세가 보낸 이스라엘 12명의 정탐군들은 아낙 자손과 그들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와 갈렵을 그땅으로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꿈을 가지고 믿음으로 결단하는 보험적인 인물들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기필코 가나안땅에 승리의 깃발을 꽂고야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았고 구원과 영생을 받았고 천국의 약속들을 분명히 받았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복에 대한 명령과 약속만 좋아하고 복받은 자가 마땅히 행해야할 사명과 걸어가야할 길을 등한시한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크게 오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에게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할 사명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때문에 우리의 삶의 터전이 조금이라도 더 밝아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는 믿음으로 우리의 가정이 복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땅 위에 살므로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더욱 좋아져야만 합니다. 내가 있음으로 우리 교회가 은혜스럽게 부흥발전하게 되매 우리를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라기는 금년에는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 길 없는 복의 근원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 성도님들이 하시는 행사마다 늘 함께 하심으로써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넘치는 축복과 사랑을 나눠주며 자손만대에 면면히 흐르는 영원히 매마르지 않는 축복의 샘근원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