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을 쌓게된 이유-창세기 강해

바벨탑을 쌓게된 이유



그들이 바벨탑을 쌓게된 이유는 1. 하늘에 닿게 하자, 2. 우리 이름을 내도록 하자. 3.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도록 하자입니다.
1. 탑을 하늘에 닿게 쌓아보자는 것은 이전에 홍수가 났었기 때문에 다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 없도록 하나님에게 대항하도록 해보자는 의도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노아 홍수 이후에 인류들에게 다시는 이와같이 인류를 멸절시키는 홍수를 내리지 않겠다고 분명히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표식으로써 무지개를 보여주셨습니다. 만일 이 약속의 말씀과 표식은 분명히 믿었더라면 그들은 결코 하늘에 닿게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혹 하나님께서 다시 홍수를 내리면 어떻게 되는가? 의심하고 불안해 하면서 결국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것과 맞먹는 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는 의심하는 것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게된 것은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사탄은 인간의 약점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어떻게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가장 효과있고 신속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케하고 범죄케 할 수 있는가라는 비결을 압니다. 이는 곧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케 하는듯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마귀는 ‘정말로 따먹지 말라고 하더냐?’고 물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번 정색을 하고 물으면 ‘사실 그런가?’하고 의심을 가직 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되면 사람은 ‘하지 말라’와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마귀의 간사한 말 사이에서 어느쪽이 참된 진리인가를 놓고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의심이 생기게 되고 오해가 생기게 되고, 급기야는 분쟁과 불화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기초위에 굳게서서 마귀가 우리의 마음속에 의심이라는 갈라지를 심기 이전에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다져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의심으 바벨탑은 높이 싸워 올라갈수록 위험한 법입니다. 우리의 몸이 튼튼할때는 아무리 병균이 들어와도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결국 마귀의 꿰임과 거짓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가 말씀에 대해 잘 모를때야! 늘 말씀으로 양분을 살인 건강한 말씀을 키워나갈때 의심하는 마귀의 역사는 어디론가 자취를 감취게 되고 말것입니다.
2. 바벨탑을 쌓으려고 한 것은 이름을 따귀 위함이었습니다. ‘낸다’는 말은 원문에는 ‘높이 들어 세운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이름을 높이 들어 세운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공명국의가 아닙니다. 옛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은 결국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이름을 남기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데서 비롯된 말입니다. 사람이 이름을 나타내려는 것은 하나의 본능이라고는 할 수 있습니다. 산이나 명승고지에 가보면 산 벼랑 절벽 바위에 이름 석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PR 내지는 공명주의는 이미 마귀가 아담과 하와에게 사용했던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네가 높아질 수 있어! 네가 이름을 낼 수 있어!-높아지려는 마음을 최대로 자극하였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세가지 큰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1. 1:12-14 40일 금식 마치신후 받으셨던 3가지 시험
돌로 떡덩이로 만들어라=기적의 예수를 보여질라 또 말미암아 ‘인기’를 얻으리 뛰어 내리라, 네게 정하라 =하나의공명주의! 영동주의

2. 8:31-베드로로 칭해 간청된 시험, ‘그리 와주소서 편한길을 택하소서!’ 이제 편하게 레시야가 되소서 왕이 되소서라고 유혹이었습니다.

3. 14:31-36 겟세마네 기도 내리시험 사실상 십자가는 지는 뜻은 자기 이름을 내는 뜻이 아니라 더럽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도 내 원대로 봐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이 근본되는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자연히 가리워 지게됩니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생활은 나만을 위해 높이 쌓아올라가려는 ???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의 이름이란 잠시 지니고 있다가 언젠가는 흙과 더불어 없어지고만 하찮은 이름 석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래가야 손자때에 가서는 결국 희미하게 기억하던가 그 나마도 세월이 흘러가면 완전히 잊혀지고 마는 헛된 인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다간 성도의 이름은 하늘나라 진주문 양펜 기둥에 새겨지며 생명록에 영광스럽게 기록된 것입니다. 바라기는 여러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높이면서 사시다가 모두가 생명록에 기록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4. 바벨탑을 쌓게된 세번째 원인은 온 땅에 흩어짐을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에 ‘흩어진다’는 말은 ‘충만하라’와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때에 ‘땅에 충만하라, 즉 땅으로 흩어지라! 땅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흩어지지 않고 성을 쌓으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때는 사고도 많고 범죄도 많고 분쟁도 많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연합라 단결을 호소하고 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 볼대는 인본주의가 바로 사람 위주로 모이는 곳에서 싹이뜨는 것입니다. 교회로 사람이 본위가 되어 사람들과 모이는 곳이 회맨교회라는 거대한 바벨탑을 쌓는 결과를 빚게되고 맙니다. 엡6:23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은 곧 만물 가운데 충만케 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모이는 것이 근본목적이 아니라 모인 다음에 흩어져 교회의 사망을 다 할때 비로소 교회라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을 스스로 태울 때 비로소 발할 수 있습니다. 소금은 스스로 녹아질때 맛을 낼수 있습니다. 교회도 자신을 태우고, 녹이고, 흩어질때 가치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서로 자기교회 개교회 중심으로 되어가는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만 잘되고 부흥하면 그만이지 다른 문제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 교회는 바벨탑 교회입니다. 초대 교회는 모이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불이 혀같이 길라지는 역사처럼 흩어져 전도하고 구제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 자리에 모인 교회인 동시에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사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곧 그것은 가정속과, 사회, 직장속으로 사업체 속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리스도의 향기로서,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빛과 같이, 소금과 같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에 될때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 충만케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시 모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신앙적인 바벨탑을 쌓으려는 저들에게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패역적인 행동을 보시고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셔서 탑쌓는 것을 중지시키시고 온지면에 흩어져 살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만일 무슨일이든지 불신앙적인 동기와 방법과 목적으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 하는 일을 즉시 중지시키고 마실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그뜻을 흘리면서 수고하고 애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합당치 않는다고 한다면 즉시 허물어지고 말것입니다. 시편 127편은 노래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험함이 허사로라!’ 바라기는 성도여러분들께서는 무슨일을 계획하든지 행하든지 하나님 중심주의, 하나님의 영광제일주의로 살아서 하나님이 나를 친히 붙들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임??왕의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아낙회 지어봐도, 지켜봐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시는 바벨탑과 같은 헛된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손만대 견고히 붙잡아 주시고 든든히 지켜 주심의 그 빛나는 믿음의 이름을 후세에 영원히 맡길 수 있는 성도님들 다 되세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1장은 노아의 후손들이 한곳에 모여 살다가 바벨탑을 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각기 흩어져 살게되어진 내용의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 1-2절이 보면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노아의 후손에게서 시작된 인류는 같은 말을 사용하고 같은 문화를 지닌 단일 민족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다 더 나은 삻을 누리기 위해 해가뜨고 에덴의 동쪽으로 점점 더 나아가게 되었으며, 마침내 유브라데강과 티그리스 강이 만나는 비옥한 시날 평지에서 그들의 새로운 삶의 터전을 딱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들은 이 시날평지에 바벨탑을 쌓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을 만들고 그 가운데 친히 창조하신 인간들과 더불어 살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이 동산에서 쫓겨나 동산 주변에서 살게 되었고, 거기에서 또 가인이 범죄하므로 더 동쪽으로 나아가 놋땅에 거하면서 자손을 낳게 되었고, 그후 사람들이 더욱 번창하여 범죄하게 되어 홍수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홍수 심판이 끝나고 난 후 사람들은 더욱더 살기 좋은 그곳을 찾아 이곳 시날 평지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직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낯을 떠나 에덴에서 점점 멀리 나아갔던 것! 하나님없는 인간은 보다나은 내일의 삶을 추구함으로써 눈부신 물질 문명의 발달을 가져온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 문명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탑의 문명으로 비추어지고 말았습니다.
*바벨탑을 쌓게된 동기와 원인은 3절이하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이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1. 바벨탑은 인간의 뜻과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서로 말하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말했다는 것은 ‘서로 말하면서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말이 같으므로 그들은 아무런 불편없이 서로가 의사를 주고 받으면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을 쌓으라고 명령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뜻대로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바벨탑은 한마디로 인간의 뜻대로 시작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무슨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전혀 묻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는 것, 혹은 상대방의 의견만 묻고 행하는 것은 불순종의 생활입니다. 야고보서 4:15-16절에 보면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어늘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헛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입니다. 이것 저것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조건을 허락해 주시고 범위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요,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아침에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헛된 인생이 하나님없이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과 더불어 기도로 상의하면서 해야합니다. 찬송가 487장,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9하여 아뢸줄을 모를까’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아뢸때 우리 주님, 우리 연약함을 아시고 친히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읍시다.
2. 바벨탑은 벽돌을 돌로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쌓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건축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의 역청이란 말은 오늘날 아스팔트 성분이라고 하는데 이미 방국을 만들때에는 사용되었습니다. 이 귀절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바벨탑 쌓기 이전부터 땅속의 석유기름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 역청은 나무에서 나오는 끈적 끈적한 송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탑은 돌과 진흙으로 쌓는 것인데 돌 대신 벽돌이 진흙대신 역청이 사용된 것은 하나의 모든 내용품 재회 시대가 시작된 것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품, 내용품 시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면서 모든 것은 인조, 모조, 대용품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인조섬유, 인조고목, 인조합판, 인조꽃 등! 그리고 오늘날에는 신소재 개말로 모든 것은 실제 원래료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인조재료는 원래 재료만 못합니다. 인조 섬유는 천연 섬유만 못하고, 대용 원료는 천연 원료만 못합니다. 오늘날 신앙도 점점 인조 신앙, 모조 신앙화 되어가는 경향! 신앙같지만 원래 순수한 신앙에서 떠나 많은 것이 가시되고 채색된 신앙입니다. 오늘 현대신학에서는 옛 신앙은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뜻이므로 이제는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맞는 신앙의 바꾸어져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조화 꽃도 언듯보면 꽃이지만 향기와 생명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같은 것은 신앙이 아니고 분명히 순수한 신앙이라=신앙 구약제란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고 합니다. 믿음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효소로 썩여져서는 안됩니다. 피와같이 순수한 믿음 그 자체를 지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신앙. 아무쪼록 우리 성도님들은 혼탁한 세상에서 오면되니 신앙지대에서 떠나 흠없고 청결한 믿음을 가지고 충성스런 믿음을 생활하시길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