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3장 강해

창세기 13장 강해



계속해서 창세기 12장 10절이하에 말씀에는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거기에서 많은 고난과 위험을 당했던 사실에 대해 언급되고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은 언제나 세상의 모든 향락과 육욕과 불신앙의 모령의 땅으로서 아브람은 조그만 어려움이 닥치자 먹고 살기 위해 하나님의 뜻도 물어보지 않고 이교도의 땅에 내려갔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그만 시험이나 어려움이 생기면 쉽사리 하나님을 뜻을 묻지 않고 ㅅ[상의 방법대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살면 크게 행복하고 자유로울 것 같지만 그것은 실패와 좌절, 불행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큰 이적과 기사로 바로의 손에서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만일 성도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생명록에서 이름을 지워버리시고 영원히 내어 버리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비성경적인 생각인것입니다. 이사야 42:1이하를 보면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갈대가 상했다고, 등불이 꺼져 간다고 꺽어 버리거나 꺼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말씀과 성도와 하나님 사이로 언제나 자녀관계로 봉사. 자녀는 아무리 패역하고 불순종해도 자녀는 자녀입니다. 혹 사람은 자녀가 말을 듣지 않으면 미워할 수도 있고, 또 아에 안낳았던 자식인것처럼 체념해 버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는 그 시한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세상끝날까지하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이 끝나는 그시간까지 변함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으로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2:3절, 4절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에 있는 전에 장막쳤던 곳에 이르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때 아브람은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크게 깨닫고 감사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우리를 죄악가운데에서 구해주시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도 언제나 사랑으로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감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이제 아브람은 가나안에 돌아와 벧엘과 아이 사이에 거하고 있었는데 이때에 조카 롯도 함께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하란에서부터 가나안땅까지 데리고 와서 아버지와 같이 극진히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점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우양과 목자의 수가 많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가축이 적었을 때는 아무데서나 풀을 뜯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는데 점점 가축이 많아지니까 적은 땅에서 서로가 꼴을 뜯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가축과 가축끼리 싸우다가 그 다음은 목자와 목자가 서로 싸우게 됩니다. 목자들 사이의 패 싸움이 벌어지자 비록 삼촌과 조카 사이라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아마도 섭섭한 마음이 들고 거리감이 생겼을 것입니다. 처음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을 때는 서로가 다툴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생기고 삶의 여유가 있게 되자 그들 사이에는 불편하고도 어색한 관계가 이루어진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물질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물질은 이 세상 어느것보다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곧고 진실한 선비나 학자라고 할지라도 이 물질이 들어가면 마음이 검어지게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는 황금 흑사심이란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물질이 생기면 의가 좋던 식구나 친척끼리도 무엇인가 생각이 달라지고 아무리 높은 권세를 가졌다 해도 이 물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사이도, 가난할때는 재미있게 살아가고 물질이 생기면 다툼이 나고 헤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즈음 신문을 보면 5공화국 비리니, 고위층 비리문제가 크게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한 나라의 지도자급인 사람이 어떻게 감히 그런 몰지각한 일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심리문제를 생각해보면 그렇게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닙니다. 물질은 소유하기 원하는 것은 순수한 인간의 기본본능인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 정죄하는 사람들도 따지고보면 어떤 상황하에서는 자신들도 똑같이 그런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는 물질을 초월하고 산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거짓말쟁이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럼은 누구나가 물질이나 황금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본래의 인간적인 순수성에서 이탈될 염려가 있습니다. 어느 사이좋은 두 어부 형제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무슨 짝같은 것이 걸려 끌어 올려놓고 열어보니 그곳에는 보물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 두형제는 서로가 얼싸앉고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속히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노를 젖고 해안가까이로 올라와 형님이 갑자기 노를 놓더니 그 보물상자를 들어 바다에 도로 풍성던져 넣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동생을 바라보면서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보물을 보는 순간 웬지 네가 귀찮고 미워지더구나! 너만 없었더라면 이 보물은 내가 다 차지할텐데 하는 생각이 자꾸만 나서 바다에 던져 버리니 이제는 시원하다. 나는 보물 보다는 너와의 의리가 깨어 지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네생각은 어떠냐?’하고 형님이 물어 보니 역시 동생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래도 집안끼리 이 제물 때문에 서로 싸우고 심지어는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경우들도 많이 봅니다. 또 어떤 때는 교회안에서도 이 재산권이나 물질 문제 때문에 다투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아브람이 롯에게 말합니다. ‘너와 나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과 함께 멍에를 메고 사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만일 육적인 생애와 영적인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이 약속의 땅에서 싸움을 계속하는 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아무리 혈육이라고 할지라도 헤어지기를 결심했습니다.
나이로보나 촌수로 보나 그는 90이 넘은 로스이 삼촌이었습니다. 젊은 청년인 조카 롯을 꾸짓을 수도 있고, 노여움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로 말미암아 분장이나 다툼을 일으키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더우기 그는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고 있습니다. ‘네기 좌하면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리라’ 이것은 쉬운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디를 보아도 아브람은 롯보다는 윗 어른입니다. 얼마든지 자기가 좋은 곳을 차지할 수도 있고, 롯은 아에 쫓아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장 중요한 선택권을 롯에게 념겨주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습니다. 히11:10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습니다.’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굳이 이 세상의 것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같은 것에 그렇게 큰 관심과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롯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그는 조금도 양보하는 빛이 없었으며, 물이 넉넉하고 애굽땅 갈으며 여호와의 동산같이 아름다워 보이는 요단들과 평지를 택하였습니다. 그대신 아브람은 요단강 서편 산지 헤브론 쪽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고 말았습니까? 롯이 좋은 땅이라고 골라서 간 소돔과 고모라 땅은 결국 유황불로 멸망당하였고, 자기 아내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구사일생으로 생명만 부지한 채로 그곳을 빠져 나오게 됩니다. 롯의 삶은 한마디로 육신만을 쫓아가는 삶입니다. 아브람과 똑같이 약속된 땅에 살면서 그는 하나님앞에 제단을 쌓고 살았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는 단지 이 세상이 풍요로운 것에만 눈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유리하다가 생각되었을 때 의리도, 염체도 다 버리고 자기에게 좋은 곳을 골라 가버렸습니다. 롯은 소돔의 죄악상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의 물질적인 욕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큰 죄인인 소돔 사람들과 어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패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눈은 둘이지만 바라보는 시선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시선의 방향을 확인해야만 하겠습니다. 내 눈은 비옥한 소돔 고모라를 바라보고 있는가? 아니면 거친 유대 산지를 바라보고 있는가? 내 지금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은 모든 사람들이 가려고하는 넓은 세상길인가? 아니면 좁고 험한 믿음의 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인가? 이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곧 믿음의 눈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에 썩어질 재물이나 영화를 보지 않고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 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삶에 오히려 만족하면서 살아갑니다. 한날의 죄를 ??족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보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보는 대상이며, 가졌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가진것을 어떻게 쓰는 가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바라기는 아브라함처럼 하늘나라에만 소망을 두고 주어진 삶을 최대한으로 만족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축복받은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