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2장 강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여호와 이레) 창22장
오늘 봉독해드린 본문 말씀에는 우리가 잘아는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극적인 장면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창세기,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이 장면처럼 아슬아슬하게 가슴조리면서 읽어야하는 부분도 없을 줄 압니다. 전통적으로 히브리 마소라의 랍비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하는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고 악센트가 강해지기 시작합니다. [와이 오멜 아브라함 아브라함 호 티슐라흐 야드카 엘 하나알 빼앜 다아슈로 데우마]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하늘이 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놀라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가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임 4천 여년이라는 긴긴 세월이 흘러갔어도 우리는 이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영원히 퇴색할줄 모르는 믿음의 교훈과 가슴이 뭉클해지는 삶의 의미를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시험받은 사건에서 세가지 중요한 교훈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이 시험은 ‘그 일 후에’일어났다고 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그 일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했씁니다. 그 일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백세에 아들 이삭을 얻었던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정든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헌신만고끝에 가나안 땅으로 온지 무려 25년 동안이나 애타게 기다린 후에 얻은 아들이었으니 그 얻는 순간이 얼마나 기뻣었겠으며 그 아들이 얼마나 소중히 여겨졌었겠습니까? 바로 그 감격과 기쁨의 사건이 있고난 후 그 아들에 대한 시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마치 영광스러운 태양이 빛을 발하며 떠있던 맑은 하늘이 갑자기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이는 것같이 최대의 기쁨이 최악의 슬픔으로 최고의 정상이 최하의 계곡으로 바꾸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여기에서 뚜렸히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기쁨이 있고난 다음 순간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영광과 축복이 있고난 다음, 나는 승리했다고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린 그 다음 순간을 매우 조심해야만 합니다. 다윗왕은 주변의 대적 국가들을 물리치고 온 나라가 태평세월을 구가하고 있을때 하릴없이 왕궁지붕 위를 거닐다가 무서운 시험에 빠지게되고 말았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이방신 제사장들과 대결해서 당당하게 승리를 거두었던 불의 선지자 엘리야는 곧 이어서 로뎀 나무 그늘 아래에서 죽기를 구하고 처절한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한 신앙고백을 통해 주님께로부터 [페트라] 반석이라는 호칭과 천국 열쇠를 위탁받았던 베드로가 곧 이어서 ‘사단’이라는 책망을 받고 있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사실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즉 어제 성공했다고 오늘 성공하는 것이 아니며, 또 오늘 승리한다고해서 반드시 내일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심리학적, 통계학적으로 따진다면 어제 승리한 사람이 오늘도 승리하고, 오늘 성공하는 사람이 내일 성공하게 될 확률이 많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승리와 영광이 오늘의 그것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제보다 더욱 피눈물나는 노력이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어제의 그 영광과 승리에만 도취되어 버린다면 어제의 그 축복과 번영때문에 스스로 자만심에 빠져 최선을 다하지 않게된다면 어제의 그 모든것은 오히려 오늘의 시험이 되고 저주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세계미술 사상 가장 섬세한 미적 감각과 도구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그리고 새겼던 미술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르네쌍스 시대의 미켈란젤로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하루는 시스틴 채플이라는 교회당의 천정 백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정이 까마득히 높았었기 때문에 전체 그림을 잘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천힘벽에 붙어서 한부분 한부분을 정성스럽게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밑에서 쳐다보고 있던 친구가 ‘아 여보게 여기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네 그냥 적당히 그리고 내려오게나’하고 소리치며 말했습니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묻기를 ‘여보게 친구 내가 이 그림을 다 그리고 난 후 그 성과를 가장 잘아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말하자 그친구는 ‘그야 물론 자네겠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 맞네 내가 알고 나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이 아시는 한 나는 아무렇게나 일할수는 없네’라고 그 친구에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자기의 삶은 그 누구보다도 자기가 제일 잘 압니다. 자기의 삶에 얼마만큼 최선을 다했는지 주어진 시간속에서 주어진 과제를 위해 얼마나 노력을 다했는지 자신이 잘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흔히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을 경우가 있습니다. 엊그저께에는 전기대학 입학 시험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머지 않아 곧 발표가 있을 것입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학생은 합격의 영광을 차지할 것이요, 또 어떤 학생은 불합격의 쓴잔을 마셔야만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는지 간에 최선을 다한자는 영광을, 게으리고 나태한 자는 패배를 안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결코 요령이나 우연, 운수라는 것이 존재치 않습니다. 에외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성경의 불변적인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생명과 건강을 허비하는 죄까지도 짓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여러 성도님들의 앞길에 뜻하지 않은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거든, 눈물을 흘리며 배신의 잔을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실패의 밤이 찾아오거든 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리면서 그밤의 지루함과 고통을 참는 것처럼 곧 밝아 올 영광의 새 아침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참고 견디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 여러분 중의 누군가가 영광과 승리의 날들을 기뻐하며 노래하고 있으시다면, 언젠가 혹 닥아오게 될지도 모를 실패와 좌절의 날을 위해 믿음의 각오와 준비를 철저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려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여러차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고향과 친척을 그러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떠났어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가 정든 고향산천과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여러 친척들을 떠나야 했던 것은 실로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우기 그는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야하는 막연한 여행길에 들어서야만 했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는 조카 롯과 거주지 때문에 헤어져야 하고 뼈아픈 어려움을 격었었고, 소돔왕으로부터는 불의한 재물에 대한 유혹도 있었고, 기근 때문에 애굽에 갔다가 부인 문제로 큰 망신과 어려움을 당했었고 하갈과 서자 이스마엘 문제로 가정적인 시험까지 꺽지 않으면 안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때마다 이러한 여러가지 시험과 유혹들을 잘 극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의 시험을 전혀 그 내용과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것은 백세에 얻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자기손으로 직접 죽여 불에 태워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가혹한 시련이고 시험입니까? 비록 사랑하지 않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핏줄기를 끊는다는 것은 그 부모에게 있어서 실로 끔찍한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여러명의 아들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중의 한 아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올바른 제정신을 가지고는 차마 못할 일일 것입니다. 옛날에 다섯명의 아들을 가진 어떤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매우 친한 친구가 아들이 없어서 한 아이를 양자로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친구와의 의리를 보아서도 그렇고 아들 다섯중에 한 아이를 주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 어떤 아들을 줄까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장남은 아무래도 줄 수가 없고, 둘째는 제일 똑똑한 놈이니 안되겠고, 셋째는 늘 몸이 아프니 못주겠고, 네째는 제일 미남이니 안되겠고, 다섯째는 다섯째는 막내이니 차마....’ 그래서 결국 아무도 줄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단 하나밖에 없는 독자였습니다. 내 아들이 남의 손에 맞기만 하는 것도 참기 어려운 고통인데, 아브라함은 지금 그 아들을 손으로 죽여 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시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 도착할 즈음 아들이 묻고 있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역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이까?’ 이때에 차마 ‘너를 바쳐야 한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고 그때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십니까? 아마도 우리는 직접 당해보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찢어지는 듯한 가슴과 심장이 갈라지는 듯한 그 아픔을 능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시험 받는 것을 보고, ‘뭘 그런 것 가지고 그렇게 걱정하고 슬퍼하느냐?’고 대수럽지 않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이 그와비슷한 일을 당하게 되면 오히려 더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가난도 며칠밥을 허기진 배를 쥐어잡고 추위에 떨어본 사람만이 절실히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시험도 온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체험을 직접 해 본 사람이 생생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로버트 슐러하면 적극적 사고방식을 목회에 적용시켜 크게 성공한 세계적인 대 목회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쓴 저서와 설교들을 통해 숱한 미국의 젊은 이들과 전세계 성도들이 그들의 절망과 시험의 늪에서 헤어나와 그리스도의 소망의 빛을 찾게되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년 전 그가 한국에 와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갑짜기 미국으로부터 급한 전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열세살이었던 케롤이라는 땅이 교통사고를 일으켰다는 전보였습니다. 서둘러 귀국해 보니 그 땅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 자동차와 부딪쳐 이미 다리 하나가 없어져 버린 후였습니다.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던 그가 자신이 직접 그런 불행을 당하고 나니 차라리 그의다리 하나가 잃어버린 것과 같은 아득한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고난지 얼마 못되어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아벨라가 암에 걸렸습니다. 급히 암부분을 도려내서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습니다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고통의 기간에 슐러 목사님 부부는 말씀을 읽는 중에 3가지 위대한 진리를 발견해 냈습니다.
1. 모든 것을 현실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진리였습니다. 불구가 된 땅이나 암에 걸린 자기 자신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내 인생의 계획자요 인도자라는 진리였습니다. 아벨라의 인생길을 미리 작정해 놓으셨고, 또 케롤의 앞길도 하나님이 설계하고 계시므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선한 길로 인도해 내실 것이라는 확신이었습니다.
3. 전적으로 모든것을 하나님께 의탁하라는 진리였습니다. 불구자가 된 딸도 암에 걸린 아내도 하나님께 모두 맡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를 선한 목적으로 시험하시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모든 문제를 받으시사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임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C.S. 루이스란 사람은 사랑하고 아내가 조용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기쁨과 쾌락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내게 다가와 속삭이신다. 그러나 시험의 고통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 가까히 다가와 내게 큰 소리로 고함지르신다.’ 그렇습니다. 내가 평안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조용히 속삭이시므로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시련을 당하고 고통과 역경의 바다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때에는 하나님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시니까 잘 들립니다. 그리고 가까이 오셔서 나를 붙잡아 주시고 사랑의 손길을 분명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시험은 우리에게 전혀 무익한 것이 아니라 꼭 있어야만하고 꼭 받아야만하는 필수적인 믿음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시험을 통해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를 만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안타까운 일은 우리는 이 시험이 왜 우리에게 주어지며 언제끝나게 될 것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부모님이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자녀들이 내곁을 영영 떠나가야하고 이유를 알 수 없고 나혼자 소리없이 울어야 하는 이밤의 고통과 아픔의 이유를 나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긜고 내가 당하는 이 쓰라린 고통과 시련이 언제쯤이면 끝나게 될른지도 나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압니다. 이 밤이 지나가면 이 고통의 순간이 끝나면 이밤 저 건너편에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의 광명을 그리고 정오의 눈부신 햇살을 바라보면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그 기쁨의 순간이 찾아오게 될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이성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 나를 유익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과 주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과 영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이 삶의 험한 골짜기와 시험의 거친 들판을 울면서 쓰러지면서 다 걸어간 후에 우리가 마침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성, 하나님의 영광, 바로 그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여러 성도님들은 아브라함처러 아침 일찍 일어나 동트는 새벽 여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저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나갈 준비를 속히 서두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쪼갠 장작 등에 메고 불을 밝히면서 그동안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고 아끼던 사랑하는 이삭이 손을 잡고 저 시험의 삼일길을 묵묵히 걸어나가시기를 바랍니다.
3. 이제 마지막 셋째로 아브라함이 이 무서운 시험을 이기게 된 비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그 해답을 아브라함이 제물에 대해 묻고 있는 이삭에게 답변하고 있는 본문 8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여호와 이르기,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니라’ 여호와 이레!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네 씨에서 나게될 후손이 하늘의 별들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이삭이 죽음과 더불어 그의 생애가 완전히 끝나버리게 된다면 그의 말씀은 헛것이 되고 그 약속은 폐기되고 말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약속하신 말씀이 신실하고 미쁘신 것이라면 이삭은 반드시 다시 살아나야만 합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꼭 살려주셔야만 합니다. 만일 그렇치 않는다면 그 대신 또 다른 이삭을 사라의 몸에서 태어나게 해 주셔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배짱이 있고 여유와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은 겂없이 칼을 들어 아들의 목을 내려치려는 무서운 실천적인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도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보면 믿는 성도라고 하면서도 분명히 대수롭지 않은 일인데도 온 세상의 근심을 혼자 다 지고 있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면서 근심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입시철만 되면 마치 자녀의 소망이 시험점수에 걸려 있는 것처럼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서글픈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한가지 묻습니다. 아니 학교의 성적표가 정말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학교 시절에 성적이 우수했던 사람들이 다 출세하고 훌륭하게 되어졌습니까? 만일 그렇게 계속적으로 몰아 붙이다가 혹 자녀가 탈선하거나 아프트에서 떨어져 내리는 날이면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비록 어느 값싼 영화의 결론이기도 합니다만 참된 행복이나 인생의 가치는 결코 성적순으로 매겨질 수는 없습니다. 재산이나 학벌이나 가문으로도 평가되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보다 깊게, 보다 넓게, 보다 멀리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만 합니다. 피상적인 사건만 보아서도 안되고, 지성적으로 판단해서도 안되고, 감정적으로 속단해 버려서도 안됩니다. 요즈음 만나는 사람마다 ‘청국이 어지럽고 혼란하다’, ‘경제가 흔들린다’, ‘사회가 몸씨 불안하다’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언제는 어느 지도자의 탁월한 능력을 믿거나, GNP의 숫자나 사람의 평가를 믿고 살아왔습니까? 어느 누가 내 인생을 보장해 줍니까? 누가 나를 향해 ‘너는 두려워 말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처음부터 믿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나와 내 자녀와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아시고 그의 선하신 뜻대로 선히 인도해 주실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오늘 이 시간 이후부터는 내가 부족하거나 연약하거나 실패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일이 결코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위해 나를 시험하시고 연단시키고 계신다면, 지금 내게 주어지는 어떤 고통이나 역경이나 시험도 감사함과 기쁨으로 받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비록 답답함을 당하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계속적으로 나를 위해 가장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모든 일을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없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느날 주님께서 나를 들어 역사의 무대위에 올려놓으신 후 맡겨주신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많이 하시다가 승전가를 부르며 천국문으로 당당히 들어 가시는 여호와 이레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4천여년 도의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심을 ??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모든것을 준비해 놓으시고 ?? 마다 넘치는 축복으로 채워주시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보호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내 생각과 감정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눈을 들어 지금 우리를 항시 돕기 위해 예비된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볼 병리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온전히 주님만을 믿고 신뢰하면서 시험가운데서 참고 고난 가운데서 견디면서 종이 울리고 영광의 새아침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