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각의 차이를 뛰어 넘어 | ||||
|---|---|---|---|---|---|
![]() |
2008.09.07 | 권다니엘 목사 |
9 | ||
![]() |
비전, | ![]() |
![]() | ||
![]() |
요한복음 9:35~9:41 | ||||
|
시각의 차이를 뛰어 넘어 요9:35-41 2008년 6월 7일 1 시 35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36절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7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8절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 저 있느니라.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우리는 보게됩니다. 시각의 차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가 있었습니다. 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사람은 너무도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형은 거리의 걸인(홈리스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박사 학위를 받고 훌륭한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이들의 사정을 듣고 어떻게 똑같은 환경에서 이렇게 다른 인물이 나오게 되었는지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기자는 특이한 액자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형제가 자란 집에 Dream is nowhere(드림 이즈 노우-웨~얼). (꿈은 어느 곳에도 없다)라고 적힌 조그마한 액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기자는 형제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액자가 기억나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형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있었죠. Dream is nowhere(드림 이즈 노우-웨~얼). (꿈은 어느 곳에도 없다.) 분명 20년 넘게 우리 집에 있던 액자였습니다. 전 늘 그것을 보며 자랐습니다. 인생에서 성공을 거둔 동생이 미소 지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있었죠. 하지만 저는 띄어쓰기를 달리해서 보았습니다.” Dream is now here.(꿈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전 늘 그렇게 생각하며 자랐죠. 보는 시간의 차이는 놀랍니다.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우리 인생의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을 보게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터넷이 참으로 발전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검색 창에다 단어 하나만 치면 정보가 주루룩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검색 엔진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검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긍정적인 말, 행복으로 가득한 말을 검색하길 원하십니까?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날아야 합니다. 더 높이 날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노력하고 더 높이 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까? 즉 어디를 향하여 날아가는가? 무엇을 향하여 높이 날아가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향하여 날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열심히 살아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노력과 높이는 모래위에 세워진 집과 갔습니다. 몇 주 전 중국에서 강도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진 피해로 약 1천만명이상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많은 건물들이 붕괴되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이야기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건물이 무너져 내려 6,898개가 무너졌습니다. 중국의 인구 정책으로 한명만 낳기 운동을 하므로 인해서 가족의 희망을 잃어버리 부모들의 통곡이 우리의 마음을 찡하게 만듭니다. 학자들은 지진 발생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중국이 인공적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큰 댐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저장된 어마 어마한 물의 무게가 지층에 충격을 주어서 지층이 흔들렸다고 합니다. 지진지역에는 무려 6,000여개의 댐이 있답니다. 이중에 800여개가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더욱 큰 문제는 중국의 핵무기의 연구의 중심기지가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 방사능 유출에 대해 더욱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굳게 믿었던 그 핵무기 시설 때문에 자기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지식과 과학, 문명의 발달이 도리어 인간을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들도 주님과 함께한 성공을 꿈꾸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면 힘 있게 높이 날아봅시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마음의 시각으로 살아야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보이는 시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시각의 차이를 뛰어 넘는 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첫 째 어려움이 돌이여 가장 큰 은혜라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앞에 놓고 변론을 벌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약 40세 된 사람입니다. 과거도 현재도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막막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정도는 아니자나요! 그러기에 힘을 냅시다. 모든 것이 절망 속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의 원인을 예수님의 제자들은 총체적으로 죄로 단정을 지웁니다. 누구의 죄인가? 자기 혹은 부모의 죄인가?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남의 문제를 가지고 쉽게 평가 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소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다고 하십니다. 물론 죄 때문에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남의 불행에 대해서 평가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인과응보 적으로만 사건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으로 무섭게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봐요 기도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죠. 교회에 빠지니까? 사업에 문제가 있죠?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시니까? 자녀들에게 그런 어려움이 오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 어떠한 문제를 만난다 해도 그것을 통해서 선으로 이끄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인과응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 눈으로 보이는 것 만 질 수 있는 물질, 건강, 성공은 이런 것들만 하나님의 축복이라 단정합니다. 그런데 물질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도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성공했기 때문에 더 많은 죄를 짓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당한 고난이 우리의 이성과 상식 그리고 경험으로 설명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섭리로만 이해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면 언제나 과거를 통하여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내가 혹시 무슨 잘못은 안했는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은 아닌가? 분명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미래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의 고난과 문재 앞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창조적인 기회를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의 아픔이 미래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회가 된다는 말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시각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 할 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시각 장애라는 문제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 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어려움과 역경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바라보는 차이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2.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예수님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 9:13-3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이 소경의 눈 뜨게 한 것에 대해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시야를 소경을 고칙것에 두지 않고 율법이라는 안식일에 두고 맙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힘듭니까?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엉뚱한 곳에 시간과 힘을 소비하고 있을 때가 제일 고통스럽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쳤기에 이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말을 합니다.(16절)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에 도리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논리입니다. 논리학에서 사람에 대한 오류가 있습니다. 논리학은 내가 좋아 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한 말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분석을 합니다. 그리고 비판을 합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반박을 하는 단계 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실의 진위를 따져 보지도 않고 평가를 합니다. 지금 한국은 미국의 쇠고기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한국에 있었을 때 청년이었던 자매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그 내용이 미국에서 미친 소를 보낸다는 내용 이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온통 미친 소 광우병에 몸살을 알고 있습니다. 마치 미국 산 쇠고기를 먹으면 자동적으로 광우병이 걸린다고 말을 합니다. 이 일은 정치적인 논리와 분위기로 쏠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분위기에 모든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시가지로 나와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분명 문제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싫으면 반대를 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객과 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그들과 협상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도 이러한 사람에 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싫으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사역을 부정적이고 잘못으로 단정하고 비판을 합니다. 예수님이 행한 기적을 인정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민 교회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SF Korea의 종교 란을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비판을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들은 무조건 싫어합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좋은 일들은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흠이 있으면 그것을 확대하여 보도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생존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바르게 행동으로 본을 보여 주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 중심적인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25절에 보면 이렇게 소경이 말을 합니다.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 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복잡한 이론과 논리로 예수님의 기적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고침 받은 소경의 논리는 매우 단순 합니다.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본다. 는 말입니다. \"ONCE I WAS BLIND, NOW I SEE” 내가 이전에는 죄인이었으나 지금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일로 비난과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러나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맹인이었던 내가 지금 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안식을 범했는지 안 범했는지 율법이 어겼는지 남이 뭐라고 해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은 예수님 때문에 눈을 떠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경의 관점은 자신을 고쳐준 주님의 은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만 생각합니다. 자신에게 베푼 예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신앙은 단순합니다. 복잡하게 이끌어 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체험한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Issac Newton(아이작 뉴턴)은 유명한 물리학자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이 죽기 직전에는 정신이 오락가락했습니다. 자기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옆에 있는 제자들이 너무나 기가차서 “선생님 지금 아는 것이 무엇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뉴턴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것 2가지,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는 사실,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아네.”라고 말을 했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소경은 육신의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즉 영적인 소경에서 벗어나 참 빛 되신 예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의 어두운 눈에 빛 되신 주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어떠한 시간을 가지고 살고 있느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보는 시각의 차이를 뛰어넘어 은혜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이 도리어 주님을 만나 은혜를 체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두 번째 환경을 뛰어 넘어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즉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은 은혜 중심적인 시각입니다. 예수님 주신 시각으로 긍정적으로 미래를 향하여 전진하는 시각이 되었으면 합니다. 항상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고 찬송하며 살았으면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