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강해[2] -1

베드로전서 ② - 1


제 목 : 벧전1:3-12(A)
본문 1:3-12 고난을 어떻게 이기십니까?
베드로전서는 당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
에게 권면하기 위해 쓰여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하고,
기도만 하면 고통과 어려움 해결된다기에 기도를 하지만
막상 신앙생활을 잘 하면 잘할 수록 오히려 \'고난\'이 뒤따라 옴을 경험하게 됩니
다.
안 믿으면 \'고난\'이라는 것이 없을 텐데,
오히려 믿기 때문에 \'고난\'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마치 혹을 뗄려다가 혹을 붙힌 꼴이 된 것이 신앙생활같아 당황을 하게 됩니다.
세상만사의 어려움은 둘 째치고
오히려 고난에 비하면 세상만사의 어려움은 아무 것도 아님을 경험할 때도 종종
있음을 봅니다.
성도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니깐 만사형통합니까?
기도만 하면 다 해결됩니까?
\'.....\'
안 그렇죠?
오히려 세상임금인 마귀가 더 못 살게 만들지 안습니까?
잘 믿으면 믿을 수록 점점 꼬이는 것 같더라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믿음\'을 갖습니
다.
또 \'예방\'하고자 믿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삶의 무거운 멍에를 벗어 던지기 위해 예수님을 믿지만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멍에가 없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가 더\' 있더라는 말입
니다.
무슨 연고입니까?
멍에가 둘이라니?
멍에가 둘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겁니다.
1) 무거운 자기의 멍에는 벗어 던지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짊어지면 되는데...
미처 자기의 무거운 멍에를 벗어 던지지를 못하고 (자기는 벗어 버렸다고 하
지만...)
주님의 멍에를 짊어지니 둘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멍에는 가벼운 것이지만, 자기의 멍에를 벗어 버리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님 안에서 자유와 기쁨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주님의 멍에가 부담으로, 고통으로 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어설프게 하면, 주님의 멍에도 \'무거운 멍에\'가 되어 버리
는 것입니다.
안그렇습니까?
이런 경험을 해 보신 경험이 없습니까?
예수 안에서 자유를 못보고, 신앙의 맛을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 한다는 그 사
실 자체가
얼마나 고통이 되는 줄을 잘 아실 것입니다.
더구나 재직이 되어서도 예수 안에서 \'자기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는 기쁨
을 체험하지
못하면서\' 교회에 출입하면 그 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더 없을 것입니다.
2) 그래서 주님의 멍에를 짊어지기 위해
확실히 자기의 무거운 멍에를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멍에를 짊어 질 수 있는 것이죠.
3) 그런데 \'자기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
이것을 구별해 낼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소개하면,
\'고난\'을 당하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즉 고난을 당할 때,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보면,
그가 자기의 멍에를 버렸는지 안 버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멍에를 벗어 버린자는 \'고난\'을 잘 견뎌 냅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더 나아가 고난을 기뻐합니다.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지 못한 사람은 어떤 반응을 할까요?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처럼 기뻐할 지 모르지만, 금
방 마라의 쓴물 앞에 넘어집니다.
자기 생활이 조금만 불편하면, 손해를 보면 금방 원망합니다.

자기의 무거운 멍에를 벗어 던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하나님을 위해 살기 보다는 자기의 유익을 위
해 삽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십니다.
기도도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봉사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 합니다.
잘 하다가도 \'갓길 운행\'합니다(삼천포를 쓰면 안됨).
4) 세상 살이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다, 확실히 버려야(=주님께 맡겨야)\',
그 때부터 신앙생활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세상과 주님을 둘 다 잡으려는 것은 \'욕심\'입니다.
욕심을 가지고는 결코 \'고난\'을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고, 이길 수도 없는 것
입니다.
안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고난을 이길 수 있는지를 베드로의 권면을 통해 구체적
으로 배우보도록
하겠습니다.
1. 과거를 보십시오 -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십시오.
2. 미래를 보십시오 -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십시오.
3. 현실을 보십시오 - 영광가운데 고난을 직시하십시오.
1. 과거를 보십시오 -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내가 누구입니까?\'
3절을 읽어 보십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
게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가 누구입니까?
거듭 난자가 아닙니까?
그것도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나게 한 자가 아닙
니까?
우리가 고난을 이기는데 있어서 나의 \'정체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
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고난을 당하는 그 시점\'에서 생각해
낸다는 것은 이미 고난을 이길 준비가 다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냥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 누구이신 것을 밝히 십니다.
예를 들면,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니라\"
\"너희 조상을 애굽에서 구원해 낸 나 여호와이니라\" 등등...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과 백성과의 언약 관계를 분명히 하시기 위하심입니다.
시23편의 \'선한 목자\'에 관한 말씀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바로 나의 목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1절이 분명할 때 2-6절의 축복이 나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거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아픈 부위를 수술하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치료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면,
성도 스스로 충분히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화신이 있기에 과거의 구원의 문제
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분명할 때, 거기에 위로가 있고 새 힘이 솟는 것입니다.
히12장처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실 때, 과거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을 생각하고 묵상하십시요.
그리고 산소망을 다시 가지십시요.
2. 미래를 보십시오 -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십시오.
5과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
구원이 단지 천국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산 소망을 갖게 한다는 점은
당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매우 유익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의 아픈 부위를 수술하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곳에서부터 치료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면,
성도 스스로 충분히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화신이 있기에 과거의 구원의 문제
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분명할 때, 거기에 위로가 있고 새 힘이 솟는 것입니다.
히12장처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실 때, 과거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을 생각하고 묵상하십시요.
그리고 산소망을 다시 가지십시요.
2. 미래를 보십시오 - 주님의 재림을 바라보십시오.
5과 7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왜 재림을 바라봅니까?
첫째는 산소망을 완성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을 가지셨다면, 산 소망의 완성을 가져다 줄 재림을 사모합니다.
즉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에서 적금을 부어도 적금 탈 날을 기다리는데,
군입대를 하면 제대를 사모하는데, 건축시추를 했으면 완성을 사모하는 것이 당
연한 것 아닙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의 완성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
니다.
산 소망을 가진 사람이 재림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
니다.
재림을 생각지 않고는 결코 \'고난\'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재림을 바라보는 둘째의 이유도 됩니다.
재림이 있다는 사실은 \'고난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보다 큰 위로를 주는 것이 없죠.
안 그렇습니까?
\'주택부금을 올해만 부면 끝이다!....\' 얼마나 신납니까?
8단지의 교회가 올라가고 있기에 상가의 불편을 참는 것 아닙니까?
산소망의 완성, 즉 구원의 완성과 고난의 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재림\'이기에 우
리가 사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재림을 생각하지 않는 성도는 고난을 일시적으로는 넘길지는 몰라도
신앙생활한다는 사실이 힘이 들고 지치기가 쉽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사모하십시요.

그럴 때 현실을 살아 가는 능력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현실을 보십시오 - 영광가운데 고난을 직시하십시오.
우리가 과거에 구원받은 것과 미래에 구원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는 것은
현재 오늘의 삶을 살아 가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합니다.
베드로의 고난을 이기는 지혜는 놀랍기만 합니다.
베드로는 고난을 이기는 방법을 결코 현실과 괴리시키지 않습니다.
대체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주로 기도\'입니다.
저도 어려울 때, 주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 \'기도뿐\'이냐는 것이죠.
대체로 삶과 괴리된 채, 기도만 할려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기에 마귀가 일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움만 당하게 하면,
삶과 괴리되고 사람과 단절되고 기도만하니 언제 세상을 변화시킵니까?
베드로의 고난을 이기는 방법에는 결코 \'삶\'이 괴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고, 2:11절이하에는 사회생활, 가정생활들을 말씀에 입각
해서 잘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의 삶과 괴리되지 않은 채 고난을 이기는 것이 신앙의 지혜가 아니겠습니
까?
구원 받았다는 사실과 구원의 완성을 바라는 사람들은,
고난에 대해서도 올바른 생각을 합니다.
1) 고난과 동시에 영광을 생각합니다.
고난과 영광의 등식은 1:10-12절에 의하면,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발견한 진리
요,
예수님이 고난 받으신 후에 영광을 얻으셨음으로 증명된 것이요,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도 이것을 깨달아 당시 성도에게 전한 진리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들은 진리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바울도 롬8장에서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
다고 했고\"
데살로니가 후서 1장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들어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을 공의
의 하나님이 반드시 영광으로 갚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광속에서 고난을 바라볼 때, 비로소 고난을 이기게 됩니다.
1) 영광을 보기 전에는 고난 앞에 근심을 길게 했는데,
이제는 7절처럼 \'잠간\'하게 됩니다. 왜 내가 길게 근심했는가?......
2) 그뿐이 아닙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요,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크게 기뻐한다는 말은 \'미래형\'이 아닙니다. 현재형입니다.
고난 당하는 지금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고난을 다 당하고 난 후 생각해 보니 기뻐한다는 것이 아니라.
(팔 한 쪽이 다치면, 그래도 한 쪽은 안 다쳤는데...하면서 위안 속에 기뻐하
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중에\' 크게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바울도 롬5장에서 \'환난 중에\'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기뻐하는 시간이 언제 어느 순간에 기뻐하느냐에 따라,
신앙의 성숙도를 측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난을 당하자마자..... \"크게 기뻐한다\"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니까?
왜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까?
7절을 읽어 보십시다.
1) 고난을 이제는 고통이 아니라 \'믿음을 연단하는 불\'로 보기 때문입니다.
2) 더구나 재림시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자연스럽게 얻게 하기 때
문입니다.
고난을 단지 인내하고 참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속에 영광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훈련의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놓치면 또 맞아야 합니
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8절처럼,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
로 기뻐하십니까?
바로 지금? \'.....\'
바로 그 예수님도 고난을 통과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
3절 처음에 베드로가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선포하고 있는
그 마음을 이해하십니까?
어쩌면 처음 편지를 읽는 청중들은
\'베드로는 우리의 정황\'을 너무 모르는 사람이구나로 이해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다 들은 지금,
당시 청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의 마음은 \'산 소망\'으로 벅차올랐을 것입니다.
두 주먹을 꽉 지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산 소망의 완성을 사모했을 것입니다.
산소망의 실체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
했을 것입니다.
고난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지금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확신과 위로와 찬송이 넘쳐났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에 대한 베드로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도록 하십시다.
고난에 대한 베드로의 시각이 우리의 시각이 되도록 하십시다.
나의 정체성을 올바로 가집시다.
산소망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사모합시다.
고난을 올바로 직시하고 삶 가운데서 크게 기뻐하도록 하십시다.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할 수 있는 우리가 됩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