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가애 [3]


베드로전서 ③





제 목 : 벧전1:13-25
본문 1:13-25 재림을 사모하는 가운데 사십시오
베드로의 편지에 당시 청중들은 숨을 쉴 겨를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따스한 위로로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 베드로는 계속
해서 성도들을 몰아 부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가지고 있는 \'산소망\'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 말고
산소망에 걸맞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권면도 매우 강합니다.
베드로의 부드러운 면보다는 굉장히 강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게하는 장면들입
니다.
그럼 베드로가 당시 피해를 받고 있고,
장차 올 고난을 앞두고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권면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
습니다.
본문에는 4개의 주동사가 있습니다.
13절의 - 소망하다, \'엘피조\'의 제1 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
15절의 - 되다. \'기노마이\'의 제1 부정과거 수동태 명령법 강조
17절의 - 지내라. \'아나스트레포\'의 제2 부정과거 수동태 명령법
22절의 - 사랑하라. \'\'아가페\'의 제1 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
이 4개의 주동사들은 모두 \'부정과거\'로 쓰여져 있습니다.
대체로 \'부정과거\'란 과거에 단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을 가리킬 때 쓰는 용법입니
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재림을 사모하는 자들의 삶\'을 다루면서 \'부정과거\'를
사용했다는 것이 매우 특이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현재형\'으로 쓰면 이해가 쉬운데, 모두 \'부정과거\'형으로 쓰여졌기
에 우리는 \'부정과거\' 용법에 대해 다시 연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자료들을 찾다가 매우 유익한 자료를 찾게 되었습니다.
에드문드 p. 클라우니의 주석인데 그는 그의 베드로주석에서,
\'온전히 바랄지어다\'를 설명하면서
\'단순과거 명령법은 특별한 행동 혹은 현재명령의 진행되는 행동에서 특별한 행
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묘사하고, 현재형은 일반적인 윤리적 명령에 일반적으로
쓰인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명확하고 단호한 행동성을 암시할 때\' 이런 명령법을 쓴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상당히 의도적으로 \'부정과거\'를 사용했고,
\'부정과거\'를 쓴 이면에는 베드로의 강한 권면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평범한 권면으로 받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바짝차리고 마음을 모으고 \'이 권면\'을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심정을 지금 베드로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새로운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습니다.
당시 성도들이 명확하고 단호한 행동성을 요구하는 단어로 받아 들였다면,
우리도 이런 태도를 남달리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위의 4가지 주동사에서 13절에 나오는 \'사모하라\'는 명령은
나머지 3가지의 주동사를 내포하고 있기에
우리는 13절을 중심으로 본문을 보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13절은 앞의 3-12절과 \'그러므로\'로 연결되어 있기에
13절을 앞의 구절과 연관해서 설명하고 14절이하의 말씀의 서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겠습니다.
자, 그러면 13절을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
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여기서 \'바라다\'는 3절의 \'소망\'과 같은 단어입니다.
베드로는 앞에 나온 \'산소망\'을 소유하게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 그 소망(의 완성)을 사모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소망하라고 합니까?
바로 \'고난을 이기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왜그렇습니까?
바로 그 주님 안에 모든 \'산소망\'과 \'기업\'과 \'구원의 완성\'이 다 들어 있기에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cf) 믿음에도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소망의 대상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베드로는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하되 어떤 자세로 소망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1)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 마음의 무장(출12:11)
2) 근신하여 - 14절의 사욕과 같은데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3) 온전히 - 끝까지
위의 세가지 단어는 모두 재림에 대한 \'집중\'과 \'긴박감\'이 감도는 단어들입니다.
느슨하게 있다가는, 정신을 놓고 세상에 빠져 있다가는 홀연히 오시는 주님 앞에
대책이 없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간 기억할 것은 \'산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산소망\'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 누가 뭐라해도 이 시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주님의 명령인 것입니다.
\"산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재림을 사모한다\"
우리 동기 중에 한 지체는 자신의 삶 가운데 재림을 사모함이 적은 것을 보고
위기 의식을 느꼈다고 고백하면서,
자기는 이 위기 의식을 넘기기 위해 힘쓰고 애썼는데,
그 결과 자기의 마음 중심에서부터 재림에 대한 사모가 넘쳐났다고 간증을 했습
니다.
그 분이 애쓴방법을 소개하면,
그 분은 식기도 시간에, 아침과 저녁 잠자리에, 그리고 날씨가 천둥과 번개가 칠
때 밖에 나가 하늘을 보고 기도하기를 3개월 했더니 드디어 재림에 대한 소망이
마음 중심에서부터 넘쳐났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결단이요 행동입니까?
동역자 여러분 재림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1)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있습니까?
2) 근신합니까?
3) 온전히 끝까지 사모합니까?
이 시간 14절 이하의 말씀을 듣기 전에 무엇보다도
이런 마음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13절의 마음 가짐이 없다면 14절이하의 말씀에 \'순종\'할 능력이 없게 됩
니다.
저의 동기중 박형철목사님은 \'바로 들어야 바로 산다\'는 책에서
바로 우리가 말씀을 듣는 마음 가짐이 어떠해야 함을 강조푠 두려움(=경외)으로 지내라
22-25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위의 3가지 동사들은 모두 \'부정과거\'로 쓰여 졌다고 했습니다.
명확하고 단호한 행동성을 요구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1. 거룩한 자가 되라(14-16절)
\'되라\'가 부정과거로 쓰여졌기에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이 어떻게 이해해야 한다
고 봅니까?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보다는 \'거룩한 자가 마땅히 되라\'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명령은 \'당위성\'이 있는 명령입니다.
그럼 왜 우리가 거룩해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5,16절을 볼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거룩\'하시기에 거룩해야 함을 알 수 있
습니다.
14-25절에 나타난 하나님은 \'삶의 기준\'으로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과 비교하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면 그 누구도 교만할 수 없고
오히려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되라\'가 수동태로 쓰여졌기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 것을 믿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거룩에 대한 삶과 기대가 없습니다.
엡1:4절을 보십시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이 하시려고\"
하나님 선택의 목적만이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도
\'거룩\'입니다.
?22절을 봅?이제는 굼 셈 좇슘 말믿아 과 비교하면 \'현대판 바리새인\'이 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면 그 누구도 교만할 수 없고
오히려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거룩의 기준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되라\'가 수동태로 쓰여졌기에,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실 것을 믿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으면 거룩에 대한 삶과 기대가 없습니다.
엡1:4절을 보십시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이 하시려고\"
하나님 선택의 목적만이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도
\'거룩\'입니다.
?22절을 봅?이제는 굼 셈 좇슘 말믿아 회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
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서 세우고자 하셨으니\"
아애 주 앞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지를 살펴봅시다.
유 24절입니다.
\"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하나님...\"
\'거룩\'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도 \'거룩\'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모습은 \'거룩\'한 모습으로 설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거룩한 자가 되라\'라는 말씀 앞에 무엇보다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반드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번에 \'인사\'의 내용을 강해하면서
우리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정체성\'을 심어 줘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정체성을 본문에서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는 \'너희\'라는 말씀이 열 댓번 나오고 있는데.
\'너희\'라는 말이 크게 두 가지로 쓰여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정체성, being\'과 \'그들의 삶, doing\'으로 나뉘어져 쓰여졌다는 것입니
다.
그러니깐 베드로는 being과 doing의 시각에서 지금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는 말입니다.
그럼 베드로는 거룩한 자가 되라는 명령을 하면서 어떤 being을 요구하고 있습
니까?
14절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여기서 \'처럼\'은 \'답게\'로 번역해야 합
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녀다움은 \'순종\'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
을 봅니다.
\'나\'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무엇보다도 우리는 깊게 묵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정체성, 자기 신분\'으로부터 거룩한 자가 되라는 베드로의 권면이 큰 은혜
가 됩니다.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4절과 15절을 볼 때, 소극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을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는 결코 간과되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는 것들입니다.
무엇보다도 거룩한 삶은 끊임없는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부인이 될 때(본문에서는 사욕을 본 삼지 말고..) \'모든 행실\'에서 거룩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부인만 있어도 안되고 거룩하게 살려고만 해서도 안됩니다.
둘다 동시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부인만 하면 삶과 괴리가 되고, 거룩한 삶만 추구하면 사상누각이 될 수 밖
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시각이 있습니다.
\'모든 행실\'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2:13절 이하에 나오는 삶 속에서의 순종을 총괄하는 단어인데,
거룩이 \'순종\'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거룩한 자가 되는 삶에는 \'사욕을 본 삼지 않는 것\'과 \'모든 영역에서 순종\'이 있
다는 말씀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비록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실거지만,
오늘 우리 모두가 \'힘을 다하여 수고\'해야 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삶과 괴리된 거룩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거룩이요,
삶을 잃어 버리지 않은 거룩은 예수님의 거룩이요, 바로 베드로의 권면인 것입니
다.
삶과 괴리된 거룩은 스스로 자멸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현재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삶을 상실한채 거룩한 삶\'을 살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삶을 잃어 버린 종교는 더 이상 생명이 없는 무익한 종교일 뿐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는 무서운
누룩인 것입니다.
동역자여러분
교회가 세상에 나타난 그림자, 뒷모습은 어떠 합니까?
동역자 여러분의 그림자는 어떻습니까?
앞면의 모습과 같이 거룩합니까?
우리는 삶을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때의 사욕을 짝 사랑해서도 안됩니다.
2.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경외)으로 지내라(17-21)
\'지내라\' 역시 마땅히 지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이란 경외감이죠.
경외함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섬기는 태도입니다.
아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본문에서 제시되어 있다고 했는데,
경외함으로 지내라 역시 하나님을 생각할 때 살 수 있고,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생각한다면 의당 마땅히 두려움으로 지
낼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보고 \'두려움을 지낸다\'고 알 수 있습니까?
경외함 속에는 대체로 두 가지가 내포되어 있는데,
친밀감과 죄를 미워함입니다.
친밀감과 죄를 미워함이 동시에 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동역자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감을 갖고 있습니까?
경건의 시간이야말로 좋은 방법이죠.
친밀감을 쌓아 가는데 있어서 \'하나님 말씀\'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1:10절에 나타난 선지자들처럼 연구하고 또 연구할 때 친밀감은 쌓아지고 유지
된다고 봅니다.
친밀감을 갖는 것이 왜 중요하냐면,
친밀감 없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고 인도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친밀감없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치 사막을 걷는 인생과 같을 것입니다.
친밀감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지\', 나에 대한 정체성을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친밀감이 상실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친밀감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죄\'입니다.
죄는 친밀감을 파괴하는 무서운 적입니다.
죄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죄에 대한 나의 태도에 정비례하여 경외함을 평가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밀감이 클 수록 죄를 대하는 태도가 분명합니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운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17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외모로 사람을 보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마땅히 두려움으로 지낼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를
18,19절에서 당시 청중의 being의 입장에서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너희가 누구냐?
너희가 구속된 것(부정과거)이무엇으로 된 것이냐?
바로 없어질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니고 보배로운 주님의 피로 된 것이 아니
냐!
자기 정체성을 심어 줌으로 베드로는
나그네로서의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보배로운 피로 구속 받았음을 볼 때,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은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보배로운 피!...\'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창세 전 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되시고, 이 말세에 너희에게 나타나시고,
너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이 아닌가?
바로 그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너희가 구속함을 받은 것이 아니
냐!
구속받았다면 \'두려움으로 지내는 것\'은 당연하다는 권면입니다.
\'경외함\'은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친밀감을 회복시켜 나가고
친밀감을 상실하게 하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태도는 우리의 근본인 것
입니다.
그래도 친밀감을 쌓아가는 것은 그나마 좀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나 죄와 싸우는 우리의 태도에서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상당히 무시함을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한다는 것은 \'친밀감\'을 무시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친밀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친밀감이 있는 사람은 그 친밀감을 파괴하는 행동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회개에 있어서도 도덕적으로 자신이 잘못한 것에만 기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까지 회개해야 하면, 친밀감을 상실하고 무시한 것까지 회개해야 그
것이 바른 회개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친밀감을 상실할 것까지 회개를 하지 않기에 또 계속해서 쉽게 죄의 종이 된다
는 것입니다.
싸운 것만 회개할 것이 아니라
싸움으로 같이 화목하지 못한 것과
그 기간 하나님과 친밀감을 상실한 것까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3.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22-25)
여기서도 역시 \'마땋히\'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람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차 사랑하라\'는 태도입니다.
그것도 순전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뜨겁게라는 말은 13절의 온전히 바랄지어다에서 \'온전히\'가 끝까지 라는 의미가
내표되어 있듯이
뜨겁게라는 말에도 \'끝까지\'가 내포되어 있는 말입니다.
즉 열정과 끝까지가 둘 다 있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모습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입
니다.
순전한 마음없이 섬기다가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기억하면서 이것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요13장에 주님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그 성품을 묵
상하면서 이 글을 기록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베드로의 마음 속에 수 많은 \'상\'들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17-21절의 구조와 같이 명령을 하고 그 원인을 말씀하고 있는데,
왜 피차 사랑할 수 밖에 없는가의 이유를 베드로는
23절에 너희가 \"\'썩지 않을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았는가?\"에 두고 있습니다.
20-21절에서는 예수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24-25절에서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거듭나게 한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한 것이기에 \'피차 사랑하라\'는 말도 불변한 진리인 것
이다.\"
그런데
왜 오늘날에 \'순전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울까?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되고 거짓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
게 되었는데
왜 피차 사랑하기가 어려운가?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무엇보다도,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순종하려는 노력이 없기에 이런 일이
발생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대체로 보면 사랑을 잘 하는 사람들은 \'기도\'가 있음을 봅니다.
기도가 사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움직입니다.
사랑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의 공통분모는 \'중보기도\'를 하지 않고 사랑하려고 했
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섬기고 있는 청년부에서는 flowing을 매달 오래 전부터 하고 있는데
최근 한 자매의 건의로 flowing을 하는데, 그냥 flowing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전에 flowing의 대상자를 뽑고 한 달동안 천사역할을 하다가 그가 필요하다
고 생각되는 것을 flowing하자고 했는데, 매우 유익하리라고 봅니다. 이번 달이
기대가 됩니다.
사랑하는데는 \'기도\'와 \'노력,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한 번 대상을 선정하고 그의 필요를 채우고자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실천해 보
시기 바랍니다. 나의 영혼이 신선해 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3가지의 입장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재림을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고, 나그네처럼 두려움으
로 지내야 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정체성, 거듭나고 구속받았다는 being을 근거로 doing을 명령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는 진리는
doing의 삶은 재림의 온전히 사모함과 자기 정체성과 정비례 한다는 사실입니다.
재림을 생각한 만큼 삶은 온전해 질 것입니다.
3달 동안 기도를 하시든지 무엇을 하시든지
우리의 마음에서 \'재림시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태도\'가 넘쳐나시길 바랍
니다.

* 설교요령 : 먼저 3 가지의 명령에 대해 설명하고
두 가지의 입장에서 순종의 당위성을 끌어 낸다.
1) 하나님은 순종의 기준이시다
2) 나의 being의 입장 - 구속받은 - 에서 출발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