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과 현대 목회

제목   영성과 현대목회/명사들의 간증-차영배 박사편 / 2
글쓴이 관리자 E-mail 번호 15
날짜 2008-11-07 조회수 4 추천수 0

성령 충만, 신학과 목회의 필수적 요소



기도할 때에 불같은 성령을 받을 것이다

그때부터 기쁨은 솟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내가 출석하는 남창교회는 내가 출생하던 해(1929)에 손양원목사님이 세우셨고, 손목사님이 순교하시던 해에 출석한 것이다. 미군이 철수한 후 6개월 만에 6·25 동란이 일어났다. 미군철수운동을 한 죄책에 사로잡혀 일주일간 금식했다. 교회 출석 후 처음 6개월간은 복음 곧 십자가의 도를 몰랐다. 정직하게 살면 되는 줄 알았고, 산상보훈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51년 1월경에 비로소 주 예수께서 날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게 되었다. 어느 시점인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기 직전에 요한복음 3장에 기록된 그대로 거듭난 것이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도 어디서 오는지 모를 정도로 성령의 은밀한 역사였다(요3:8). 거듭난 후 1년 만에 세례를 받았고, 같은 해(52년)에 모태신앙인이었던 처녀와 결혼했다.
그 후 1년 곧 53년에 부산 고려신학교에 입학하니, 김의환박사도 같은 신입생이었는데, 지금까지 절친한 친구로 사귀고 있다. 특히 박윤선박사님의 강의는 탁월했고, 이사장 한상동목사님의 신앙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했다. 53년 4월에 입학했는데, 9월학기로 바뀌는 바람에 약 5개월 가량 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 내 일생에 경험적 신앙의 큰 일이 일어났다. 7월 23일 오전 11시 즈음 기도 중에 불같은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날 오후 3시 즈음에는 속으로부터 기쁨이 솟아나는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 날 밤에 ‘아버지여!’ 하는 기도가 나오는데, 큰 음성으로 외치는 부르짖음이었다. 그 후 불붙는 기도는 계속되었고, 동리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리고 신학생이면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는데 동래군 칠암교회를 섬기다가 가까운 월내교회로 가야한다는 권고가 있어서 그곳으로 옮겼다. 개척교회였으므로 교회로부터는 아무런 사례비를 받지 아니했다. 마침 부산 고려신학교에 가까운 덕원중학교에서 수학을 야간에 가르칠 수 있게 되었는데, 주간교사와 같은 봉급을 받았다. 이로써 신학공부도 하고, 개척교회를 함께 섬길 수 있었다. 3년후 150평의 땅을 매입하여 교회당을 건축하고, 조그만한 사택도 지었다. 이웃 교회가 약간 돕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고향인 울산 온양면으로 가서 상속받은 땅을 팔아 모든 건축비를 지불했다. 이렇게 교회당을 건축하고 나서 교인들에게 교역자의 생활비를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나는 사임했다. 내가 힘을 다하여 교회를 건축했지만 교인들이 교역자를 섬길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사임함으로써 교역자를 섬기는 가르침을 단호하게 가르쳐서 자립하는 습관을 주고자 함이었다. 얼마 후에 울산 호계에 있는 나환자 성혜원교회를 시무하게 되었다. 손양원목사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목사의 따님인 손동희 양(지금은 권사)도 고신에서 함께 공부했다. 새벽기도를 인도하고자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면, 고약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각이 무디어졌다. 심방도 하면서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으면 문둥병 환자들과 함께 먹기도 했다. 여기에서 다시한번 손양원 목사님의 위대한 신앙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삶에서 희생하고 병자를 사랑하시던 그의 목회의 위대한 신앙철학 같은 것이었다.
그 때 나는 주일설교를 위해 하도례 선교사(고신교수)를 모셨는데, 나에게 강력하게 권고하기를 여기서 나와, 해외로 가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학생들에게 성적표를 주지 않아서 나는 내 공부의 성적을 몰랐었다. 아마도 하도례 교수는 내 성적을 보았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결국 나는 교회를 사임했다.
울산 성혜원교회를 사임한 후 부산 감천으로 옮겨 칼빈교회를 맡은 후 얼마 안 되었고, 고려신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양산교회를 맡았다. 옮기자마자 고신교단과 총신교단이 하나가 된 후 첫 강도사 시험에 합격했다. 62년에 합동교단의 목사가 된 후, 화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근삼박사의 추천으로 64년 말 12월에 네덜란드 캄펀에 있는 개혁신학대학원 박사과정을 밟게 되었다. 스파켄부르크/분스코턴 교회가 나의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송금해 주었다. 신학대학원이 있는 캄펀으로 갔는데, 영어를 모르는 어느 가정에 하숙하게 되어, 화란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밖에 없었고, 6개월 후에는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고, 약 1년 후에는 각 교회의 초청을 받아 화란어로 설교했다. 첫 해 여름 방학에 독일에서 목회하는 독일인 목사를 소개받았는데, 지금까지도 친분관계를 유지해 온 유드(Judt) 목사였다. 오번 도르프라는 농촌이지만,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산에서 텐트를 치고, 마음껏 기도하니 기운이 되살아나 힘이 넘쳤다. 실상 나는 네덜란드 유학시 기도를 할곳도 마땅찮고 기도할 틈도 없어서 곤혹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치 목마른 사슴처럼 성령의 목마름을 견디기 힘들던 때였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돌보심었다. 거기서 나는 성령의충만을 재차 받을 수가 있었다. 유드목사님은 자주 기도하는 곳으로 찾아왔다. 약 10일 후에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해마다 방학 때면, 독일로 가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지내니, 참으로 살 것 같았다. 박사시험에 합격한 후 71년에 귀국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네덜란드어과 주임교수로 일하면서, 서울 고려신학교(부산 고려신학교의 분교)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4년후 75년도에 서울분교가 폐교케 된 후, 76년에 사당동 총신대학교에서 나를 교수로 초빙하자, 곧 이에 응했다. 총신에서 19년 봉직하니, 만 65세로 은퇴하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80년도에 대부분의 교수가 떠나 합동신학교를 세웠을 떼, 학교를 지킨 것, 같은 해에 양지에 22만평의 학교 부지를 구입했고, 대지나 다름없는 13만평의 입지승인을 얻은 일, 문교부로부터 신학대학원 인가를 얻은 일을 위시해서 당시 합동신학 쪽으로 거의 다 가다시피 한 학교를 다시 회복시켰고 명실상부한 총회신학교를 세울 수가 있었다. 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라고 생각된다.
95년에 65세로 은퇴한 후, 97년 여름부터 99년 말까지 같은 합동교단의 지방신학교인 부산신학교의 책임자로 봉사했다. 때마침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로부터 총장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즉시 이에 응했다. 총신대 재직시 야간에 순장교단의 신학교에서 나에게서 배운 교단중진들이 나를 총장으로 추대(推戴)한 것이다! 2007년에 사임하고, 지금은 기독교 학술 연구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런 일이 한번 있었다. 서울서 설교초청을 받아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는데 나는 좀 더 빨리 가기 위해서 중앙선 쪽으로 차를 몰고 있었는데 웬 젊은이가 술이 만취되어 내 차의 뒤를 받아 추돌사고를 냈다. 나는 중앙선에서 멈춰야 하는데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면서 오른 쪽 인도위로 얹히게 되었다. 뒤에서는 계속 차가 오고 있었다. 그런데 추돌사고 하나 없이 차가 온전하게 인도위에 올려져 멈추게 되었던 것이다. 뒤쪽에 약간 흠집이 나긴 했지만 이상이 없었기 때문에 의연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설교를 끝나고 보니까 교통경찰들이 와서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경찰서까지 갔었는데 아무 혐의 없이 귀가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아무사고가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의 생명 연장의 섭리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에 대한 축복으로는 슬하에 큰딸 명숙(사위 최홍석 총신대 교수), 둘째딸 의숙(漢醫師, 사위 정재영 국어학박사, 대학 교수), 셋째 아들 재승(신학박사), 외손자 최영준, 정한돌샘, 외손녀 최수산, 정한결; 친손자 차산돌샘(미국 의과대학 재학 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