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의 마라의 엘림이여

우리 인생의 마라와 엘림이여!\"
성경: 출애굽기15:22-27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3단계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디에 처하여 있는지를 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환란가운데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계시지 않음을 믿고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성경을 따라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축복의 엘림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우리는 마라가 있는 광야에 있습니다.(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인도하십니다. 고센을 떠나 홍해를 건너 3일 길에 그들을 수르광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광야는 결코 좋은곳은 아닙니다.
출애굽의 감격 그리고 홍해의 위대한 기적 이 일련의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큰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만 곧 그들에게 닥쳐온 것은 목마름과 기근 그리고 거친 광야였습니다.
우리의 신앙과정도 어쩌면 이와 같습니다.
처음 믿을 때의 감격과 감동은 3일 만에 어느듯 도루묵이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수르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수르 광야는 주로 \'술(Shur)\' 광야로 불려지며(창16:7;20:1;25:18 삼상15:7;27:8),
때로 \'에담 광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민 33:8). 애굽의 동편 국경 지역의 광야를 가
리킵니다.
이곳까지 오는데 사흘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섭리 속에서 계속 3일 동안이나 건조한 사막 지역을 경유하여 남쪽으로 내려
갔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시내산에서 당신을 섬기도록 미리 예정
하여 인도하신 방향이기도 합니다(13:17, 18). 그러나 이 지역의 특성 때문에 마시기에 필요할 물을 얻지 못하였으며, 동물 가죽 등에 담아왔던 물은 고갈 상태에 이르렀고, 이어 서
서히 고통이 스며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 속에 이와같은 고통이 있습니까? 고진감래이라고 생각하면 감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에 고통 앞에 참고 견딘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참고 견디면 신앙이요 그렇지 못하면 불신임을 깨달았다고 하여도 사람이 견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라를 만났습니다.(23)
마라는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최초로 장막을 친 지역입니다(민 33:8). 이곳 지
명의 뜻은 \'쓰다\', \'괴롭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 지역의 물맛이 짜서 마실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명칭입니다. 이스라엘이 건넌 홍해의 남동쪽 약 75Km, 수에즈 만(Suez 灣)
으로부터 동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의 \'아인 하와라\'(Ain Hawarah)
로 추정됩니다. 당시 이곳의 물은 악취가 나고 맛이 짜서 마실 수 없었으므로, 아랍 사
람들은 \'이 물이 이 근방의 모든 지역에서 가장 나쁜 물이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Ro
binson).
문제는 어디든 있습니다. 광야에서 행운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랬는데 불행한 처지에 떨어진 것입니다. 설상가상이고 엎친데 겹친 격이지만 불행을 다해는 태도는 바로 인생의 전기를 새롭게 쓸 기회임을 알아야합니다.

하여간 이스라엘의 태도는 “원망”이었습니다.(24)
백성이...원망하여 가로되 - 이들의 원망 시점이 홍해 바다의 기적으로 인한 찬양
의 감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이었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이들은 홍해 사건을 체험한 큰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모세를 믿었던 3일 전
의 태도와는 달리 환경이 조금 변하여 갈증이 나고 육체가 피로해지자 곧 불평과 불만
을 터뜨렸던 것이다. 한편 \'원망\'을 뜻하는 히브리어 \'룬\'은 \'고집세다\',\'중얼거리다\', \'밤새워 머물다\' 등의 뜻을 지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밤을 세워가며 감정을 다해 불평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은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자손이 터뜨린 첫번째 원망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계속적인 능력을 경험하면서도 조그마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불평과 원망을 쉽게 터뜨리고마는 간교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슴을 봅니다.
우리라고 다를리 없습니다. 그러나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절망의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멸망시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뜻을 이룹니다.(25)

항상 같은 장소에서 같은 상황을 만나도 사람들의 반응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반응, 각가지 다른 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감사든 불평이든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지도자로서 모세는 백성들의 원망을 일축하여 꾸짖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해서 백성들과 같이 동조하여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그는 중재자로서 문제 해결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습니다.그렇다고 그만이 다른 환경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자리에 있었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를 수 없다고요 아닙니다. 이젠 달라질려고 해야 합니다.
다 죽일려고 하여도 살릴려고 하여야 합니다. 다 절망하여도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다 않된다고 하여도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고 하여야 합니다. 다 도망쳐도 함께 하여야 합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진리를 수호하고 믿음을 사수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려고 자신을 드리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왜 우리가 믿습니까? 그분이 그렇게 살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와 허물로 죽을 우리를 살리시려고 용서하셨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생명을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기도할 것입니다.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돌맞아 죽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생명을 내어 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망치는 비겁자가 아니라 현실의 난관에 절망하여 포기할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도전하시고 그리고 무릎의 사람이 된다면 그는 이 시대의 모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나무를 지시하여 그 나무를 꺽어 물에 던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그랬더나 그 물이 달아졌다고 하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25) 혹자는 시내 반도 부근에 자생하는 어떤 나무의 열매, 예를 들면 \'구르쿠드\'(Ghurkud)란 나무의 열매가 쓴 물을 달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Burckhardt). 그러나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소량 함유되어 있는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나무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로 사용됐을 뿐입니다. 왕하 2:19-22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영적으로 이 나무는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하늘 나라의 생명 나무를 예표합니다(계 22:2).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언제나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다고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모세처럼 기적을 만나고 그 기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적으로 모세도 이스라엘도 모두 동일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모든 환란은 하나님의 훈련이라고 생각해보십시다.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를 베푸십니다. 여기서는 아직 성문화된 율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각 상황속에서 하나님이 명하시는 준수 사항, 즉 따라야 할 말씀들을 의미합니다.
이 법도와 율례를 따라 “시험”하십니다. 이 부분은 어떤 구체적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셨다는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언제나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여 순종의 여부, 곧 신앙의 진위를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이 시험으로 인한 시련을 통하여 인내와 순종, 자기 부인의 힘을 기르도록 하십니다(약 1:2-4). 이 부분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법도와 율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여 그들로 하여금 인내와 순종과 믿음등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적절한 시험의 연단으로 인하여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적합한 군대로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는 자질을 구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엘림의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26,27)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경우일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산다는 것은 중요한 삶의 변수를 만들어 냅니다. 그 결과는 항상 역전의 드라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을 촉구합니다.
“너희가...규례를 지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
이며 순종에의 촉구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의 언어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 \'법도
와 율례\'는 그의 백성에게 \'계명과 규례\'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는 그의 백성들에게 의
(義)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육신적 편안함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법을 따라 사는 의로운 사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질병으
로부터의 보호 약속에 앞서 요구하신 이 요구는 곧 오늘 우리의 신앙의 표준이기도 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은 건강한 삶입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문자적으로 \'여호와\',와 \'너희의 치료자\'란 동격의
단어가 합성을 이뤄 만들어진 것으로, 직역하면 \'나 여호와는 너희의 치료자\'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절대자이신 동시에 우리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친근한
분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치료하는\'의 히브리어 \'라파\'는 \'의사\' 또는 \'의원\'을 가리킵니다. 곧 우리의 의원되시는 여호와는 실로 모든 질병으로 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과 죄 등 인생의 모든 문제점까지도 깨끗이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이십니다(마 9:12) 오늘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결코 병이 두렵지 않습니다.

복지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드디어 “엘림”에 도착합니다.(27)
“엘림”은 \'상수리 나무\' 또는 \'참나무\'란 뜻으로 수에즈 동남쪽 약 100Km, 마라 남쪽
10여Km 지점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오늘날의 \'와디 구룬델\'(Wadi Ghurundel)인 듯합니
다(West-minster Historical Atlas to the Bibble).
당시 \'엘림\'은 비가 자주 왔고 개울과 샘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특히 이곳은 물샘 12개와 종려 70주가 있었는데, 이는 완전수인 12와 70(7x10)이 상징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했습니다(Keil). 그리고 몇몇 학자는 물샘 12개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70장로를 각각 위한 것이고, 또한 상징하는 것으로 봅니다(Kurtz, Baumgarten). 따라서 이곳은 우연히 이스라엘이 도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섭리하심에 따라 인도된 곳이라 봅니다.
출애굽 후 애굽의 고센 땅 라암셋(21:37)->숙곳(12:37)->에담(13:20)->바알스본(14:2)->홍해(14:22)->수르 광야(15:22)->말(15:23)->엘림(15:27)으로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축복의 장소로 인도하심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를 의지하고 길을 가는 성도들의 삶에 예비된 축복의 장소를 마련하고 있슴을 믿어야할 것입니다. 마라를 지나야 엘림에 도착합니다. 실로 복지가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영국을 떠난 메이플라워호에 탄 청교도들이 만난 것은 풍랑입니다. 망망대해입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과 낯선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대륙을 만나 오늘의 번영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엘림에 도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