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한마디 그힘 그복
말 한마디, 그 힘 그 복”
성경: 마태복음 16:13-20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고백적인 믿음을 봅니다. 그는 흠과 티가 많았습니다. 그의 삶에 모순된 모습을 발견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는 실투성이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었기에 확실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그의 인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그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주님의 힘을 통하여 주어지는 복으로 충만한 일생을 살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와같은 말의 창조적인 능력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Ex Nihilo의 창조사건 생명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에게 일어난 것도 그렇습니다. 그의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의 삶은 그의 말 한마디로 인하여 전혀 다른 은총 사건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이름 위에 교회가 세워지고, 그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고, 천국 열쇠를 받았고, 풀고 매는 능력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입니까? 말 한마디 그 힘 그 복을 우리 모두가 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결코 말의 능력을 무시하거나 경시하지 맙시다. 간과하지 맙시다. 바른 말로 인하여 창조적인 축복을 누립시다. 말을 통한 생명 사건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에 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말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에는 고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이기도 합니다. 우리 동네를 구룡밭이라고 부르다가 성읍리로 부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모두들 성읍리라고 부릅니다. 성읍2리라고 부르면 민속마을의 부속동네 정도로 그 의미가 새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전자는 주전자, 자동차는 자동차, 비행기는 비행기로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나비는 나비, 황소는 황소, 이와같은 단어를 말하면 우리는 그 단어를 통하여 물체나 존재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는 말들은 그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는 발성이며 약속의 표현인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의미가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면에 다른 뜻이 혹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생각하고 그 의미를 새깁니다. 그러므로 혼동을 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른 의미로 바른 말을 사용하여야 바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결인들입니다. 거룩함으로 지어져 가기 위하여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는 거룩하여야 합니다. 거룩함의 의미를 들어내어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2. 말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말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말이 지향하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건설”이란 말은 무엇인가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파괴”는 부수는 것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모든 말에는 그 고유의 목적이 있어 그 말이 사용될 때는 목적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말을 하면 축복을 비는 것에 목적이 있습니다. 저주를 하면 저주의 목적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은 저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저주는 축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욕설은 저주입니다. 폭력입니다. 그 어떤 욕도 상대방을 축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욕을 하면서 축복한다는 것은 그 말의 목적이 아닙니다. 욕은 욕일뿐입니다. 욕을 하는 것은 욕을 많이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을 하는 것은 가슴에 한이 맺혔기 때문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욕을 하는 것은 결국 인격이 어긋났기 때문에 합니다. 욕을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깊은 사랑의 감정을 가진 경우는 없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악하게 표현할 뿐입니다. 욕은 욕으로서의 목적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비인격화하는 것이요 난타하는 것이요 절망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욕하지 않습니다. 격려합니다. 칭찬합니다. 인정합니다. 사랑의 표현으로 일관하게 될 것입니다. 욕을 먹으며 자란 아이가 욕 잘하는 아이가 됩니다. 욕을 먹으며 자란 아이는 폭력적인 아이로 변합니다. 욕보다 축복의 말로 자녀를 양육하고 이웃을 대하므로 참 그리스도인 다운 목적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만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욕은 그 어떤 경우에도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3. 말에는 품성이 있습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됨됨이가 있습니다. 인격적인 사람은 인격적인 말을 합니다. 비인격적인 사람은 비인격적인 말을 합니다. 상스러운 말은 그의 인격의 상스러움을 가르칩니다. 인격이 온전한 사람은 온전한 말만을 합니다.
말은 그 사람의 정도를 나타냅니다.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교육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추한 단어를 항용하는 사람은 추한 교육을 받았거나 모진 상처로 품성이 어긋난 사람일 것입니다.
폭력적인 말은 폭력을 만듭니다. 화평의 말은 평화를 만듭니다. 온유한 말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합니다. 고성을 지르거나 공격적인 언동을 서슴치않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냅니다. 폭언은 폭력입니다. 좋은 말은 항상 좋은 것입니다. 나쁜 말은 나쁜 것입니다. 좋은 말만 하면서 삽시다. 나쁜 말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과감하게 버립시다.
우리는 성결인입니다. 성결인은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은혜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성품은 성결하여져야 합니다. 성결한 성품은 성결한 말을 듣고 성결한 말을 하면서 성숙하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성령 세례받은 사람은 거룩한 사람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가 웨슬레가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인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사랑의 동심원을 그리면서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성품은 사랑의 말로 사랑의 환경을 만들고 사랑의 세상을 만들 때 가능합니다.
4. 말에는 인격이 있습니다.
말은 인격의 상징체계입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은 바로 그 사람이 온유함을 나타냅니다. 그렇습니다. 고상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고상한 언어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추한 인격을 가진 사람은 말에 조심성이 전혀 없습니다. 추한 말 더러운 말, 악한 말로, 지나친 농담과 음담패설로 분위기를 만드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 됨됨이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잠간은 재미 좋을런지 모르지만 듣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그는 부정적인 상황을, 비신앙적인 요소를 인박히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그의 인격이 어긋나 있기에 그 언어의 오만함과 오류를 깨닫지 못합니다.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불특정 다수를 모두 비신앙적인 언어의 유희로 몰고 들어가 그것을 함께 즐기게 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깨닫기를 바랍니다. 성령사역은 인격사역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인격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익하지 못한 언어가 성령의 나타남은 아닙니다. 입술의 표현은 바로 그 사람의 중심의 열매입니다. 인격이 어긋난 것이 성령의 역사는 아닙니다.
게다가 비인격적인 사람은 쉽게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즐깁니다.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습니다. 비인격적인 말들은 비수같아 오래토록 사람의 마음에 박혀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또 다른 사람의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이며 그 흠집은 곧 그 사람도 그렇게 되도록합니다. 그러기에 비인격인 용어를 듣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와같은 사람과 상종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려 사회악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모든 지도자들이 깨달아야할 것은 우리의 강단이 성소의 중심인 지성소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성소에서 들려지는 소리가 비인격적이어서는 않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격적인 표현으로 세상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여야할 것입니다.
성결은 바로 이 시대의 인격입니다. 온갖 추한 것이 난무하는 시대에 살지만 고상한 언어로 고상한 삶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루지 못하는 언어라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이사야 처럼 재단 숯불로 입술을 정화하여 새로운 믿음의 역사에 도전하고 이끌림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5. 말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언어는 생명입니다. 언어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축복의 말은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저주의 말은 저주를 가져다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축복의 말씀 앞에 그의 삶이 새롭게 되는 은총을 만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의 말씀을 듣고자 그토록 사모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생명을 거는 모험을 하였고 뜻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삶이 험난하였지만 그는 아버지 이삭의 그 축복의 말씀에 의지하여 일생을 살았기에 험한 세월 속에서도 위대한 미래를 설계하고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보십시오. 베드로의 한마디 고백은 그를 살립니다. 그리고 그를 세웁니다. 그는 역사에 남는 위대한 길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성경은 말 한마디가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삽니다. “입으로 주를 시인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주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생명의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입술이 귀중한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도는 바로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요, 듣는 이를 생명으로 초청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살고 듣는 이를 살립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의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고로 언어의 생명령은 바로 창조적인 능력입니다. 복음은 듣는 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역전되는 것은 복음적인 언어가 가진 생명력의 창조성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복음 증거의 삶으로 일상을 누리는 사람은 생명과 창조의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주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의 평가나 호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누구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의미를 부여하고 목적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은혜롭게 결단하여 우리의 중심을 표현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술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름을 분명히 인식하고 말 한마디에 신중성을 더하여 힘차게 “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므로 누려야할 지복과 천복을 마음껏 누려 영생의 은총을 누려야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