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본질적인 목적은 우리 죄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絿챨?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기업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용서는 우리에게 보석과 같이 매우 귀한 것입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화목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사단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갈등과 분쟁을 일으켜 상처와 고통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단은 많은 사람들에게 용서하지 못하게 하여 마음에 상처를 품고 살도록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스스로 불행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와 고통을 주는 독이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나 복잡하여 사람들은 예민해져 있고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안고 살아갈 때 정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많은 질병을 안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형제를 7번만 용서해도 굉장히 많이 용서해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놀랍게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완전한 용서, 무제한의 용서를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갚을 수 없을 액수를 빚졌습니다. 주인의 독촉이 있었지만 이 종은 사정해서 1만 달란트를 전부 탕감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 받은 이 종이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1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1만 달란트에 비하면 1백 달란트는 극히 적은 액수임에도 그의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갚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결국 그 주인은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다시 잡아들여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1만 달란트를 빚진 우리를 용서해주셨는데, 우리는 1백 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이웃의 허물을 용서해주지 못하면, 우리를 오히려 용서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요? 1.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단절하고 막히게 됩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누구를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과 더불어 장벽을 쌓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우리 마음속에 은혜는 소멸됩니다. 또한 그때는 사단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게 되고 더 큰 증오를 일으켜서 결국 서로가 원수가 되도록 합니다. 용서할 때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2. 봉사의 즐거움과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와 봉사하고 섬기지만 즐거움과 기쁨이 없고 마음속에서 점차 헌신과 봉사가 부담스러워집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습니다.(마5:22-24) 형제와 불화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와 더불어 불편한 관계에 있고 갈등 관계에 있는 자의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형제와 더불어 받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리면 찬송과 기도에 감동이 없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게 되고 우리 신앙생활은 점점 병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4. 대인관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기 쉽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더 심한 갈등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혼자서 설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대인관계에서 갈등 관계를 갖게 되면 점점 마음은 늘 불편하고 괴롭게 됩니다. 여러분, 용서하는 것이 천국이면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용서를 생활화하고 체질화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용서의 모범자가 누구입니까? 1. 예수님은 직접 용서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악한 무리들을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 군병과 함께 베드로를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면서 그 여인을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처럼 비난하고 공격하여 원망하고 돌을 던지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우리 형제들과 이웃들의 잘못을 관용하고 용서하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은 ‘화목케 하는 자’(마5:1)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보석 같은 인물입니다.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용서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사람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의 아들인 압살롬에게 왕권을 빼앗겼을 때 사울의 후손 시므이는 계속 다윗과 그 일행을 쫓아오면서 저주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조금도 시므이를 해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침묵하며 걸어갔습니다. 이에 아비새 장군이 답답해서 명령만 내리면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 저주를 묵묵히 받으며 묵묵히 길을 걸었습니다. 그 후에 압살롬이 죽고 다윗이 다시 왕권을 찾았을 때, 시므이가 다시 찾아와서 용서를 구할 때 그를 살려주었고, 또한 자신의 아들이지만 자신의 생명을 노렸던 압살롬의 죽음을 몹시 슬퍼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사울이 와서 잠시 용변을 보기 위해서 엔게디 황무지의 동굴에 들어갔을 때 그를 죽일 수 있은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옷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자신의 이 행동조차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을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원수인 사울이 죽었을 때에도 통곡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의 원수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원수를 통해서 자신에게 말씀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마음이 넓은 다윗을 축복하셨습니다. 3. 요셉은 용서의 사람이기에 모든 일에 형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아넘긴 사건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으로 용서를 구하러 왔을 때, 요셉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을 애굽에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과 이웃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중상모략 할 때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섭리는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는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고 비난과 고통 속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아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용서해줘야 합니다. 함께 싸우거나 다투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하는 곳에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화목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분쟁과 싸움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이제부터 서로 용서하고 서로 관용해서 예수님처럼, 다윗처럼,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