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 위에 지은집


21. 산상수훈
마태복음 7:21-24, 반석 위에 지은 집
 

마태복음 7:21-24, 반석 위에 지은 집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팔레스틴 지역은 여름이 건기이고 겨울이 우기입니다. 여름에는 작은 시냇가를 이루다가, 겨울에 큰 비가 내리고 갑자기 격류가 흘러갑니다. 요단강도 일반적으로 말라있어서 물가에 집들을 짓는데, 비가 올 때가 큰 문제가 됩니다. 이때 물가에 지은 견고하지 못한 집들은 쉽게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큰 피해를 입습니다.

 

우리는 모두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짓되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각자의 인격과 성품을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성품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의 성품을 자기가 지어가야만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똑 같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기본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산상설교는 마침내 경고의 형태를 띤 권면의 말씀으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윤리적인 가르침과 율법과 예언서 내용의 진정한 의미이자 완전한 구현으로서 의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았고, 그 가르침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켜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본문의 극단적인 대조적인 두 사람의 운명, 즉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종말론적인 분노의 폭풍을 피할수 있었던 지혜로운 사람과 그와는 정반대의 운명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에 의해 극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그러므로” 는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였으니 너희는 이 말을 들을 때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23절에 “그때에 내가 저희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7:21절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 “주여 주여”라고 부른 표현은,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지식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종교 형식과 예배의 형태도 익숙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사람에게는 신앙적인 상당한 체험도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 때문에 이 사람은 주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21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이 이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결핍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이 사람의 신앙 지식과 체험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가 참석했던 모든 종교 형태와 의식에 대한 충성이 의미 없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것이 참된 믿음에 기초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최후 심판의 날 주께서 이 사람을 향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실 수 밖에 없었고,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주의 말씀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심판의 날 주님 앞에 인정될 수 있는 삶과 신앙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요? 나는 주를 찾고 주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는데, 열심으로 종교형태와 예배에 참석하면서 나의 입술로 나의 주님을 신앙고백까지 했는데,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고 그 능력이 내게서 역사하는 것을 경험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다면 이것을 얼마나 비극입니까?

 

우리의 신앙이 무의미하고 헛된 것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참으로 지혜로운 인간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나누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날 우리 주님 앞에서 인정될 수 있는 그런 신앙의 삶을 살았다고 주님 앞에 말씀드릴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4절에 지혜로운 사람, 26절에 어리석은 사람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진짜와 가짜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구별하기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사람은 무신론자와 유신론자가 아니라, 신앙의 형태도 알고 의식에도 참여하고 ‘주여’라고 말할 수도 있는 그러한 사람들 중에 가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재료를 가지고 있고, 같은 설계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같은형태의 집을 지었습니다. 이 두 집이 완성되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차이를 이 두 집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25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창수는 우기에 나타나는 탁류로서 갑자기 불어나 넘쳐 흐르는 강물인데 팔레스틴의 특이한 기후 현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바람은 헬라어로 에네모스로서 광풍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주초’는 건물의 기둥 밑에 괴는 물건을 가리키는 단어인데,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이라고 되었습니다. 헬라어로 과거완료수동형입니다. 즉 과거의 어떤 시점보다 더 먼 과거에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는 행동이 어려움이 닥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전혀 없는 과거에 이미 완료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혜로운 다섯 처녀가 신랑이 오기 전에 기름을 준비한 것과 같은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운 행동입니다(마 25:1-3)

 

겉보기에 두 사람이 지은 집이 똑같으나 그 기초의 차이로 하나는 비바람에쉽게 무너지고 하나는 견고히 서 있게 된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그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완전한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구원론적 조건으로서의 행함의 중요성으로 결론을 내리면 안됩니다. 이 말씀은 행함에 의한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전제로 한 행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주 앞에 나와 ‘주여’라고 부른 그 믿음이 얼마만큼 참되 믿음입니까? 그것은행함에 의해서만 입증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전제로 한 행함의 중요성을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두가지 종류의 사람을 구별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과 행하는 사람인데, 전자의 사람은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듣고 행하는 믿음입니다. 거짓된 믿음은 듣고 행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행함을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그는 이 말씀을 듣고 행하기를 열망하며 또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교훈을 취하고, 이 말씀을 따라서 날마다의 걸음을 계속해서 옮겨가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은 비와 창수와 바람이 흔들 수가 없습니다. 그는 끝날까지 견고히 서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 담대히 설수 있을 것입니다.

 

두사람이 집을 짓는 기초가 되었던 반석과 모래는 무엇을 뜻합니까?

 

본문과 병행구절을 이루고 있는 누가복음 6:48의 말씀을 보면, 주의 말씀을듣고 행하는 사람을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쉽게 빨리 짓고 싶어합니다.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10년, 20년 뒤에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모양만 갖추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날 아침에 교회에 나가면 됩니다.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종교적인 모양과 형식을 갖추어 합니다. 주여 하는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궁극적으로 삶과 인격에 연결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생활에서 믿음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인격과 믿음을 분리하는 것처럼 커다란 비극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이 내 인격과 생활 속에 드러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기초가 견고하여 당신의 생활 속에도 반영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섣부르게 형태만 갖추어 놓은 신앙은 아닙니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그 집을 어떻게 지을까요?

파기 전에 생각하고, 얼마만큼 깊이 파야 할 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가올 비와 창수와 바람에 대비하여 기초를 쌓을 것입니다. 반석 위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주께서 이 두 사람과 두 집의 차이점을 이처럼 사실적이며 극적으로 묘사하신 까닭은 이 차이점이 영적 영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비교는 참된 기독교인과 거짓 기독교인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집을 세운 둔 건축자와 두 집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듯이 두 종류의 사람에게도 유사점이 있습니다.

 

우선 양자가 같은 장소에 같은 집을 지었습니다.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기독교인과 거짓 기독교인도 대체로 같은 영역에서 보게 됩니다. 같은 복음을 듣습니다. 동일한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죄에서 용서함을 구하고 자기의 죄가 용서된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그는 평안을 원합니다. 내적인 평안과 고요한 마음을 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의 울타리 안으로 찾아 옵니다. 인생은 외롭고 힘들고 모두 지쳐서 슬픔에 잠기기 쉽습니다. 이 세상은 위로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짓 신앙고백자도 영적 힘에 크게 관심을 가집니다. 사도행전 8장에있는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를 읽어봅시다. 이 사나이는 빌립이 기적을 행하는 것을 감명받았습니다. 그도 같은 유의 비슷한 일을 해왔지만 이렇게 쉽고 강한 힘으로는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을때 시몬은 탐심을 일으켜 이 능력을 소유하기 위해 돈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내놓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가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거짓신앙고백자는 자기가 안전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사를 행한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구원에 대해 안심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평안하며 종교에서 오는 위로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영력을 가지고 보다 나은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여 주여’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지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거짓된 내적 평안을 가질 가능성이 있음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거짓 평안, 거짓 위로, 거짓 인도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단도 놀랄만한 인도감을 줄 수 있습니다. 텔레파시와 기타 여러 종류의 신비적, 마술적 현상과 그 밖의 각종 작용도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많은 기사를 행할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가 멸망의 자식(요 17;12)이긴 했지만, 다른 열한 제자와의 사이에명백한 차이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급한 심성, 설계도나 설계명세서에 무관심한 이 심성, 집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좋은가를 안다고 생각하여 치달려가는 이 심성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가를 알 수 있기 위하여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의 최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기독교인의 생명과 구원에서 오는 이익이나 축복만을 얻는데 열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욱 깊고 보다 심원한 욕구를 갖고 있습니까?

인간의 육적 결과를 얻는데 열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알고 점차 주예수 그리스도를 닮을 것을 열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있습니까?

 

그럼, 거짓 신앙 고백자의 특색은 어떻습니까?

 

가짜 그리도인은 말씀을 자기 편리한 대로만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하나님은 받아들이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외우겠지만 그 구절중의 ‘멸망하지 않고’ 란 관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보다도 죄의 결과에 대한 굉장한 해설서이며 그 생생한 묘사입니다. 성경이 구약의 그 모든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한 사람인 다윗 같은 사람이 심한 죄에 빠져 간음과 살인을 범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명심시키고 또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이 정도까지 우리들을 당겨 넘어뜨리는 힘이 존재해 있고 우리들은 모두 나면서부터 거짓되고 더럽고 타락한 상태에 있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기독교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것은 행위에 의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상 설교를 듣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참된 기독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까?

 

팔복의 메시지는 사람으로서는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다만,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가 지금부터 죽을때까지 애를 써도 우리 자신을 심령이 가난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결코 팔복의 어느 하나에 일치시킬 수가 없습니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것 역시 사람의 힘으로는 전연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7:21은 행위에 의한 의인일 리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은 우리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우리들을 위해 이룩해 주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8:3).

 

야보고서 2: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라는 말씀의 교리와 같은 것입니다. 신앙은 실제적입니다.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주여 주여’ 라고 말한다 해도, 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고 자진해서 주님의 종이 되지 않는 한 무의미한 것입니다. 주님을 순종하지 않는 한 나의 말은 무익한 말이 되고 나는 진실로 주여 주여 라고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참 믿음은 언제나 그 사람의 생활에서 나타난다는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그의 전 인격에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두 집의 차이점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후에 시험의 시기가 다가왔을 때 분명해 집니다. 시험은 조만간 다가옵니다.

 

마 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모래 위에 세우진 집과 반석 위에 세워진 집, 이 두 집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심판의 날, 위기의 그 날이 찾아왔습니다.

 

보통 때는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같은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나갈때도 함께 나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 그 날입니다. 그때에 내 신앙은 어떻게 움직이며 반응하고 있습니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두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이것은 우리 인생의 역경을 의미합니다.

 

다이아몬드의 진짜를 구별하는 방법으로 수중감별법이 있습니다. 물속에 넣어보면, 인조 다이아몬드는 빛이 사라지고, 진짜는 그 물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고 합니다.

 

역경이 찾아올 때, 인생의 시련이 찾아올 때, 시험과 아픔과 질병이 찾아올때, 당신의 신앙은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누구나 가야 할 길, 그 길, 죽음에 직면할 때, 의사가 희망이 없다고 할때, 당신의 신앙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까요?

 

누가복음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험이 우리를 향해서 도전해 오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날, 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될 때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다 살고 마지막 거룩한 심판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그날, 주께서 우리를 인정하실까요?

 

그날 주께서 무엇보다도 믿음있는 사람과 믿음없는 사람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양과 염소를 기른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을 선포합니다.

 

여러분은 그 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분류될 수 있을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 믿음 안에서 삶을 살아온 자로 인정받을수 있을까요?

 

고린도후서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지만 그 믿음의 기초에서 어떤 행함으로 일생을 살아왔습니까?

 

산상설교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모든 자재는 똑같습니다. 우리는 똑 같은 말씀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무엇을 했느냐는 각자가 다를 것입니다.

 

본문은 참된 믿음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이 참된 믿음은 진정한 삶을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의의는 교회나 신조나 “선한 생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기초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를 시험하는 폭풍을 뚫고 지속해 감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임을 입

증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써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합니다. 그는 단순히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행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경고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도록 하옵소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