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감사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살후 2:16~17) 
   

 우리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20억 명 이상이 전기의 혜택 없이 살고 있으며, 지금 지구상에는 10억 명 이상이 아무 물이나 마시며 살고 있으며, 12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 천 원 이하로 생활하고 있으며, 8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없어서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더욱 감사할 이유는 체포, 협박, 학대, 고문,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 없이 교회에 나갈 수 있다면 이 세상의 30억의 사람들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며, 만일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몸에 옷이 걸쳐져 있다거나,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75%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부자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당신이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이 세상의 20억의 사람들보다 더 감사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창시자 마쓰시타 고노스께씨의 성공의 비결은 감사입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것과 배우지 못한 것과 허약한 것”이 감사의 조건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① 가난 속에 태어났기 때문에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②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학력 때문에 항상 배우는 자세로 살았습니다.
 ③ 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도 일찍 깨닫고 항상 건강을 지키기 위해 힘썼기 때문에 90이 넘은 이 나이에도 겨울철에 냉수마찰을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복이 넘치면 오히려 거룩을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 두 사람이 장미꽃 밭을 찾아가서 장미꽃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①한 친구가 장미꽃을 매만지다가 가시에 찔렸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그는 곧 불평을 합니다. <무슨 놈의 꽃이 가시뿐이람, 장미는 가시 때문에 틀렸단 말이야!> 그리고 불평을 합니다.
 ②그러나 한 친구는 장미꽃을 드려다 보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습니다. <역시 꽃 중의 꽃은 장미야! 장미는 꽃 중의 여왕이야! 아 ! 아름답단 말이야 가시 없는 장미가 무슨 의미가 있담, 꽃과 가시 얼마나 멋진 조화인가!>하고 예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속에는 행복도 있고 불행도 있습니다.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습니다. 평안도 있고 고통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쪽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안 좋은 쪽만 드려다 보면 감사가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사간에는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할 이유를 먼저 찾아봅시다.

1.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동등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신 7:8]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우리를 부르시고 뽑아 주신 하나님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증오의 신, 복수의 신> 으로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사랑은 아낌없이 주신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셨습니다.
 이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영원에서 영원까지 변치 않습니다.
 이 사랑은 풍성한 사랑입니다. 마지못해 주는 감질 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자상한 사랑입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앉고 일어서는 것까지 구체적으로 돌보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랑 때문에 사도 바울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동등하게 같은 레벨에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 위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해야할 이유는 영원한 위로를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옛날 영국 빅토리아 여왕시절에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 신하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후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왕이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페이스를 되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왕이 찾아와 무슨 말을 해 주었느냐고 묻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 그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는 여왕폐하께서 얼마 전에 나처럼 유산한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왕께서 나 같은 여인까지 찾아온 이유임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그분의 손을 잡고 있는 순간 이 고난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제 가슴을 죄고 있던 고통이 저에게서 떠나갔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능력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우리의 소명을 일컬어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 4:11]에 “.....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에 등장한 위로는 ‘진통제’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힘든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을 보내주신다면 우리 영혼은 언제든지 진통제를 얻은 것과 같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내가 위로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장 큰 질병은 결핵이나 나병이 아닙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위로하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가장 무서운 병입니다. 세상에는 빵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지만 위로가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 40:1]에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죽어 가는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위로가 있는 곳은 사막이 오아시스로 변합니다.
 미움과 질투, 원망과 불평이 있는 곳이 희락과 평강으로 변합니다. 증오가 있는 곳에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것입니다. 위로가 있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위로가 있는 가정이 평안하고 사랑이 넘칩니다. 위로가 있는 직장이 흥왕합니다. 위로가 있는 기업의 노사가 화합하고 생산성이 올라갑니다.
 사람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위로자입니다.

 현대인의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우울증, 심장 질환, 그리고 교통사고라고 합니다.
 머지않아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 질환이 전체 질병의 15% 이상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학자들도 있고, 어떤 연구 보고서에 의하면 자살하는 사람들 가운데 80%가 우울증 환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같은 각종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참된 위로자를 만나지 못해서 심한 고통을 받고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눅 7장을 보면, 독자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는 한 과부를 만나서 위로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그 누구도 과부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청년은 독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독자와 함께 살던 과부에게 있어서 그 아들은 남편 이상의 존재였습니다.
 죽음은 여인에게서 사랑하는 남편을 빼앗아갔습니다.
 죽음은 행복한 가정을 파괴해버렸습니다.
 죽음은 이제 독자까지 데려감으로써 마침내 여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고 말았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비록 짧지만 분명하게 그 상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주님은 그 여인의 슬픔을 분명히 보셨습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깊은 아픔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과부의 슬픔을 보시고 주님은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슬퍼하는 그 여인의 슬픔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의 슬픔이 곧 주님의 슬픔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불쌍해서 주님도 자신의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고통을 그 여인과 함께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과부를 향해서 “울지 말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위로의 말씀은 “이제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울지 말라!” 주님의 그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눅 7:14)
 말로만 울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싸늘한 시체를 향해서 말씀하시자 놀랍게도 그가 곧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살아난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셨습니다.
 그 과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눅 7:16-17)
 나인 성 과부의 독자를 살려 주신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3. 소망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소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슐로모 브레즈니츠]라는 심리학자가 4개조의 군인들에게 20km를 행군하게 하면서 그들이 느끼는 스트레스를 조사했습니다.
 1조에게는 미리 20km의 행군거리를 예고하고 5Km 마다 남은 거리를 알려 주었습니다.
 2조에게는 단지 먼 거리를 행군한다고만 알렸습니다.
 3조에게는 15km를 행군한다고 말했다가 14km 지점에서 20km행군으로 변경했습니다.
 4조에게는 25km 행군한다고 말한 후 14km지점에서 20km로 단축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① 20km 행군을 정확히 알고 중간에 남은 거리를 알고 행군한 1조가 스트레스를 가장 적게 받았습니다.
 ② 두 번째는 3조이고,
 ③ 25km로 시작해서 중간에 알고 행군한 4조가 처음보다 더 많이 행군한 3조보다 스트레스를 더 받았다.
 ④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은 조는 행군거리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행군한 2조였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브레즈니츠]의 분석에 따르면 생각보다 더 늘어난 거리를 가야했던 3조의 군인들은 물론 화가 났지만 목적지가 남아있고 완주해야하는 소망이 있었기에 넉넉히 행군할 수 있었던 반면에 같은 20km 였지만 예상한 거리보다 줄어들었다는 소식을 중간에 들은 군인들은 갑자기 긴장이 풀리면서 급격한 피로가 몰려 왔다는 것입니다. 이 실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소망이 없는 일은 무의미하고 불평과 실패로 이어지지만 소망은 삶의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목적까지 이를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나치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 코리텐 붐 여사가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훗날 <피난처>(Hiding Place)라는 수기를 쓴 사람입니다.
 살을 에이는 듯한 추운 잠자리, 고문, 굶주림 등 견디기 어려운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제일 견디기 어려운 것은 벼룩이었습니다.
 그런 속에서도 몇몇이 몰래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의 말씀은 수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특히 벼룩이 많은 것은 도저히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벼룩이 많은 것도 감사할 조건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감방을 감시하던 병사가 저네끼리 \"감방 안엔 벼룩이 많아서 들어가기가 끔찍하단 말이야\" 라면서 \"밖에서 슬슬 지키는게 좋겠군\"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 순간 벼룩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던 그들은 \"벼룩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고, 그 덕택에 성경공부를 계속 할 수가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보스니아의 어린이들이 유니세프에 보낸 편지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지고 나니 물도 없고, 전기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한 달에 5kg 정도의 밀가루로 대식구가 살아야 하는 식량난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 때에 나온 일기가 <안네의 일기>입니다.
 이 때 학교에 공부하러 온 아이들은 배가 고파서 시들시들하고 졸기만 하였습니다. 굶어 죽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반은 굶어 죽는 아이들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선생님의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배고파서 죽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없어서 죽는 것이다>
 이렇게 소망을 불어 넣어 준 반 아이들은 죽는 수가 적었습니다.
 이가 득실득실한 데에서 모두 이투성이가 되어 피를 빨아 먹는 이를 견디다 못해 발가벗고 살았습니다. 그 때 안네의 말을 들어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 때 안네는 “내 피는 빨아 먹어도, 내 소망만은 빨아 먹지 못 할걸”이라는 말을 ‘안네의 일기’에 써 놓았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기가 막힌 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십자가 때문에 울던 사람들에게 부활의 새 아침을 주심으로써 위로와 소망을 주셨던 것처럼,
 절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참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갖는 소망은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적인 것은 필요조건일 뿐입니다.

 왜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세상 것은 잠깐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행복도 잠깐, 기쁨도 잠깐, 성공도 잠깐, 승진도 잠깐, 평화도 잠깐, 찰라 찰라 짤칵 짤칵 짤칵 잠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좋은 것입니다. 이 영원한 나라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2) 영원한 나라는 살기가 좋은 곳이기 때문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죄도 없고, 질병도 없고, 미움도 없고, 다툼도 없고, 전쟁도 없는 나라 인간이 수 천년 동안 꿈꾸어 오던 파라다이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거기가 영원한 소망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주시고 소망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3) 주님과 거기서 영원히 살기 때문에 소망을 두어야합니다.
 찬송 작가 헌팅턴은 235장에 이렇게 작사를 했습니다.
♪“우리를 구하신 주님도 거룩한 그 집에 계시니 우리도 이 세상 떠날 때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리의 삶이 각박해 진다고 하더라도 감사는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감사는 내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감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감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는 더군다나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 더 많이 감사하고, 감사할 사건이 많아지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까?
1) 마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① 마음으로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② 마음으로 잘못을 회개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③ 마음으로 결심하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2) 말로 감사해야 합니다.
 ♪찬송 23장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그 입다 가지고 내 주신 은총을 늘 찬송(감사)하겠네!”
 입을 열어 절대로 원망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려 감사해야 합니다.
3) 생활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며 살아가십시다.
 감사는 내 영혼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감사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그리고 감사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감화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는 더군다나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줍니다.(2008. 1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