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반성


한 해의 반성 (860)  옙 5:15-21   송년주일                                                      한 해의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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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금년 한해가 다 가 버렸습니다.
서양의 어느 시인은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 셋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과녁을 향해 쏜 화살과, 급하게 뱉어 버린 말과, 황금 같은 기회라고 하였습니다. 금년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기회들이 다 흘러가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제 2000년이란 세월은 영영 우리에게 멀어져 과거로 흘러가 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물어 가는 이 한해의 마지막 정상에 서서 지금까지 걸어온 지난 일년 동안의 발자취를 뒤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1. 되돌아보는 세월은 언제나 후회를 남깁니다.
오늘로 끝을 맺는 2008년의 마지막 날!,
마지막 주일에 이 한해동안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왜냐하면 지난 정초 때 작정했던 모든 계획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후회와 부끄러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보다 하나님께 대한 부끄러움이 더욱 큽니다.
<말씀>대로 얼마나 살아왔는가?
<말씀>대로 얼마나 순종하였는가?
믿는 성도들이라면 우리의 모든 행위에 표준은 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얼마나 순종하면서 살아왔는가?
순종하지 못한 세월에서 무엇을 남기었는가?
등등 깊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수리의 얘기가 생각납니다.
독수리가 아침에 사슴을 잡으려고 의기양양하게 떠올랐으나 온종일 산과 들을 찾아 다녀도 토끼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어 헛수고하고 돌아오다가 마침 시궁창에 썩은 쥐 한 마리를 보고 굶주린 창자를 채웠다는 이야기입니다.
2008년의 첫날 우리는 모두 장미 빛으로 새해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두들 새 천년이니, 21세기니, 밀레니움이니 하는 말들로 얼마나 부푼 기대를 가지고 맞이하였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의 얼굴에는 장미 빛보다는 재 빛으로 이 한해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서민들은 IMF 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아이엠에프를 당해야 했고,
은행에 실명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실명제의 소란을 겪어야 했고,
의약분업이 무엇인지도 왜 필요한지도 모르면서 약을 사러 다니는 불편을 겪어야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IMF의 턴널을 2년만에 빠져 나왔다’고 대통령이 국민 앞에 직접 나와서 말하던 것이 엇그제 같았는데, 거리에는 다시 노숙 자들이 생겨났고, 구조 조정으로 인한 갈등과, 직업을 잃은 많은 실직자들이 한숨으로 이 해를 보내고 있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의 원망과 책임전가와 집단 이기주의로 나라 사랑이란 말은 저 만치 밀려난 현상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는 중에,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을 나무라는 사람도 있고,
정부의 정책이 무원칙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고,
중권의 폭락으로 인하여 그리고 부도덕한 금융사고들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망보다는 우울하게 이 해를 보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2008년의 마지막을 이렇게 보내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고 봅니다.
성지 예루살렘에서는 금년처럼 주님 나신 성탄절이 적막하기는 처음이라고 합니다. 아기 예수 탄생한 베들레헴에서는 긴장감 마저 돌았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재난과, 사고로 얼룩진 한해였습니다.

우리의 육신적인 지나온 세월이 이처럼 얼룩진 세월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가지고 나가 허랑 방탕하게 지내며 모든 것을 탕진했던 불순종한 둘째 아들처럼, 지난 일년의 세월동안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연말이 있고, 새해가 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을 반성하고 돌아서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깨끗이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새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해 들이기 위해서 이렇게 연말이 있고, 새해가 있다고 봅니다.

2. 2008년을 후회로 보냈다면 새해는 어떻게 맞이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어리석게 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리석게 산다’는 것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는 뜻입니다.
자신만을 위해 산다는 것은 자기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삶에서는 고마움이 없습니다.
고마움을 모르는 삶에서는 사랑이 싹트지 않습니다.
사랑은 생명을 낳게 하고, 사랑은 생명을 성장시켜 결국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 다 소유하였다고 해도 사랑을 모르는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시키는 위대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모르고 사는 삶은 어둡고 캄캄한 길을 헤매는 것과 같습니다.
눈으로 본다고 하지만 소경처럼 더듬고 사는 삶입니다.
사랑이 그 마음을 지배하면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로 보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탐심과 욕심이 있는 한, 이웃이 형제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아직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들이 아닌가! 깊이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주님은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위로는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의 쉼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한 해를 회고할 때 <참>과 <진실>을 위한 것보다는 그림자와 같은 헛된 것만을 위하여 분주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분주하게 살아왔는지 조용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시편기자는 39:6절에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취할지도 모를 그 재물을 쌓기 위하여 이렇게 분주하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사업을 위하여, 불쌍한 이웃을 위하여 지난 일년동안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까닭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일년을 자세히 돌아보면 허물과 실수로 그리고 불순종으로 얼룩진 한해였습니다. 그러한 부끄러운 허물들이 있을지라도 이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새로운 한 해를 맞게 해 주실 것입니다.

3. 새 해에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초대교인들이 󰡔그리스도 인󰡕이란 말을 듣게 된 것은 그 당시의 사람들과 무엇인가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삶의 본을 예수님께 두었습니다.
오늘의 의미에서는 예수께 전념한 ‘예수쟁이’이란 뜻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수 꾼’, ‘예수의 사람들’이란, 이런 별명입니다.
오늘도 이런 말을 듣게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요즘 우리에게는 예수의 냄새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옛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냄새가 있었습니다.
저들이 비록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들었으나, 그들의 생활은 철저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구별된 생활을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크리스천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과 같은 삶의 십분의 일만 행하여도 아마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욕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소위 그리스천들의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도리어 찡그러지는 인상을 주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세상의 법정에서 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 우리는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노방전도하기가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십니까?
우리의 생활에서 예수의 냄새들이 살아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생활의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물질을 따라 살고, 부의 축척만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형제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만일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앞으로 기독교회는 기독교의 본산지에서처럼 모두 살아지고 말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불교에서 이미 입증된 현상입니다.
오늘의 불교가 왜 사람들의 관심에서 떠나게 되었습니까?
신라 천년동안 국교로까지 되었던 불교가 살아지고, 그 막강했던 힘이 오늘날 그 명맥을 잃고, 경주 박물관에서만 볼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백성들 마음속에 더 이상 어떤 비전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기독교회라고 예외는 아닐 것입니다.
주님도 이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5:13)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구원의 사랑입니다. 속죄의 사랑입니다.
이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한 영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버리고 세상의 사람들처럼 개인적인 복만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런 삶의 스타일대로만 살려고 한다면,
얼마 못 가서 맛 잃은 소금이 되어 길에 버려져 밟히는 신세들이 될 것입니다.
두고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국 교회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2050년-내지 2100년대에 이 설교의 내용이 적중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물의 세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풀만 먹는 짐승들은 모두 유순합니다.
소, 양, 노루, 사슴, 등등 초식 동물 치고 맹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남의살을 먹는, 남을 잡아먹는 짐승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놈들은 눈에 살기가 등등합니다.
호랑이, 사자, 늑대, 하이아나, 등등 남을 덮쳐 잡아먹는 육식을 하는 동물들은 모두 포악스럽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유순하지 않고,
남을 잡아먹으려 든다면, 그것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인이라고 행세하면서,  교회의 직분을 팔아가면서 남을 등치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습니다.
얼마나 불행스러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너무나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살기가 등등해 졌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세상의 것들만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지 않고,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나의 목회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까?
그것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오르게 되면 용기가 살아지는 것을 경험하군 합니다. 교회를 봉사하다 낙심하는 사람들이 왜 낙심합니까?
사람들의 얼굴을 주님의 얼굴보다 더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면, 우리의 불평과, 원망과, 미움까지도 다 살아지게 됩니다.
거기에 다시 신비한 힘과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낙심이 오려고 하면, 그럴 때마다 주님의 얼굴만을 바라보아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모두 묵은해와 함께 2008년은 흘러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 들입시다. 새해에는 보다 밝은 한해가 되도록 내 마음을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도록 하십시다. 주님께로 오는 은혜와 평강이 한해를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