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1:8-16)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8~16)
‘타하라 요네꼬’라고 하는 일본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과 사랑 가운데 성장했는데 갑자기 어머니를 잃고 나니까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아니 몹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어머니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인가?’ ‘내가 살아서 무엇하나?’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급기야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달려오는 기차에 뛰어들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죽지 않았습니다. 대신 두 다리가 잘려나갔습니다. 왼 팔도 잘려나갔습니다. 남은 건 오른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두 손가락이 다 잘려나갔습니다. ‘차라리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렇게 살아서 뭐할까?’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어두움의 터널을 지나가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를 지망하는 한 젊은 신학생이 ‘요네꼬’의 병실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청년과의 몇 번의 만남 속에서 ‘요네꼬’는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이 신학생은 ‘요네꼬’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습니다. “요네꼬씨! 저하고 결혼해 주십시오.” ‘요네꼬’는 당황했습니다. 아니 승낙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 같은 장애인하고 당신이 결혼하면 크게 불행할텐데 왜 나하고 결혼하길 원하십니까? 나는 승낙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시 생각해 볼 테니 우리 함께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해봅시다.” 두 사람은 각자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얼마 후에 만나서 서로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응답을 나누게 되는데, 둘은 깜짝 놀라게 됩니다. 둘이 똑같이 마태복음 18장 19절을 응답으로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게 하시리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고 구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겁니다. 둘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슬하에 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척해서 열심히 목회하면서 복음을 전하는데 얼마나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장애도 뛰어넘게 하는 것입니다. <길은 여기에>라는 아주 유명한 책을 낸 일본의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우라 아야꼬’는 일본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여류 작가입니다. 그가 낸 간증집들을 읽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책을 읽으면 80% 이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거나, 예수를 믿게 된다고 합니다. 참 놀라운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류작가입니다. 이 ‘미우라 아야꼬’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죽어가는 폐병환자였습니다. 폐병 걸린 한 청년이 이 ‘미우라 아야꼬’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복음을 듣고 ‘아야꼬’가 변화되어서 일본의 엄청난 복음의 영향을 행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에게 복음을 심겨준 사람은 시골 초등학교 교사인 ‘킴볼’이라는 분입니다. 세상의 드러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전한 그 복음을 통해서 위대한 인물들이 배출되어지곤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66권이 다 복음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의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죽었던 영혼들이 회생하게 되고, 죄에 종 되었던 자들이 죄에서 자유하게 되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는 말씀이 있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시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받는 길, 영원히 사는 길이 이 복음에는 숨겨져 있습니다. 복음은 이와 같이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놀라운 복음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땅 속에만 파묻어 두고 살아간다면 이것처럼 비극적인 일이 어딨겠습니까?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거기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교회의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복음의 감격, 구원받은 이 열정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불덩이가 되어야 할 우리들이 새까맣게 타버린 복음의 숮덩이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다 식어버린, 그리고 다 타버린 시커먼 숮덩이에 불과하다면 이것처럼 비극이 어디있겠습니까? 우리 마음 속에 한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탄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슴이 냉랭하게 식어지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도 나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회에 큰 시계가 있는데, 그 시계 위에 이런 글을 쓰여져 있습니다. 83명, 무슨 말이냐? 지금도 지구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영혼들, 지옥 불에 떨어지는 영혼들이 1분에 83명씩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가서 복음 전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마음이 평안해야 하는데 교우들은 그것을 볼 때마다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들은 목사님에게 가서 항의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 글씨 좀 떼어 주세요! 불편해서 못 살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1분에 83명씩 죽어가는 저 영혼들을 그 불구덩이에서 건져내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사명을 잃어버리고 외면하고 오직 나 자신의 안락과 축복만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어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요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저희 장모님이 몇 년 전에 돌아가시기 전에 상계동 쪽에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몸의 중풍이 오셔서 활동하기 불편하셨습니다. 잘 걷지 못하고, 어디 가시려면 휠체어를 타고 가셔야만 했습니다. 늘 아파트 앞에서 사람들과 이런 저런 대화를 하고 계시면 그 동네 교회에서 와서 전도를 합니다. 장모님 말씀이 “아이고 우리 사위가 목사지만 내가 이렇게 불편해서 교회를 못나갑니다.”고 그랬더니 그 교회에서 “우리가 모시러 오면 나오시겠냐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갈 수가 있지.” 그 교회는 상가 교회인데 3층에 있습니다. 그 교회에서 주일만 되면 어김없이 남신도 3분이 오십니다. 자기 자가용을 하나 가지고 와서 장모님을 업고 차에다 모십니다. 그리고 업고 뒤에서 밀고 3층 예배당으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휠체어를 펴 드리고, 그리고 예배가 끝나면 교회에서 함께 점심을 드시게 하고 끝나면 다시 집으로 모셔다 드립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 구역에 이렇게 불편한 분들이 있으면 가서 모셔 올 수 있는 그런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 식어버렸습니다. 숮덩이처럼 변해버렸습니다. ‘몸이 아프면 못 나오는 거지 뭐.’ 우리 마음이 점점 차가워진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보더라도, 굶주린 노숙자를 봐도 ‘아 저런 사람이야 나라가 구제하는거지 뭐 내가 신경쓸게 뭐 있어?’ 우리 마음 속에 긍휼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사랑이 메말라가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영국에 작은 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의 철문에 이런 글씨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한다.’ 사람들은 그 글씨를 볼 때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내가 그분의 복음을 전해야지!’ 그래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담쟁이넝쿨이 올라와서 이 철문을 감는데 세상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 말을 안 보이게 감아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한다’ 이렇게만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나가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냐? 이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니라 우리의 모범되신 그리스도, 인류의 교사되신 그리스도, 박애주의자이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거기엔 예수의 보혈이 없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없습니다. 구원이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또 담쟁이넝쿨이 더 많이 자라 이제 ‘그리스도’란 말도 덮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전한다!’ 그랬습니다. 이제 그 교회에서는 경제적인 이야기, 사회적인 이야기, 정치적인 이야기, 예술적인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변화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십자가의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고 거기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러분 죽어가는 인간을 살리는 것은 복음의 능력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 문화부 장관을 지내신 이어령 씨께서 한 1년 전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간증을 한 내용을 테이프가 있어서 들어봤는데, 그 제목이 <지성을 넘어 영성으로>입니다. 그는 한국 최고의 지성입니다.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성도 자기를 구원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의 영성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다고 그는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이 아니라 영성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영성. 여러분이 지식이 있으면 이어령씨보다 더 많이 배우셨습니까? 더 박학다식하십니까? 세계최고의 지성도 복음의 영성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로마서의 이야기는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사도바울이 기록을 했습니다. 그는 원래는 유대의 아주 촉망받는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좋은 학벌을 지닌 젊은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교에 빠져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잡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법정에 세우는 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다메섹이라는 곳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고 가는 길에 그는 도상에서 강한 빛 앞에 눈이 멀어지게 되고 꼬꾸라지게 됩니다. 그는 묻습니다. “주여 뉘시니이까?”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집에 갔고 그 예언자에게 안수를 받고서야 눈이 띄여지게 됩니다. 그의 눈이 띄여질 때 그의 영혼의 눈도 띄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아니하고 전 세계를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로마를 거쳐서 저 서머나 땅 끝까지 가기를 원했습니다. 오늘 그의 로마서 1장에는 로마를 가더라도 복음을 전하기 원하는 그의 간절한 심정이 구구절절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10절 말씀을 한번 읽어봅시다.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13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렇습니다. 오늘 바울의 한가지 소원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가기를 원하노라. 할 수만 있으면 너희에게 가서 내가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마음 속에는 복음으로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 속에는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자기 부모님을 너무 너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 가서 뭐 맛있는 것 먹으면 ‘야 이거 너무 맛있다. 우리 어머니 모시고 와서 같이 먹어야 겠다.’ 아침에 생선을 구워서 먹어도 ‘아이고 생선이 참 싱싱하고 맛있네. 우리 아버님 같이 드셨으면 좋겠다.’ 여러분 늘 뭘 먹어도 뭘 봐도 ‘아이고 우리 아버님, 어머님 저 옷 입으시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가득 찬 분들은 효자가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늘 부모님을 먼저 생각하니까. 부모님 생각으로 꽉 차 있습니다. 효자 효녀가 다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코카콜라 사장은 이 인류의 모든 사람이 코카콜라를 마시는 게 그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내 몸에는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가 코카콜라가 세상에 퍼져나가길 염원했던지 공산주의 사회에까지도 코카콜라가 제일 먼저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람은 못 들어가지만 코카콜라는 다 들어갑니다.
여러분의 생각에 무엇이 가득차 있습니까? 오늘 사도바울의 생각 속에는 복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내가 전해야 하는데, 저 죽어가는 영혼을 내가 찾아가야 하는데, 그는 생명의 복음을 늘 생각하면서 그것을 전하는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소원했습니다. 왜 복음 전하기를 원했습니까? 그는 복음의 빚진 자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을 한번 읽어봅시다. 14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바울이 무슨 빚을 졌습니까? 남의 돈을 많이 꾸었을까요? 아닙니다. 돈을 꾼 빚쟁이가 아닙니다. 여러분도 남에게 돈을 꾸어 쓰고 못 갚으면 빚쟁이가 됩니다. 마음이 부담스럽습니다. 그것이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그런가하면 돈을 꾸어준 채권자는 당당합니다. “왜 내 빚 안 갚나?” 그러나 빚진 자는 늘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미안하고 죄송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채권자요 어떤 사람들은 채무자입니다. 채권자 의식을 가진 사람은 늘 받기만을 바랍니다. ‘왜 나에게 안 해주나?’ ‘왜 우리 부모는 나에게 돈을 좀 안 주나?’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나?’ 늘 받는 것만 익숙해 있습니다. 자신은 그런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채권자이니까.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채권자 의식을 가지면 안됩니다. ‘왜 나를 좀 사랑해 주지 않나?’ ‘왜 나를 좀 아는채 해 주지 않나?’ ‘왜 나를 존경해 주지 앟나?’ ‘왜 나를 받들어 주지 않나?’ 채권자의식입니다.
그러나 채무자 의식을 가지면 늘 미안하고 부족합니다. ‘내가 빚을 너무 많이 졌는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큰데.....’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너무 많이 입었는데 내가 이 빚을 어찌 갚을 수 있을까?’ 늘 그 생각을 합니다. 늘 염려합니다. 어떻게든 이 사랑을 갚으려고 애 쓰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빚진 자의 마음이고 채무자의식입니다. 여러분은 채권자입니까? 채무자입니다. 옆에 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채권자입니까? 채무자입니까?
내가 이 많은 사랑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너무 많은 빚을 진 것입니다.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걸로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저희들, 기독교를 핍박하던 자기와 같은 사람을 예수님이 구원하셔서 사도로 삼아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이 마음의 빚을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빚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갚으려고 바울은 몸부림치고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돌아봅시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그래서 우리는 복음 전하기를 위해서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는 한 8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어머니의 은혜를 갚으려고 해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어버이날이 되어도. 물론 살아계신 아버님께 더 잘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되겠지요. 그러나 제가 어머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 어머님 또래의 어르신들에게 제가 잘 해드리는 것입니다. 제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그분들을 도와드리고 그 분들을 기쁘게 해 드리면 내가 어머니의 은혜에 일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갚을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복음의 빚진 자입니다.
얼마 전에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영화가 상영이 되었는데, 저는 보고 싶었지만 바빠서 놓쳤더니 그 영화가 종영되어서 못 봤습니다. 참 훌륭한 영화입니다. 간단하게 예고편이 나온 것을 보고 줄거리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영화에는 성공회 신부인 ‘존 뉴튼’이라는 분이 나옵니다. 섬기는 교회의 마루 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습니다. 왜 마루바닥을 닦느냐면 너무 빚을 진 것이 많아서 이 빚을 갚기 위해서 마루바닥을 열심히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내 영혼의 지꺼기를 닦아내는 마음으로 교회의 마루바닥을 열심히 닦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에 노예선 선장을 했던 사람입니다. 영국은 그 당시 모든 국부의 3분의 1일이 노예를 매매해서 얻은 수익이었습니다. 신사적인 나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들은 배를 타고 저 아프리카에서 가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몇 백명씩 잡아다가 배에 싣고 끌고 옵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팔을 탈골시키고 병들면 바다에 던져버리고.... 영국에 와서 돈을 받고 다 팔아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가서 사탕수수 농장에 가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가공하는 일에 동원됩니다. 매를 맞고 인간답게 살지 못합니다. 동물 이하의 대우를 당했습니다. 영국이 그런 나라였습니다. 존 뉴튼이 바로 그런 일을 하는 노예선 선장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배가 파선되었습니다. 그는 나무 조각을 잡고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신앙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그가 바른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는 늘 마루바닥을 열심히 닦는 목사입니다. 자기의 죄의 빚을 갚기 위해서, 그런데 그 존 뉴튼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윌리엄 윌버포스’란 사람입니다. 20대의 촉망받는 이 젊은이는 국회위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존 뉴튼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노예제폐지를 위해 일생을 바칩니다.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일생을 투쟁하였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그 법이 통과되어서 영국에서는 노예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흑인들도 너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존 뉴튼을 통해서, 윌리엄 윌버포스를 통해서, 그런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복음의 빚진 자 의식입니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씻어내는 심정으로, 빚진 자의 심정으로, 그런 일을 위해서 그는 기도했고, 노력했고, 윌리엄 윌버포스를 통해서 노예해방이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 속에 이 복음의 빚진 자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왜 복음을 전하기 원했을까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 되기 때문에. 우리 로마서 1장 16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그렇습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누구에게든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십니까? 옆에 분들에게 물어봅시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십니까?” 대답은 여러분이 잘 아실겁니다. 성경 찬송 들고 교회 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그런 것입니다. 내가 교인이라는 것을 어디 가서 부끄러워 하면 그 분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것입니다. 찬송 부를 때 찬송 안 부르고 입 딱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내 육신의 부모를 부끄러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부모를 부끄러워 하면 불효자식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다리를 좀 전다고, 우리 부모가 좋은 옷을 못 입고 남루한 옷을 입었다고 우리 부모를 부끄러워 한다면 그것은 자녀의 도리가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 하고 그의 몸된 교회를 부끄러워 하고 복음을 부끄러워 한다면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우리의 삶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한 우리의 거짓된 삶이 위선된 삶이 부끄러운 것이지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장로님이 되신 분인데, 예전에 6.25때 북한에서 월남한 분이 있습니다. 소련에서 내려와 모든 것을 다 빼앗고 자기가 운영하던 가게까지 빼앗아 갈 곳이 없어 고민하다가 남한으로 넘어오기를 작정했습니다. 한밤중에 야반도주를 하려고 짐을 싸는데, 짐은 간편하게 꾸렸습니다. 비상식량하고 옷가지 몇 개하고, 그런데 이 성경찬송을 가져가야하는지 걱정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무거운 것 같고 가다가 걸리면 잡혀 죽을텐데. 그렇다고 내가 집사가 되어가지고 성경찬송 버리고 그냥 간다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가방에 넣어다 빼앗다를 반복하다가 죽을 땐 죽더라도 집사로 죽자. 이런 마음으로 성경 찬송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내려오다가 38선 부근에서 북한군에게 걸렸습니다. 가방을 뒤져보는데 성경찬송이 나오니까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그러고 한 500M를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무도 안 보는 데 가더니 가방을 내려놓더니 “선생님 이거 빨리 가져가세요. 저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저 앞으로 가면 소련군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이 뒷길로 가시면 안전하게 가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끄러워하고 신자라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이게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어디 가서 내가 권사요 집사요 떳떳이 밝힐 수 없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장소에 가서 내가 집사요 권사요 자랑할 수 없겠죠. 그러니 자꾸 숨기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교인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부인따라 가는 교인이지 난 별거 아니예요.” 그런데 교회 와보니 그 분이 장로님입니다. 직장에 가서는 교회에 가끔 나간다고 합니다. “부인 따라 나가는 거지 내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가는 거지” 그런데 교회 가니 장로님입니다. 밖에 나가서는 이야기 안 합니다. 부끄러워서, 창피해서, 여러분 그런 부끄러운 직분자 되지 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느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왜 이 복음 전하기를 원했을까요? 로마 교인들에게 잃어버린 복음의 감동을 주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로마 교회 교인들은 이미 복음을 다 듣고 다 구원받은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무슨 복음을 전합니까? 로마에 복음이 전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 믿은지 20년 지나면 계속 복음으로 새로워지지 않으면 신앙이 굳어버립니다. 화석화되어버립니다. 복음의 열정의 구원의 감격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율법 밖에 없습니다. 습관적인 신상생활, 이중적인 삶 그것 밖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남 비판하고, 부정적인 생각갖고, 그것 밖에 없더랍니다.
교회도 교회가 창립된지 50년이 지나면 교회가 굳어져 버립니다. 복음을 잃어버립니다. 복음 없는 교회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집단들이 되어버리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을 해도 기도를 해도 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하는 일이니까 하는거지. 안하면 이상하니까.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 영신교회도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53년째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처음에 그 열정과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로마 교회가 그랬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믿는 그들에게 또다시 바울은 복음 전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전도하면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전도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럴 때 내게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교회는 복음이 살아납니다. 생명의 감격이 다시 주어집니다. 그러나 전도하지 않으면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남에게 전도할 필요도 없고, 나 자신도 이게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이미 잊어 버린지 오래입니다. ‘죽어봐야 하는거지 그거 어떻게 아는가?’ 자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우리가 총동원 주일 50일 선포주일을 했는데 여러분이 지금부터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먼저 내 마음에 영혼을 품어야 합니다. 내가 전도해야 될 두 명, 세 명의 영혼을 품으셔야 합니다. 내 가족 중에, 내 이웃 중에, 내 친척 중에, 내 직장동료 중에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꼭 정하세요. 그리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십시오. 다섯 번입니다. 어떻게 기도하실까요?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 아침 먹을 때 한번, 점심 먹을 때 한번, 저녁 먹을 때 한번, 주무시기 전에 한번, 다섯 번 이름 부르며 기도하세요. “하나님! 오늘도 김개똥이를 구원해 주세요. 김개똥이를 구원해 주세요.” 다섯 번씩 기도하세요. 몇일 동안? 50일동안.
그렇게 50일 동안 하루 다섯 번씩 기도하면 그 사람이 예수 믿을 것 같습니까? 안 믿을 것 같습니까? 기도 아직 안 해 봤지만 그렇게 기도하면 안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루 다섯 번, 오십일 동안. 매일 기도합시다. 그리고 다섯 번 만납시다. 다섯 번 만나세요. 어떻게 만나느냐? 만나서 얘기 듣고 어떨 때는 선물도 가져가고 과일도 사가고 자장면도 나눠먹고, 그 집에는 어려움이 없는지 고민도 들어보고. 다섯 번 만나세요. 그리고 초청주일에 그분을 교회로 모셔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는 복음을 증거하는 것, 우리의 사명이고 사도바울이 가졌던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우리가 그분을 위해서 무엇을 마다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복음의 빚을 갚는 길입니다.
한 어린이가 주일학교에 다니는데 엄마 아빠는 교회에 안 다닙니다. 아이는 늘 ‘엄마 아빠도 교회 같이 나가면 좋겠다.’ 늘 이야기 합니다. 아빠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야! 우리는 교회 안 다녀도 다 착하게 사니까 괜찮아. 너나 열심히 다녀!” 교회 나가면 좋은 거 가르쳐 주고 애들이 성실한 삶을 배우는 거 아니까 막지 않고 보냅니다. 애들은 보내는데 부모들은 안 나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아이가 학교 갔다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그만 죽어버렸습니다. 엄마 아빠는 너무 비통한 심정으로 장례를 치릅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들어와서 이제 아이의 방을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는데 서랍에 일기장이 하나 나왔습니다. 일기장을 열어보니 이런 글이 있습니다. “예수님 우리 엄마 아빠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면 좋겠어요. 우리 엄마 아빠가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제가 죽어도 좋아요. 우리 엄마 아빠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이런 일기 내용을 아빠가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아빠는 눈물을 흘립니다. 감동과 회한에 젖습니다. ‘도대체 예수 믿는게 뭔데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우리가 예수 믿기를 원했을까?’ 엄마 아빠는 결심하고 그 주부터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빠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세계 대학생 선교회 CCC 부총재가 되신 분입니다. 자기가 어린 아들의 죽음 대신 자기 부부가 구원받고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가 복음 전하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우리 인사도 그렇게 합시다. \"전도합시다.\" 이렇게 인사하면 좋을 것같습니다. 예배 끝나고 나갈 때도 만나면 \"아이고 잘 있었어?\" 이러지 말고 \"전도합시다! 전도합시다! 전도합시다!\". \"잘 있었어?\" 이러지 말고 \"꽃구경 갔다왔어?\"그러지 말고 만나면 \"전도합시다!\"로 인사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총동원 50일 선포주일입니다. 이제 49일 동안 우리가 힘차게 달려가서 전합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 그러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이 복음 증거를 위해서 힘차게 전진하는 우리 영신교회 교우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