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 충만한 교회

 성령이 충만한 교회
( 출 40:34-38, 엡 5:15-18 )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오순절을 맞아 성령이 기도하는 예수님의 처음 제자 무리에게 임하신 날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가정도 충만한 성령의 역사가 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지옥을 리모델한답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불가마와 찜질방에 너무 단련이 되어 있어서 더 뜨겁게 온도를 높이느라고 한답니다. 사실은 천당을 리모델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 성도들이 너무 뜨거워 냉방장치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지옥을 더 뜨겁게 한다니 한국사람 외에 지옥 가는 사람들이 더 고생하게 생겼습니다.
 
현대 사회는 뜨거움과 감격이 사라진 사회라고 합니다. 어지간한 자극이 아니면 충격도 안 받습니다. 이러다 보니 점점 범죄도 흉악해집니다. 영화나 인터넷 영상물들의 표현도 흔히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점점 충격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충격적인 장면이 많았다고 하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이제는 감동의 시대가 아니라 충격의 시대입니다. 더 뜨거워야 하고, 더 차가워야 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뜨거워야 하는데 차가워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알았습니다. 차지겠습니다” 그럽니까? 뜨거워져야 하는 것이 신앙의 이치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 바른 이치입니다.
 
성령은 또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보혜사이신데 보혜사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웹스터 사전에는 보혜사라는 말을 여러 단어로 설명합니다. 상담자, 조언자, 위로자, 중재자, 조력자, 대변자, 지도자, 지지자, 친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용어들은 우리를 위한 다양한 성령의 역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이름, 역할, 역사는 다양하지만 한결같이 느끼는 것은 뜨거움입니다. 성령을 생각하면 좋습니다. 기쁨이 넘칩니다. 그리고 성령은 아무리 충만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령입니다

. 중국 서안지방에 가면 상당히 덥습니다. 중국은 법적으로 남방에서는 기온이 섭씨 39도가 되면 직장이 휴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온도가 올라가도 정부에서는 섭씨 39도라고 발표한다고 합니다.

실제로는 46도까지 올라갔지만 정부의 발표는 39도 이상 올라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조작하는 온도입니다. 온도가 올라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령 받고 뜨거워질까봐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할 사람이 없습니다. 이만큼 뜨거워졌으면 만족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은 성령 강림을 적고 있습니다. 120명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바람 같은 성령이 온 집에 가득하였습니다. 그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님은 이미 우리 교회 안에 가득하십니다. 그러나성령이 충만한 교회

필요한 것은 불같은 성령님이 우리 각자 위에 임해야 합니다. 이 둘 다가 필요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교회에서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성령 충만을 체험해도 내가 못하면 헛것입니다. 내가 해야 합니다. 바람과 불이 만나면 불은 더 세게 탑니다. 불이 바람을 만나야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도 성령 강림의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강림하십니다.

성령은 누구에게나 충만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랐습니다. 성령 충만은 누구에게나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을 높입니다.

 충만이란 말은 ‘플레로오’란 말입니다.
이 말은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충분하고 남음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성령님은 충분해야 합니다. 넘쳐흘러야 합니다.

다윗은 그의 시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합니다. 풍성한 것을 의미합니다. 넘치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겨우 차고, 찰랑찰랑한 상태가 압니다. 성령은 넘쳐야 다른 사람에게 흘러갑니다.
 
성령 충만한 성경의 인물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런 인물들은 모두 넘쳐서 남에게 유익을 준 인물들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수아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신명기 34:9에는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와 신이 충만하니”라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여호수아가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 섬겼습니다.

신약성경의 마리아, 세례요한, 엘리사벳, 사가랴, 그리스도, 베드로, 스데반, 바울, 바나바등이 다 성경에는 성령이 충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우리 교회당 안에 가득하십니다. 이제 우리 각자에게 충만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성령 충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신약성경 본문은 성자 어거스틴이 회개하게 된 결정적 동기를 마련해준 성경구절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따로 떨어진 말씀이 아닌 모두가 하나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성령 충만의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성령 충만은 악한 시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16절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합니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그 전 절의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를 이은말입니다. 지혜가 있어야 세월을 아낍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지혜자가 할 수 있는 일이고 그 자체가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이런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세상이 악해진다는 것은 성경에서 이미 교훈한 바입니다. 마태복음 24:12에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고 합니다. 데모데후서 3:1 이하에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 점점 악해지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악한 세대를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노아시대를 보세요. 창세기 6:5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합니다. 죄가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생각마다 못된 일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십니다.
 
사람들이 모두 악했고, 생각들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 입었더라”고 합니다. 성경이 그는 “의인”이었다고 합니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모든 말은 성령 충만의 구약적 표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령 충만 없이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 충만 없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령 충만한 삶이 악한 시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이 필요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절에서 2절 상반절에는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셔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시험을 당하시기 전에 성령을 충만하게 준비하셨습니다. 성령 충만은 악한 마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우리 시험의 모범입니다. 세상에서 악한 마귀에게 이기는 비결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명품병에 들어 삼촌 회사 경리로 일하는 어느 젊은 여성이 회사 돈 6억원을 횡령하여 명품 옷 등을 구입하고 외국에 원정가서 명품을 사고 결국 회사가 거덜났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명품이 무엇이길래 돈을 훔쳐서까지 장만해야 합니까?
 
학교에서도 한번 왕따는 영원한 왕따입니다. 집단 괴롭힘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여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면 인터넷에 “그 녀석 혼내줘라”고 올려 그 학교에서도 견디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왕따 관련 은어를 보셨어요? 전따, 전교생에게 따돌림입니다.

반따, 반 전체에게 따돌림입니다. 은따, 은근한 따돌림입니다. 집따, 집단 따돌림입니다. 개따, 개인적 따돌림입니다. 공따, 공부 잘해 따돌림입니다. 그리고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따돌이, 따순이라고 한답니다.
 
우리 사회의 자살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2003년 작년 한 해동안 자살자가 13,005명입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자살한 사람도 있고, 지명도가 있는 인사가 자살한 경우도 부쩍 늘었습니다.

이런 자살도미노는 유명인사들의 자살 후 일반인의 자살이 14.3배나 증가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가 악해져 가는 한 단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악한 모습들이 사회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런 악한 모습들은 디모데후서 3장에 기록된 당시의 상황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현상입니다. 인간으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할 악의 극치로 보고 있습니다.

악한 시대를 이기는 것이 인간의 의지로 됩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됩니까? 인간의 체면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까? 이런 악한 시대를 이기는 비결은 성령 충만 밖에 없습니다.

둘째, 성령 충만은 주의 뜻을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17절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세상에서 어리석음을 누가 원합니까? 다 어리석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가 많습니다. 누가 주의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면 사람은 누구나 똑똑해집니다. 성령의 충만은 지혜가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지혜 충만을 가져옵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주님의 뜻을 이해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분별력을 생기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현장에서 말씀하신 98개의 단어 중 30개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찾고 이해하려고 애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보통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찬송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뭔지 알아야지요? 뜻을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는데 우리는 불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는데 우리가 순종하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움심이 아니면 주의 뜻을 이해하고 분별하는 지혜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서울 남산 꼭대기에 교회를 세우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아까운 재산과 시간을 다 낭비하였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 옆에 어느 권사님의 땅이 있었는데 그 땅에 교회를 지으라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면서 권사님에게 그 땅을 안 주시면 벌을 받는다고 하였답니다.

어떤 분은 교회를 신축해야 하겠는데 하나님이 연동교회 이목사를 찾아가 보라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에게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자기는 주의 뜻이라고 하는데 왜 나는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는 쌍방적입니다. 어느 한 사람에게만 주의 뜻을 나타내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심 때문에 성령의 주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성령님께 의존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 분이 생각할 때는 주의 뜻이지요. 그런데 그 분은 자기 주인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뜻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몰리노스는 “주님과 뜻이 일치하는 것 즉 그분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을 달콤한 멍에라고 결론짓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이면 기쁘게 매도 맞습니다. 달게 비난 받습니다. 심지어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님이 아니면 절대 이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이 두루 퍼지게 되었을 때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 13:52)고 합니다. 성령을 받으니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예수 믿으며, 말씀 받으며 기쁘지 않으면 문제입니다. 성령과 기쁨은 동시적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합니다. 성령 받으면 기쁨도 받습니다. 성령 충만히 받고 늘 기쁘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찰스 윌리엄스의 짧고 재미있는 희곡 ‘그랩과 그레이스’가 있습니다. 이 희곡에는 색다른 체험을 위해 ‘이번 주에는 요가, 다음 주에는 불교, 그 다음 주는 심령술’등 각종 종교를 섭렵하는 한 남자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그레이스가 성령을 언급하자 그랩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님, 그 좋지, 기분 내키면 한번 오시라고 그러리다. 그런데 그 기분이라는 것이 말이지 어찌나 빨리 변하는지 이내 시들고 말거든”. 그러자 그레이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목적의식은 오래 갑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이 주님의 뜻을 살피는 이 목적이 뚜렷하면 성령님은 내키면 오시는 것 아니라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충만하십니다.

셋째, 성령 충만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18절에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했으니 우리는 받아야지요. 그런데 받으라고 한 것도 받지 않고, 줘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눅 24:49). 예수님은 ‘보혜사’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6). 우리에게 임하실 성령(행 1:18)은 선물로 약속된 성령(행 2:28)이십니다. 이 약속된 선물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오순절의 성령 충만은 구약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요엘 2:28-29에는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 “부어준다”는 말은 푹 잠기게 주신다는 뜻입니다. 충만하게 주신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 예언의 성취입니다(행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이라고 하였는데 임하다는 말은 ‘에페르코마이’라는 헬라어로서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으로 몰아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몰아넣어 잠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 충만하게 베푸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분들은 그래요. 성령을 충만하게 받으라하면 “옛날에 다 해봤다”라고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과거의 경험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충만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강조합니다.

 사도행전에 보시면 성령 충만은 반복적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에 이미 성령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2:4)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관원들에게 잡혔을 때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4:8)라고 합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밝은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다메섹의 선지자 아나니아가 그에게 안수면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9:17)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1차 선교여행을 할 때에 바보라는 곳에서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13:9)라고 합니다.

성령의 지속적 역사와 충만을 의미합니다. 성령 충만은 한번으로 족한 것이 아니라 수시로 계속 충만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경험하였습니다(행 2:4, 38). 그리고 나중에 다시 충만을 경험합니다(행 4:31).

 니케아 종교회의는 교회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의 니케아라는 곳에서 모였던 이 회의는 주후 325년에 소집되었는데, 당시 로마의 황제로서 처음으로 크리스천이 된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소집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의 신성을 반대하는 아리우스파라는 이단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모였던 회의였습니다. 이 때 모인 교회의 대표들인 주교들은 모두 318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318명 중 대부분이 신앙 때문에 고문을 받아 불구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한쪽 눈을 잃어버린 사람, 한쪽 손이 잘린 사람, 한쪽 다리가 못 쓰게 되어서 절룩거리는 사람들이 306명이나 되었습니다. 두 눈을 다 가지고 있고, 두 손을 다 가지고 있고, 절름발이가 아닌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고작 12명밖에 없었습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 318명 중에서 306명이나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몸을 바쳐가면서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너무나 편하게 믿고 너무나 안이하게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은 신앙의 지조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불어넣습니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 이 일입니다.

결론

 중국 속담에 “물고기 한 마리를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으면 그 외의 것은 저절로 충족될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만 받으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신앙과 생활에 성령 충만하면 끝납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일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성막은 영광으로 가득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봉헌 기도를 마쳤을 대에 불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가득했던 불이 성전의 힘이었습니다. 이런 불이 가득한 성전이 백성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한 예루살렘 교회는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집에서 떡을 떼고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찬양했습니다.

교회가 필요한 모든 목적을 성취하는 교회였습니다. 성령 충만이 있어야 교회가 목적이 이끌어가게 됩니다. 목적이 이끌어가는 교회는 성령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사람의 생각이 이끌어가게 되고, 전통이 이끌어가게 되고, 지식이 이끌어가게 됩니다.

 이 놀라운 성령 충만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체험입니다.

 날마다 성령이 충만하여 악한 시대를 이기고, 주의 뜻을 분별하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