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의 목적
본문 / 베드로전서 1장 16~19절
사도 바울은 아들같이 여기는 디모데에게 경건하게 살아야 된다고 권면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이 되려면 경건해야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 7~8절에 보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경건하게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음란하고 악하고 더럽기 때문에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방탕하게 만들고 경건하게 살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정말 경건하게 살기 위해 애쓰고 힘써야만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저는 중학생이 되니까 모든 것이 달라져서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면 중.고등학교 6년간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게 되었는데 제 마음 속에 세 가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 출석은 100퍼센트 한다. 결석은 절대 하지 않는다. 이 결단이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떠나고 안 나가기 시작하면 믿음을 다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루에 세 번씩 교회 가서 꼭 기도해야겠다. 셋째, 하루에 성경을 한 장 이상은 꼭 읽겠다. 이렇게 세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저의 이 세 가지 결심이 저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학생 시절의 신앙생활은 파도와 같이 굴곡이 심하기에 너무 위험합니다. 은혜를 받아서 열심을 낼 때는 목사가 다 된 것처럼 열심을 내다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완전히 불신자와 다름없어요. 학생 시절에는 탈선하기도 쉽고 잘못되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세 가지 결심을 실천함으로 어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6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는 결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날마다 경건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경건의 목적을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경건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 중간에 있는 말씀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5~16절 말씀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안 닮았어도 자다가 코고는 것이라도 닮았습니다. 하여튼 어디든지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구원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 같아도 진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거룩하게 하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특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그 때문에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하게 사는 자녀들을 기뻐하십니다. 거룩하게 사는 자녀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거룩하게 사는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거룩하게 사는 자녀들을 축복하십니다. 거룩하게 사는 자녀들을 높이 들어 쓰십니다. 거룩하게 사는 자녀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하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본문 17절에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이라고 했습니다! .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껍데기 만 보시지 않고 항상 우리 중심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참 잘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고 정직하고 경건해야 합니다. 아멘.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아무도 없으니까 적당히 넘어갈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뿌리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항상 보고 계신다고 하는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항상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깨끗하고 경건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을 축복하시고 크게 들어 쓰시고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깨끗한 그릇을 귀하게 쓰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21절에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 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을 그릇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금 그릇도 있고, 은 그릇도 있고 나무 그릇, 질그릇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를 깨끗하게 해야만 쓰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그릇과 같습니다.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아주 귀히 쓰임 받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어 버림 받습니다. 그래서 땅바닥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깨끗하게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완전히 쓸모없는 죽은 인간이 됩니다. 삼손을 보세요. 그는 굉장한 사사입니다. 그러나 기생을 가까이 하다가 타락하니까 하나님께서 떠나셨어요. 두 눈 뽑히고 맷돌을 갈다가 나중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그들과 함께 마지막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경건을 목숨처럼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경건의 두 번째 목적은 우리는 나그네 인생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7절 하반절에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여관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 년 만 년 사는 것 아닙니다. 다 이 세상을 떠날 날이 옵니다. 잠시 머! 물다 가는 것입니다. 종착역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는 나그네와 같아요. 한 나그네가 여행 중에 날이 저물자 대궐처럼 큰 집 앞에서 하룻밤 묵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집주인은 정중하게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은 여관이 아니니 저 건너편 여관에나 가보십시오.” 그러자 나그네가 주인에게 질문을 하면서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이 집에서 몇 대를 살았습니까?”, “16대째 살고 있다오.”, “그렇다면 그분들이 다 생존해 계십니까?”, “허, 어리석은 소리하지 마시오. 모두 세상 떠난 지 오래 되었소.” 그러자 이 나그네가 반색을 하며 “그렇다면 이 집이 여관방과 같지 않습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기를 16대나 하였으니 저도 하룻밤만 자고 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주인은 어쩔 수 없이 하룻밤만 묵는 것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대궐 같은 집에서 살면 뭐합니까? 영원히 사는 것 아니고 잠시 머물다 가는 것입니다. 자다가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종착역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종착역은 천국입니다. 예수님은 그 종착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 종착역에 가서 사랑하는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우리 성도들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은혜를 받고 나서 ‘천국에 가서 예수님 만날 생각을 하니까 내가 무얼 하다가 가면 예수님이 제일 기뻐하실까?’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니 많은 영혼을 전도해서 구원하면 제일 기뻐하시겠다고 생각하여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 후에는 꿈이 점점 더 커져서 우리나라 백성을 몽땅 예수 믿게 하는 목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 꿈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저는 참으로 축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차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살다가 주님을 만날 것입니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앤드루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 수 없이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책임을 지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철공소에서 노동했는데 그 고생을 하면서도 십일조와 감사헌금 생활을 철저히 하며 믿음으로 살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제철회사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셔서 제철회사를 시작했는데 사업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쪽지에 적은 어머니의 유언을 받았습니다. “너는 평생에 주님의 창고를 부하게 하여라. 그러면 네 창고가 항상 넘칠 것이다.” 얼마나 멋진 유언입니까! 카네기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대로 순종하기로 결심했어요. 제철회사에서 나오는 철을 팔아서 먼저 성전을 건축해서 하나님께 바쳤어요.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몰라요. 특히 그는 고린도후서 9장 8절 말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은혜 받고 카네기는 돈을 벌어서 선한 일을 많이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35세부터 자선 사업과 공부에 힘을 썼습니다. 그의 철강 사업은 날로 번창했습니다. 뉴욕시의 건축붐, 교량건설, 기차와 철도건설, 자동차 생산, 선박을 건조하는데 그의 철강은 없어서 못 팔았습니다. 그의 사업은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그는 자선 사업으로 카네기홀, 밴더빌트성, 애스터즈하우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고아원! 등을 건축해 기증했습니다. 그는 1901년 회사를 2억 5천만 달러에 팔고 자선사업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는 자기 재산의 90퍼센트를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10퍼센트를 유산으로 남겨주었는데 그 재산이 1천 8백억 원이었습니다. 카네기는 평생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 큰 복을 받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어떻게 살다가 주님을 만나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도 카네기처럼 살다가 주님 만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 년 만 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불러 가실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4장 13~14절 보면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 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항상 하나님 앞에 서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내가 살아 있고 시간 있을 때 일하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모르거든요. 두 번째로는 있을 때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건강 있을 때, 시간 있을 때, 능력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돈 있을 때, 기회가 왔을 때 해야 합니다. 다 사라지고 나면 후회해도 소용없어요.
3. 경건의 세 번째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대속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기에 경건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경건의 목적은 경건하게 살면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 때문에 경건하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율법주의적 경건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의 경건은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에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의 경건과 기독교의 경건이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경건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빚을 진 사람 같습니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은 빚을 지고 갚지 못하면 할 수 없이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빚을 갚기 전에는 자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빚을 져서 평생 갚을 수 없는 사람은 일평생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때 누가 그 빚을 대신 갚아주면 그 순간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대속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죄로 말미암아 큰 빚을 지고 마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 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대속함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대속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아무렇게나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거룩하게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 경건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도 주님 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1)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가 크기에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죄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죄를 대속함을 받을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내어주시기까지 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셨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의 피로 대속함을 받은 소중한 성도들이 어떻게 아무렇게나 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날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경건하게 살다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을 만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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