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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 (사53:4-6)
이 시간에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고난 당하셨는데 그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충만한 은혜와 복을 누리려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일단은 복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강력히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으로 주어진 복음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주님의 고난이 주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53:5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허물과 죄를 담당하심이란 우리 영혼 구원을 의미합니다. 영혼 구원이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 회복, 다음은 영혼의 소생과 기능의 회복, 그리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다 잃어도 영혼 구원만큼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임종환자들을 돕는 호스피스 봉사를 하던 한 자매님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게 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들을 돌보다보니 타 종교인들은 대부분 죽음의 공포감으로 맞이하는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죽음을 평안한 중에 맞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자매님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요? 예수의 공로로 영혼이 구원을 받은 것이 다릅니다.
2. 마음의 치유입니다.
4절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5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시고 평화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치유를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처 때문에 현재의 고통은 물론 미래에도 계속해서 고통을 당합니다. 이것을 히12:15을 보면 쓴 뿌리라고 하는데 이것이 나면 한없이 고통을 생산하고 또 남까지 괴롭게 합니다. 조선 왕조의 연산군이 왜 폭군이 되었습니까? 히틀러가 왜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까? 모두 쓴 뿌리 때문입니다. 이처럼 쓴 뿌리는 무섭습니다. 그래서 쓴 뿌리 나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쓴 뿌리도 그렇지만, 중국의 오만불손한 쓴 뿌리들도 염려 됩니다. 저들이 경제대국이 되기 전에 예수 복음으로 바꿔놓지 않으면 아무도 저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답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상처의 근본적 치료는 복음 외에는 없습니다. 즉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교통이 있을 때 치료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잘 아시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의 고통도 상처도 슬픔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35:10에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했습니다. 사51:11에도 동일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마음의 슬픔과 고통 이 시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다 치료받으시기 바랍니다.
3. 육체의 건강입니다.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합니다. 주님은 채찍에 맞으셔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고난당하신 이유는 성도의 영육간의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본래 죄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누리려면 이 예수 공로를 믿을 뿐 아니라 회개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을 주셔서 치료해 주십니다. 혹은 치료의 길을 내어 주십니다.
프랑스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에는 배낭에 책 두 권은 꼭 넣고 나간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이고 다른 하나는 파스칼의 팡세입니다. 파스칼이 팡세를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여동생이 불치병 안질에 걸려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처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동생 눈을 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파스칼이 기도를 마치고 동생을 찾아가 눈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오빠! 이상한 일이 생겼어요. 눈이 방금 나았어요.” 이 때 파스칼은 “나는 철학자의 하나님을 믿지 않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노라.” 했습니다. 이처럼 지금도 주님은 채찍 맞으신 그 공로로 병인들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4. 환경적인 회복입니다.
신28:15에 보면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받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도 범죄하면 기근 전쟁 역병 내란 짐승 등 환경적인 저주가 왔고 회개하면 악이 물러가고 환경이 회복되었습니다. 개인도 가문도 국가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저주도 속량하셨습니다.
그래서 고후8:9에 보면 본래 부요하신 주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에게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줄 아세요. 약속의 말씀의 선물입니다. 보이는 물질은 한 트럭 주어도 먹고 나면 사라지지만 부요의 말씀을 주면 그 말씀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케 해 주신 복음에 서서 부요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더 알아야 할 것은 부요하신 주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시듯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 이웃을 사랑함으로 가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스스로 가난하게 되는 진리까지 알아야 하늘의 상을 쌓습니다.
5. 대인관계의 회복입니다.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회복시키심입니다. 엡2:18에 십자가의 공로로 “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골3:13에서도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미국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인생살이에서 실패한 사람들 만 명을 표본 조사해 보았더니 흥미 있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들이 전문적 기술과 지식이 없어서 실패한 사람은 15%밖에 되지 않았고, 85%가 인간관계의 실패였습니다. 그래서 놀라 도대체 인간관계란 또 무엇이냐? 심층 분석해 보니까 이 사람들은 한결같은 부정적 의식이 가득했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신 버림당하심으로 인간의 관계를 바꾸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형을 만날 때 얼마나 대하기 역겨운 상대였습니까? 그러나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 뵌 것 같다고 했듯 모든 사람을 나의 천사로 알고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몹쓸 사람이다가 아니라 귀한 재목이다, 원수다가 아니라 은인이다, 방해자다가 아니라 협조자다, 보기 싫다가 아니라 보고 싶다, 나와 관계없다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분이다로 타인의 인간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복음으로 본 인간론입니다. 바울처럼 어떤 사람도 육체대로 보지 마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 가지면 대인관계에서 실패할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으면 대인관계가 좋아집니다. 반대로 신앙에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대인관계가 나빠집니다. 이것을 볼 때 인간관계란 예수의 공로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공로로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국가도 국제사회도 더욱 아름다워 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영적전쟁에서 승리입니다.
골2:15을 보면 우리의 원수인 정사와 권세 즉 마귀의 역사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주님을 아프게 고난을 주었지만 결국 자기를 못 박고 죽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승리가 있는 이상 사단은 성도들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 안에서 승리했다고 믿으세요.
고대 블레셋 전쟁에서 보여주듯 대장이 이기면 다 이긴 것으로 보았듯 성도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예수님의 승리의 공로로 승리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기셨으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들도 이긴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고난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십시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의 영육간의 강건함을 위해서, 하나님과 대인간의 회복을 위해서, 그리고 부요와 온전한 승리와 사명을 위해서 우리 대신 고난 받으셨습니다. 이 은혜의 복음에 서서 그 은혜를 누릴 뿐 아니라 이 고난의 주님을 깊이 감사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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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 (사 53:1-6)
[요약] 사53:4-5에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한다. 먼저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위한 것이다.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나면 마음의 어떤 상처도 아물 수밖에 없고 육체 역시 하나님의 손으로 강하게 붙들어 주신다. 또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한 것이다. 죄과와 죄성도 담당해 주셨다. 그러므로 이 은혜를 믿음으로 양심의 자유를 얻고 성령의 은혜를 받아 새 사람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은혜생활하면 삶의 형통함도 오는 것이다.
낮에 말씀 드렸지만 어린이들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에요. 주님이 나귀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다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잡히시고 고난 받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감사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예쁜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얼굴은 세상에서 그렇게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추했습니다. 딸은 어머니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이 싫어서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고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도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도시락을 빠뜨리고 학교 가 도시락을 학교에 갖다 주러 갔을 때 친구들이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누구니?” 그러자 여학생은 어머니 듣는 데서 “우리 집 식모야” 하고는 도시락을 빼앗듯이 교실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날 집으로 돌아 온 딸은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대들었습니다. “왜 학교에 왔어요? 이제는 창피해서 학교 못 다니겠어요.”
그 때 어머니가 울고 있는 딸 옆에 앉아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딸아! 엄마 얼굴이 이렇게 된 사연을 아느냐? 네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출근하시고 내가 바깥에서 빨래할 때 원인 모를 불이 났었단다. 집안에는 어린 너만 있었는데 그 때 불길은 온통 집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구하려고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 구해 오는 동안 심한 화상을 당하였단다.” 딸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너무나 감격하여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 안기고 어머니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 이 딸은 어머니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당하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그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감사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자랑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이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53:4-5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1. 나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랬습니다. 그리고 5절에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고난당하신 이유입니다. 병들 때 얼마나 아픕니까? 그러기에 우리의 그 아픔을 담당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작게 아프지 않았어요. 많이 아파야하셨습니다. 주님을 내리친 채찍은 가죽에 뾰쪽한 여러 구조물들을 붙여 한 번 치면 살을 파내는 아픈 채찍이라고 합니다. 견딜 수 없이 아픈 채찍입니다. 우리 아픈 질병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병들었을 때 얼마나 아픕니까? 병이 들면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아픕니다. 그것이 더 고통스러워요. 간이 나빠지면 권태와 짜증이 나고, 위가 아프면 외롭고 우울하고, 심장이 아프면 초조하고 불안하고, 신장이 아프면 두려움과 공포가 오고, 폐대장이 아프면 자포자기 비관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심포삼초에 병이 나면 위의 마음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심리적인 아픔이 더 고통스러워요. 이 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단이 얼마나 역사하는지 그러므로 몸이 약할수록 더 기도하고 미래를 대비해서 건강할 때 많이 기도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입어 마음과 육체의 고통을 예수 앞에 다 내려놓아야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를 받고 나면 마음의 어떤 아픈 상처도 흔적조차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체 역시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어루만져 주시면 우리는 모든 사람과 똑 같은 육체지만 치료해 주시고 그 고통에서 평안하게 하십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켜 주셔서 능히 이기게 합니다.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2. 나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5-6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나 자기 허물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죄 있는 우리를 죄 없다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죄과도 담당해 주셨고, 죄성도 담당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은혜를 믿으면 양심의 자유를 얻고, 이 은혜를 받으면 새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래서 갈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했습니다. 주님의 이 은혜로 의인되고 변화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의인 만드시기 위해서 구주가 희생 되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믿고 은혜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3. 나와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갈3:13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여기에 우리가 복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 대신 저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망할 것 주님이 대신 다 망해 주셨어요.
그러므로 예수 공로로 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만 있기를 바랍니다. 형통만 있기를 바랍니다. 이 복이 어떤 복입니까?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까지 받으신 그 복이니 우리는 반드시 복을 누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은혜 받아 저주는 다 물러가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다가오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깊이 기억하십시다. 나를 위한 사랑임을 믿고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나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와 복을 믿음으로 성령으로 누리십시다. 우리 모두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주님이 은혜를 누리고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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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에 채워야 할 것 (사 53:1-6)
이 주간은 교회적으로 고난주간으로 지키는 기간입니다. 모든 교인들은 이 기간을 통해서 경건과 절제, 금식과 회개, 자선과 구제를 통해 우리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더욱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본받아 따라가는 신앙을 배우는 때입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으로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 함을 얻는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슥13:1에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했습니다. 습3:16-17에도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는 것은 실망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고난을 대신 져주신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음을 믿음과 아울러 성령으로 이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먼저는 이 은혜를 누림이 곧 하나님께 보답해 드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려는 마음가짐이 영적으로 더 성숙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의 사랑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림도 다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서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누릴 자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할까요?
1. 희롱 당하신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체포당하신 후 얼마나 희롱과 모욕을 당했습니까? 당시 실세인 제사장 안나스와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온갖 곤욕과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천한 하속들이 예수님의 뺨을 치고, 눈을 가리우고 때리며 내가 누구냐고 선지자 노릇을 하라면서 욕했습니다.
헤롯에게 갔을 때도 예수님에게 기적을 시험해 보려 하면서 업신여기기 위해서 왕처럼 빛난 옷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의 판결이 내려진 후 로마 군병들은 왕의 옷과 비슷한 자색옷을 입힌 것도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왕관 대신 가시관을 씌운 것도 그리고 왕의 지팡이처럼 갈대를 쥐게 한 것도 그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때린 것도 다 희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희롱 당하심을 기억하여 희롱을 당해도 노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주의 일하다가 희롱 당해도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다 당하는 모든 거슬리는 악한 말들은 하늘의 상이 큰 것입니다. 이 믿음 가진다면 우리 마음에 무슨 갈등이 존재할 수가 있겠습니까? 혹시 나의 범죄로 당하는 고통일지라도 내가 잘못하여 저 사람이 악역을 하는구나 하면서 도리어 그를 축복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 십자가의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이사야는 메시야의 고난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했습
니다. 주님의 고난이 우리들이 범죄한 것을 대신 받으신 대속의 고난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머리의 죄 때문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시고, 우리의 손으로 지은 죄 때문에 양 손에 못 박히시고, 우리의 발로 지은 죄 때문에 두 발에 못을 박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은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까지, 그리고 하나님께 범한 죄 사람에게 범한 죄까지, 그리고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지은 죄 미래의 죄, 그리고 큰 죄에서 잊어버린 죄까지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두 가지도 아니고 한 사람 두 사람도 아니고 인류의 죄를 다 지셨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조그만 숨 돌릴 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고난은 우리가 받는 고난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고난은 주님이 도와주심이 있지만 주님의 고난은 그 중압감이 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혹시 죄 없이 고난당해도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기억해서 참아야 합니다. 미국 조지아주에서는 백인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로 어떤 사람을 16년간 복역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16년이 지난 후 유전자 검사를 받아 진범이 아님이 밝혀졌지만 그는 석방 되면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라도 오판한 판사와 배심원들을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고난당해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도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잊어야합니다. 이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것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4:12-14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는 심히 큽니다.
3. 채찍에 맞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사형수들에게 사형 집행을 하기 전에 채찍으로 때려 고통을 가했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이 채찍을 맞다가 죽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때 사용한 채찍은 여러 가죽 줄에 날카롭고 예리한 쇠붙이나 단단한 뼈를 쪼개서 붙여 이 채찍으로 사람을 치면 몸에 감겨 당기면 살점이 찢어지거나 정맥과 동맥이 끊어지는 등 고통을 준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런 채찍을 다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당하셨을까요? 이사야는 우리의 질고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마음의 상처와 육체의 고통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받아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 먼저는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늘 우리의 두루마기를 씻어 세마포 같이 희게 될 때 생명나무의 소성케 하시는 은총으로 상처는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동시에 순종해야 할 고난이 있습니다. 내 이웃을 위한 고통입니다.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웃을 위해 기도할 때 내 이웃의 상처를 우리가 대신 경험하게 되는데 그 때 이웃이 치료되는 기적이 나타납니다. 먼저 우리는 이 고통을 기도로 대신 지고 사랑으로 도와야 합니다. 그 때 우리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십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질고를 아는 자이신데 병들어 질고가 아니라 우리 대신 체휼하심을 말씀한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면서 주님은 그 고통을 몸소 다 경험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유 사역자라면 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사역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 분이 고통이 내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어느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그 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어느 다리 아픈 성도가 왔기에 기도해 주었는데 다리 아픈 성도는 낫고 그 대신 자기 다리가 아파서 걷질 못했다고요. 저도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풀어주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요 하늘의 상이 됩니다. 혹시 아버지께서 그의 육체를 치료해 주시지 않을지라도 그의 영혼이 치료 받고 천국에 평안히 간다면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워야 합니다.
이 남은 고난은 몸된 교회를 위한 수고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십시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개인의 자유와 편안을 위해 십자가를 지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직분은 다를 수 있으나 교회를 위하는 마음은 한결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의 종들을 협력하십시다. 주님을 대신하여 일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빌4:18-19에 바울은 자기를 도운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8-19)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서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대속의 십자가는 질 수 없으나 그 사랑을 마음에 간직할 수는 있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희롱을 당할 때나 고난을 당할 때나 병고를 당할 때나 주의 일에나 어떤 면으로든 주님의 고난을 감사하면서 그 고난에 동참하여 그 고난을 우리의 몸에 채우십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지혜롭고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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