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나타나심이 있는 교회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는 교회\"  


\"성령의 나타나심이 있는 교회\" <고린도 전서 12장> - 휴스턴서울침례교회 최영기목사님


여러분과 저는 신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시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모든 진리가 다 담겨져 있습니다만 이런 진리는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확실해 졌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에까지 기록되어있지만 이 진리는 3-4세기에 명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도 구약과 신약 전체에 기록되어있지만 이 진리를 명확하게 알게 된 것은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서였습니다.

성령님에 관한 진리도 오랫동안 희미하게 알아오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명확히 깨닫게 되고 체험되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서 성령님에 관하여 상고하겠습니다. 

  Ⅰ. 성령체험은 내용을 보아서 안다  

우리가 첫째로 알아야하는 것은

영적 체험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이리저리 끄는 대로\' 신들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이방 종교를 믿을 때에 신들린 경험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방 종교에도 영적 체험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고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할 때에 저를 당혹시켰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미국 원주민 인디언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데 이들에게도 영이 내려서 방언을 하고 이 방언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인디언 틈에 퍼져갔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은사로만 알던 저에게는 여간 당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악령도 방언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악령은 성령님의 은사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를 다 흉내낼 수 있습니다. 방언뿐만이 아니라 얼마나 영구적인지는 모르지만 병을 고치기도 하고 예언을 주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 성령의 은사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 당혹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령도 성령의 역사를 얼마든지 흉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현상만 보고서 다 성령의 역사라고 쫓아가도 안 됩니다.

영적인 세계에 관하여 회의적이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졌던 사람들이 영적인 세계에 접하게 되면 반대쪽 극단으로 가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거짓 예언자를 좇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악령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3절에서 바울은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이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수재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은 다음에 나오는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신 쫓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귀신이 들렸는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해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귀신이 들렸으면 이 말을 못한다는 것인데 100% 귀신이 들리지 않았으면 귀신의 영향력 밑에 있으면서도 이 말을 천연덕스럽게 합니다. 바울이 성령의 힘이 아니고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이런 의미는 아닙니다.

입으로만 하는 것은 귀신도 귀신 들린 사람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고백은 성령님의 임재 밑에 있는 사람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예수님은 아시고 예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고 예언도 하고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 24:23-24).

그러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까요? 말로만 주님이라고 하지 않고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 즉 순종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마 24:22).

그러므로 신비한 능력을 나타내고 능력이 있다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과연 성령님에 의하여 그런 능력이 나오는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려면 그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도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기 위하여서는 그 열매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5-16).

그러나 영빨이 있고 영력이 있다는 사람의 삶을 샅샅이 들여다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럴 때에 쉽게 분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은사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7절).

그러므로 성령 받았다는 분 혹은 성령의 은사를 가졌다는 분이 성령님의 인도 밑에 있는지 악한 영의 영향력  밑에 있는지를 알려면 교회라는 공동체에 주는 영향을 보면 압니다. 제가 한국에 가서 목회자님들을 만나보면 기도 많이 하시고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소위 신령한 교인들로 인하여 고통을 겪는 것을 종종 봅니다.

교인들을 불러서 예언의 말씀을 준다고 하고는 돈을 요구해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목회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 교회를 분열시키기도 합니다. 이처럼 공동체에 파괴를 가져오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는 아닙니다. 악령의 역사입니다.

언제인가 제가 설교에서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런 분들이 처음부터 악령의 영향 밑에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던지 교만해졌든지 해서 자신을 악한 영의 역사 밑에 놓았기 때문에 악령의 영향 밑에 들어간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할 때에 있었던 방언이라든가 예언하는 능력이라든가, 성령 충만할 때에 나타났던 현상은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신이 악한 영의 조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현상이 나타난다고 무조건 좇아가지 말고 또 자신이 영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키고 있거든 혹시 악한 영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 살펴서 악한 영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마태 복음 16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직후에 사단의 사주를 받아 예수님의 죽음을 만류하다가 \"사단아 물러가라\"라는 꾸중을 듣습니다(마16:23).

성령 충만한 베드로에게 영향을 미쳤던 사단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 스스로 살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유익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성령에서 시작하였다가 악령의 도구로 끝나지 않으려면 영적 체험이 있으신 분, 기도 많이 한다는 분들은 악령이 흉내낼 수 없는 것에 집중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순종과 섬김입니다. 보통 사람들보다 더 권위에 순종하고 더 섬길 때에 악한 영의 영향 밑에 빠지지 않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Ⅱ. 교회에서 성령의 나타나심을 기대해야 한다

오늘 12장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일치에는 다양성이 따른다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같은 성령님이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8-11절). 여기에서 바울은 성령님의 은사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조직을 말하라고 하면 우리들이 교회 사역부서를 꼽듯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은사를 손꼽고 있는
입니다.

이러한 것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제반 은사가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고린도 교회처럼 강렬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장 식구들이 손 얹고 기도했을 때에 치유가 일어났다는 소식도 심심지 않게 들립니다. 성령 체험 시간에는 방언이 터지기도 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는 분들도 생깁니다. 저도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에게서 악령을 좇아 낸 적이 적어도 두 번 있습니다.

그러나 왜 많은 교회에서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이 없을까요?   기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기가 힘이 듭니다. 기대가 없으니까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막6:5-6).

기대가 없으니까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아니하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니까 기대감이  더 없어지고. 이러면서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히도 우리 가운데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여러 모로 경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큰 기대를 하십시다. 그래서 더 큰 역사를 체험하십시다. 이때에 이런 사이클이 반복 될 때에 기대와 초자연적인 역사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사도 행전과 같은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간구할 때에 우리는 한 가지에 편중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성령님의 많은 은사들 가운데에서 방언만을 꼽아서 영적인 사람이라는 증거로 부각시켰던 것 같습니다.

13장 1절에 보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라는 말이 나오는데 고린도 교인들은 방언을 천사의 말이라 생각하고 높였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몇 번을 반복해서 성령님은 한 분이지만 나타나심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4, 11절).

지금도 이러한 성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한 때에는 성령 충만의 증거로 방언을 꼭 해야만하고 방언을 하지 못하면 2등 교인인 것처럼 취급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한 가지 은사가 부각되는 것은 건강한 현상이 아닙니다. 어떤 교회는 귀신 쫓는 것을 부각시켜서 그런 교회에 가면 모든 것을 다 귀신과 관련지어서 생각합니다. 감기도 귀신을 쫓아 고치고 우울증도 귀신을 쫓아 치료하려 합니다.

어떤 교회는 또 병 고치는 것을 부각시킵니다. 사람이 모여드는 것도 병을 고친다고 해서 그런 것이고 교회의 모든 사역의 초점이 병 고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에 편중될 때에 무리가 생기고 오류가 발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나타나심을 간구하고 기대하면서 또한 한 가지 은사에 편중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성령님의 은사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교회의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합니다. 교회의 사명이란 영혼 구원하여서 제자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명에 집중할 때에 주님의 진정한 대변인이 되기를 설교자에게 지혜의 은사를 주십니다. 복음을 순수하게 잘 가르치기를 소원할 때에 지식의 은사를 주십니다.

의료 혜택이 없는 곳에서 사역하면서 질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안타깝게 기도할 때에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시고 오래 동안 미신을 믿어서 악령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할 때에 귀신을 쫓든지 기적을 나타내는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지만 특정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자랑하지 않고 특정 은사를 꼭 받아야만 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초점이 성령의 은사에 맞추어지지 아니하고 사명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은사로 인하여 교만해지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기 위하여서는 사명이 은사보다 선행함을 깨달아야합니다. 사명을 깨닫고 사명을 위하여 일하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을 사모할 때에 성령님께서 그 사역에 필요한 은사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Ⅲ. 참된 하나는 다양성을 요구한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참된 일치에는 다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방언만이 성령의 은사인 것처럼 생각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참된 일치는 다양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일치는 다양성을 갖고 있다는 예로 사도 바울은 삼위 일체 하나님을 예로 듭니다(4-6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자 3위이십니다. 두 번째로 몸을 예로 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갖고 있습니다(12, 14절).

그러므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서는 획일적인 것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수용해야합니다. 다양성이 없을 때에 그 공동체가 어떻게 보일까 를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온 몸이 다 귀이고 온 몸이 다 눈이면 어떻겠느냐고 몸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을 수용하는하나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면. .

첫째로 상호 의존성을 깨달아야합니다(13-16절, 23절).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지체도 고통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옆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을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그 영향은 우리에게도 미치게 되어있습니다. 싫으나 좋으나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어떤 지역에 있는 한 교회 목사님이 간음죄를 범해서 넘어지면 그 교회뿐만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전도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 교회가 영광을 받으면 다른 교회도 영광을 받습니다.

어떤 침례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와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전에는 침례 교회라고 하면 이 지역 사람들이 알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침례 교회처럼 큰 교회가 생기니까 다른 침례 교회도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한 목장이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목장도 고통을 받게 되고 영광을 받으면 다른 목장도 영광을 받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면 교인들끼리, 목장끼리, 교회끼리 어떻게 대해야할지 답이 나올 것입니다. 서로를 올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올라갑니다. 자녀들 앞에서 아내를 높여주면 아버지인 자기의 위상이 올라가고 남편을 높여주면 아내인 자기의 위상이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비다.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서는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합니다(21절). 인간은 자신의 장점은 눈에 잘 뜨이는데 남의 장점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반대고 남의 약점은 눈에 잘 뜨이는데 자신의 약점은 눈에 달 뜨이지 않습니다.

자신은 항상 손해보고 살고 이용만 당하고 배신만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증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런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해주기 위하여서는 상대방의 가치가 눈에 뜨이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합니다. 성령님의 조명이 필요할 정도로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건강한 공동체가 되기 위하여서는 약한 자가 귀한 것을 알아야합니다(22-23절). 약한 것이 심장이나 내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뼈로 감싸 주셔서 보호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약하고 별 것 없어 보이는 것이 하나님 눈에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생활에서는 저런 사람은 없어도 돼 저런 사람은 없어져야 돼. 이런 식의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는 얘기입니다만 제가 처음 부임하여서 저를 대적시 했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놓고 보니 그런 분들이 있었던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비판적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으니까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하여 말도 행동도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사역의 터전이 잘 닦아졌던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라면 주님께서 필요해서 지체로 주셨을 것입니다.

귀한 줄 알고 무시하거나 제거하거나 하지 않고 불필요해 보이는 사람, 없어도 좋을 것 같은 사람들도 귀하게 여겨서 건강한 교회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