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
-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쳐준 것을 흠집내고자 마귀의 힘을 빌어 한 것이라고 무차별 공격하며 대중들의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인기를 막아보고자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이제는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당신이 메시야가 맞다면 표적을 보여달라고 막가파식 어거지를 쓰고 있는 이들을 바라보시며 주님은 본 비유를 통하여 매우 중요한 영적교훈을 남기셨습니다.
2. 본문 (43-45절)
-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쫓겨나갔습니다. 물없는 안식처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던 중 쫓겨났던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며 가 보았더니 그 집에 주인은 없고 깨끗이 소제되고 더 멋지게 수리되어 있었습니다 (귀신의 관점에서!). 그래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다시 그 집을 차지함으로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황폐케 되었습니다. 이 악한 세대가 이렇게 될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3. 비유 해석
-‘사람’(43절),‘집’(44절) 그리고‘이 악한 세대’(45절)는 다 같은 것입니다. 43절을 보면 귀신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뭔가에 좇겨났습니다. 이 쫓겨난 귀신은 자신이 거할 “물 없는 새 집”을 찾았다녔습니다. 그런 집을 찾지 못하자 옛 집을 다시 가보았는데 귀신들이 거하기에 최상의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7귀신이 거하는 더 악한 상태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반드시 알아야 할 영적교훈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4. 교훈
1) 우리의 몸은 무언가를 담는 그릇입니다.
-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정체성과 가치가 결정됩니다. 사람의 몸도 똑같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한 사람은 그의 몸엔 더러운 귀신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의 생각과 행동이 더러웠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그 어느 때보다 몸 치장에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개막식때 축가를 부른 소녀의 노래가 립싱크였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원래는 그 목소리의 진짜 주인공이 직접 나와 부를 예정이었는데 뻐드렁니라 중국의 이미지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그렇게 연출했답니다. 우리 속물근성의 한 예일 것입니다.
-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속 사람의 아름다움을 볼 때 감동을 먹습니다. 겉 사람의 아름다움은 정말 한 순간뿐입니다. 바울의 예화를 들어 봅시다. 한 집에 다양한 그릇, 금, 은, 나무, 질 그릇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쓰는 그릇은 속이 깨끗한 그릇만 쓰는 것입니다 (딤후2:20-21).
- 뜨거운 피를 갖고 있는 청년 시절엔 정욕의 유혹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사는 세상 사람들과의 사귐을 피해야 합니다. 그대신 신앙생활 잘하는 신실한 성도들과 친구로 사귀어야 합니다. 의를 좇고 믿음을 좇고 사랑을 좇고 화평을 좇아야 합니다. 쓸데없이 말다툼만 일으키는 유익하지 않는 말은 아무리 재미있다해도 중단해야 합니다 (딤후2:22-23). 그럴 시간에 성경 말씀을 읽는 일에 힘쓰십시오.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던 영적 거인들치고 성경말씀을 사모하지 않았던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성경을 잘 모르는 성도는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유는 그가 게으르고 고집불통이거나, 아니면 지도하는 목사가 직무유기하거나 둘 중 하나일겁니다.
2) 때가 되었는데도 열매없는 사람은 버림받습니다.
- 이 사람의 결국이 이처럼 비참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귀신이 쫓겨나갔다는 것을 볼 때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고 귀신에게서 놓임받은 후 그는 영적인 성장을 추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영적인 개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교회에 참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권면을 봅시다.
① 막11:13-14 (무성한 잎사귀로 위장한 무화과나무),
② 요15:1-4 (열매없는 가지에 대한 경고와 열매맺는 비결)
-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늘 앞으로 달려나가는 삶, 늘 성장을 추구하며 살았던 사도바울의 삶은 늘 우리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빌3:13-14). 하나님께 받은 소명을 붙들었습니다. 그 한 목표를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혹시나 교만해져서 느슨해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왕년에 내가 어쨌니하는 과거를 잊고 부르심의 푯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그날에 받을 상을 소망하며 살았던 바울입니다. 이런 바울을 주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사용하셨는지 모릅니다.
- 많이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배워도 그것이 나를 바꾸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설교내용을 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쓸데없는 짓입니다. 이 설교 가운데 내 가슴에 꽂히는 주의 음성 한가지를 붙드십시오. 그리고 회개하시고 결단하십시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자신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사랑받게 되어있습니다. 고쳐야 하는데도 고집부리며 그냥 서있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 바꾸지 않으면 죽습니다.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내 영적 성장에 장애물입니까? 그것을 제거합시다. 이 정도면 됐지 라는 생각에 안주하는 순간 당신은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내 자신에게 채찍질 합시다. 자전거가 앞으로 달리려면 계속 페달을 밟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습니다.
3)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새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 롬6:17-18, 21-22을 읽읍시다. 우리의 옛 주인은 내 속에서 나를 주장해온“죄”였습니다. 그때 우리 삶에 맺혔던 열매는 부끄러운 것들뿐이었습니다. 그 결국은 사망, 즉 멸망이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 우리를 마음대로 주장하고 있는 이 죄의 실체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롬7:19-20).
-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나서 상황이 싹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들어오신 성령님께서 옛 주인인 죄를 내어 쫓아버리셨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새 주인으로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예전에는 아무리 선을 행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음란물을 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보고 있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이제는 화내지 말아야지 결단해놓고는 어느 새 화내고 있는 죄의 노예였습니다. 미움의 종, 질투의 종, 염려,근심,걱정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욕심의 종... 그런데 성령님이 새 주인이 되셨을 때 내 삶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사랑하게 되고, 정욕의 욕구를 이기는 자가 됩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됩니다.왜요? 그 이유는 딱 하나,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나의 새 주인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 귀신의 안식처는 성령(=물)없는 곳 한 곳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꼼짝못하는 사람은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을 힘입은 주님이 귀신을 좇아내실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마12:28). 성령충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옵션이 아닌 필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 1년에 한번 수양회때 별식으로 한번 경험해 보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내가 세상에 한눈 파느라 영적태만에 빠졌다면 성령님께서 근심하시고 경고를 주십니다. 그런데도 계속 고집피우면 성령님이 역사를 중단하십니다. 이때부터 그의 내적상태는 비참하게 되어버립니다. 일곱귀신이 들어와 난장판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방심하면 죽습니다. 이 전투에서 방심하지 않도록 서로 권면해주면서 승리해야 합니다. 이기는 자가 됩시다.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시는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