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분명한 원칙을 좇아 사는 사람이 있고, 하루 하루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무원칙의 사람, 혹은 임기응변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국가를 선진국이라고 할 때는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된 인생의 교훈들을 원칙으로 승화시켜 그 원칙을 좇아 살아서 더 효율적인 삶을 이루어 가는 국가를 말합니다. 제가 이번에 아프리카 3개국을 방문하면서 지울 수 없는 생각이 “이들은 왜 이렇게 가난의 대물림을 하고 살아갈까?” 였습니다. 그 근본적 이유 중에 하나가 아마 보다 나은 삶의 변화를 보장하는 원칙들을 삶에 적용하는 것이 참 약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변화된 성도들에게 새 삶의 원칙에 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거와 전혀 새로운 삶이기에 그 삶에 빨리 적응하고자 힘쓰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유학생활하는 동안 단 한번도 한인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제 삶을 선교사로 헌신했기 때문에 빨리 외국문화에 적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많은 이민자들이 그곳의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예 한인들이 모이는 곳에만 가고 하는데 처음에는 편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이 남들보다 점점 도태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라면 신자들의 삶을 위한 매뉴얼인 성경을 부지런히 익혀 성도의 삶에 빨리 적응하여 남보다 더 빨리 성장해 갈 것입니다. 이 원칙을 몸에 배지 못한 성도들은 과거에 살았던 세상에서의 삶과 신앙의 삶의 분별을 잘 못해 참 오랫동안 혼란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복음으로 새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면 꼭 명심해야할 몇가지 신앙원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4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 그 첫 번째 원칙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시90:10에서 모세는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임을 고백했습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 삶이 얼마나 고난의 연속인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속상한 일에 직면해 있을 때 성경에서 이런 생퉁맞은 구절들을 접하면 정말 성경을 덮어 버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힘든 하루 하루 살다 겨우 교회에 나왔는데 목사님에게서 이런 황당한 설교를 들을 때 한숨부터 나올 때가 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먼저 이러한 권면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잠시 살펴보도록 합시다. 고후11:23-27을 읽어 보면 사도바울은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현재 자신의 입장이 그렇게 기뻐할 만한 처지가 전혀 못됩니다. 감옥에 갇혀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항상 기뻐하라고 할 때는 그만한 분명한 이유와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 그가 말하는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부모님 장례식같은 슬퍼해야 할 장소에서 실실 웃고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지각없이 행동해선 안됩니다. 울어야 할 장소에선 울어야지요. 모든 범사가 그에 맞는 때와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3:4). 바울의 모습을 봅시다 (고후1:8-9 그도 소망을 잃어버릴 순간이 있었음을 고백, 고후2:4-5 많은 눈물로 편지를 쓰기도 했음, 고후11:28 교회를 향한 염려속에 매일 살았음).
- 사도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내적 기쁨 (확신)”을 말합니다. 그 어떤 환경도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성도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내적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라는 수식어가 앞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과 연합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주님께서 나의 삶 전반에 관여하십니다. 주님이 누구입니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신 뒤 부활하시어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 말씀을 그대로 순수히 믿고 삽시다. 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환경 앞에서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환경, 어떤 절망의 순간에 직면해도 주님과 이러한 혈맹을 맺고 있는 성도라면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끊임없이 옛 삶의 모습인 근심과 걱정, 불평과 원망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무장하여 끊임없는 세상의 문제들 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 6~7절을 읽읍시다.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앞으로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4절을 암송하고 6-7을 연이어 암송합시다. 제가 아프리카 방문시 그곳 신학생들과 목회자들 앞에서 영어로 설교할 때도 처음에 몹시 떨렸습니다. 10년 넘게 영어 설교를 해보지 않았고 등치고 크고 시커먼 아프리카 사람들이 좀 위협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때 빌4:6-7을 계속 암송했습니다. 약속대로 주께서 내 마음을 지켜주셨습니다. 이 구절을 암송안했다면 설교하면서 계속 두 다리가 흔들거렸을 것이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죽을 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번번히 내 마음을 붙들어 주셨고 모두 큰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사업의 어려움, 건강의 어려움, 공부의 어려움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합시다. 모든 문제든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여 주님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며 승리하며 살아 갑시다. 할렐루야!
2.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 두 번째로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상대를 향한 너그러운 마음, 용납하고 인내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주님은 화목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죄인들의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허시고 둘을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관용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좁은 마음으로는 상대방을 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간의 관계가 깨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마음이 좁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을 잘못했습니다.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데도 마음을 닫고 열지를 않습니다. 마음이 좁기 때문입니다.
- 성도는 그 무엇을 잃어버려도 사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실수를 그 사람을 얻는 좋은 기회로 삼을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천만원의 손해를 입혔습니까? 빨리 계산해야 합니다. 천만원인가?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의 가치가 물론 천만원을 초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할 이유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주님 앞에 설날이 가깝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주님 앞에 설 그 날을 잊지 않고 사는 자들입니다. 마음대로 살아선 안됩니다. 주님에게 그 큰 관용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 것 갖고 삐치고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은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주님께 받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주위 사람들에게 갚다가 왔습니다 고백할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누구한테든 관용을 베풀며 삽시다. 너그럽고, 인자함이 성도의 얼굴임을 잊지맙시다. 저부터 힘써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