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6절/ 자기 자랑거리에 파묻혀 참 좋은 것을 보지 못했던 바울 <신앙의 치명적 장애물 : 자기 자랑>
- 지난 주 본문에서 (3:1-3) 기독교의 본질에서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이단들, 즉 자기를 자랑케 만드는 자들을 바울은 개들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오늘은 그 바울 자신이 과거에 얼마나 자기를 자랑하며 살았던 자였는지를 고백한다. 자신의 생생한 실례를 통해 빌립보 성도들이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신앙성장에 치명적 독이 되는지를 일깨우고자 함이다.
- 바울이 한때 자신을 우쭐케했던 자랑거리들: 국적 (현재 지구상의 최강국가, 최고 문명국가?), 부모의 직업, 학력 (최고학력? 유학파? Ph.D...), 실적 (회사경력, 업적...), 현재 지위 (과장, 차장, 부장, 상무,전무, 대표이사,회장, 의사, 교수, 변호사....)
- 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자인가? 성경은 이에 대한 답을 매우 단호하게 말해준다. 바로 “파산된 자아”이다. 하나님 앞에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신을 볼 때만 그 때 비로서 하나님의 은혜는 임하기 시작한다. 복중의 복, 최고의 복은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듯이 “심령이 가난한 복”이다.
- 신8:1-3. 출애굽의 은혜는 그들이 올데 갈데 없고,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임했다. 출애굽한지 1년이 지난 후 그들은 가나안의 입성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순종하겠다던 그들이었다 (출19:8). 그러나 그 순수한 신앙은 아침 이슬처럼 어느덧 사라져버렸다. 하나님없이 살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의 발길을 광야로 내 모셔야 했다. 그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광야, 물도,식량도,안식처도 없는 그야말로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신앙훈련소로 40년 입소시킨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낮추시고) 하늘의 만나 (은혜)를 통해 생존케함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신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우치셨던 것이다.
- 자기 자신에 심취해 있던 때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잘못된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 전혀 볼 수 없었다. 자신이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꿈도 꿔본적이 없었다. 성경의 율법을 다 지켜 살았던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그의 삶이 오히려 더욱 자신의 영적실체에 대하여 장님되게 만들었다. 바울의 자기 의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그의 인생을 송두리채 뒤집어 엎는 놀라운 일을 체험케 하셨다. 바로 바울이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박멸시키려던 예수교의 수장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그 예수님과의 만남은 꿈인지 생시인지,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신비체험이 아닌 너무나 분명한 인격적인 만남이었다. 이 만남으로 바울 자신은 물론이고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쓰여지게 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변화된 바울의 고백과 각오가 다음 내용이다.
2. 7-9절/ 가장 고상한 것을 얻기 위해 지금까지 유익했던 것들을 다 포기한 바울
- 7절/ 내게 유익하던 것 : 이 세상의 삶에 정말 유익한 것들, 나를 높여주는 것들, 나를 더욱 자랑거리가 많게 하는 것들 (신분, 학력, 경력, 업적...).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자랑거리를 많게 만드는 이런 것들을 다 해로 여기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 왜? 그것이 더 중요하고 고상한 것을 얻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 한 다른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놓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TV가 재미있는 순간 그토록 중요한 공부는 뒷전으로 밀리게 마련이다.
- 바울 자신도 예수에 대한 별별 소문을 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그보다 더 탁월한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그것을 돌아볼 이유가 없었다. 예수에 매혹되어 좇아 다니는 자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이랬던 바울이 오히려 예수에 미친자가 된 것이다. 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바로 만났기 때문이다. 왜 신앙생활에 열정이 없는가? 예수님을 바울같이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내 삶에 만족하고 자긍심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절대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 없다. 교회는 폼나고 고상하게 다닐 수 있고, 교회 직분을 자랑하며 살 수 는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나고, 그분을 온전히 섬기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자기 의로 가득했던 바울의 삶에 주님은 찾아 올 수가 없었다. 내 생각, 고집, 계획이 가득하면 남의 이야기가 하나도 들어오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은 바울의 강한 자기 의로 가득찬 그의 마음부터 깨부숴야 했다. 3일간의 충격속에 바울은 식음을 전폐할 수 밖에 없었다. 바울의 자기 의로 가득찬 자아가 파산된 자아, 무너진 자아가 되었을 때 성령은 물붓듯 부어졌다. 자기가 구원받아야 할 죄인임을 인식하는 마음에 성령은 임하는 것이다. 이 진리의 성령이 임하는 순간 바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졌고 예수가 누구인지 바로 보게되었다.
- 이제 지금까지 이 세상의 보배로 여기며 추구했던 것들, 그것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아낌없이 바쳐왔던 것들이 한 순간에 너무나 초라하고 유치한 것들로 전락해 버렸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바울에게 가장 고상한 것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의 삶은 예수를 알아가고 그분을 경험하고 그분을 더 가까이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 주님의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묵상하면 할 수록 자신이 얼마나 극악한 죄인이었고, 교만한 자였는지, 헛된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왔는지, 주님이 핏값주고 사신 교회를 박멸하는데 앞장서며 그것을 자랑거리로 살아왔던 자신이었다. 그러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다 덮어주시고 사랑의 손으로 감싸주시며 사명을 주신 주님의 은혜 앞에 바울이 진짜로 철이 든 것이다. 지난 날의 그 무지하고 수치스런 삶을 다 덮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자녀가 철이들지 않는 한 부모의 내리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철이 들고 나서야 부모의 은혜를 깨닫고 눈물 흘리며 부모의 사랑에 마음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 참 보배인지를 이제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과정까지의 긴 세월을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시며 참아주시는 것이다.
- 이제 발견한 이 보배를 바울은 절대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결단했다. 지금까지 자랑거리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똥”으로 간주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보배를 추구하는데 자꾸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었다. 누가 성적이 올라가는가? 방해가 되는 다른 좋은 것들을 “똥”으로 바라보는 각오를 한 자들이 성적이 올라가게 되어있다.
- 우리의 삶에는 이 세상이 제공해주는 무수한 좋은 것들이 깔려있다. 이 가운데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붙들고 살기 위해선, 그분을 배우고, 경험하고, 동행하며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선 그 모든 것들을 똥으로 여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 우리의 남은 인생은 이 세상 것을 얼마나 \"똥\"으로 여기며 사는 싸움이다. 내가 자랑했던 것들을 참으로 똥으로 여길 때 우리는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을 것이고, 더 많은 영적 열매는 맺혀질 것이다.
- 이 세상 것을 \"똥\"으로 여기고 살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바로 “하나님의 의”다. 이것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인간의 행복은 바로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주어진다. 하나님과 화평하기 전에는, 즉 죄의 문제에서 해방받기 전에는 그 누구도 참된 행복은 불가능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 최고의 보배가 바로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숨겨져 있음을 바울은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깨달아 지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은 한마디로 \"똥\"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바울에게 예수님은 “의”의 옷, “사명”의 옷, “성령”의 옷을 입혀주셨다! 우리의 삶이 주님을 알아가는, 이 최고 고상한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이 버려지는 삶이 되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