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승부수

2009년 2월 8일 : 신앙인의 승부수(갈3:1-9)
 
  인간의 생존 현장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수 싸움입니다. 이 수 싸움의 자리에 가장 필요한 것이 참고 자료입니다. 이 자료를 잘 분석하여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수 싸움에서 빨리 대처하여 고지를 선점할 수 있어야 생존 현장에 자신의 입지를 견고하게 구축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잘 운영되어 결실을 보게 되었을 때에 그 사람을 최고 경영자(CEO)라고 세상은 정의를 내립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지극히 상대적인 자리에서 되어지는 것이라서 연속성을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 기대심리가 무너지면 후폭풍은 더 무섭게 생겨나는 법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날로그 시대보다 디지털 시대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더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시대가 어떻게 변할지라도 인간의 삶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 가치가 물질적인 자리가 아니고 영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성도는 영적인 존재인 자신을 발견하여 그 자리를 끊임없이 열어 가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자리를 열어 주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본문은 그 신앙인의 자리에 신앙인의 삶이 무너져서 멈춰질 위기에 놓여진 현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앙인의 승부수를 던지자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살아온 신앙인의 자리가 헛되지 않기 위함인 것이며, 하나님께는 성도를 회복해 주시는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인생의 길목에는 반드시 두 개의 길이 있습니다(1).-“누가 너희를 꾀더냐”
  
  「꾀다」의 자리는 인생의 자리에 두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단순히 마음이 끌려서 유혹을 받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저지른 일들을 보면 단순한 유혹의 자리라기보다는 무엇에 끌려 들어가는 자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무섭고 어처구니 없는 삶을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두 실체의 자리에는 단순히 내 마음의 자리가 두 모습으로 분리되어 유혹을 받는 자리가 있는가 하면(tempt), 사람의 마음의 자리가 마법에 걸려서 제재가 되지 않는 자리가 있습니다(bewitch). 전자 곧 단순히 마음의 자리가 두 모습으로 나뉘어져 유혹을 받는 자리는 인간이 약하다는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기에 사람은 유혹의 대상이 되고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를 아프게 하고 우리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의 약함의 자리를 끊임없이 붙들고 그것을 이용하는 실체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바울을 통해 말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인간 속에는 단순한 약함의 자리가 아니고 그 약함에 마법을 걸어서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실체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도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의 역사라고 증거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야 인생은 승리의 축복을 누리면서 자유하는 삶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축복된 삶을 위해 예수님은 성령님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고, 그 성령님은 우리의 그 약한 뿌리를 붙들고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면서 그것을 뽑아 주시는 것입니다(롬8:26). 그 복을 받은 바울이 노래하기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고 한 것입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길은 나를 이렇게 세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기쁘게 받아 주시는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그 예수님을 고백할 때에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이 성령님의 사역의 축복을 누렸는데 예수님이 받아 주시는 은혜의 자리를 버리고 자신의 힘으로 하겠다고 고집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로 열어 주시는 것이지만 마법은 자신의 수고를 앞세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자리에서 열어 갑시다. 거기에 나를 위한 풍성한 자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영적인 삶 곧 신앙생활에 승부수를 두는 성도가 됩시다.

2. 나를 위한 복된 세상을 바로 압시다(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두 개의 길이 있어서 나를 꾀어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 두 개의 길을 다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넘어지게 되고 나 자신이 원치 않는 자리까지 연출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두 개의 길 에는 승리의 길과 패배의 길이 있기에 우리는 반드시 승부수를 두어야 합니다. 패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며 승리를 싫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승리의 자리나 패배의 자리가 자신의 선택 곧 자신이 좋아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곧 어느 것이 자신을 위한 복된 세상인 것을 바로 알자는 것입니다. 내 육체 곧 마법에 걸려 사는 자리는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성령님이 이끌어 가시는 자리는 내가 좋아하는 세상을 뛰어넘는 세상이며, 내가 좋아하던 것을 수정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나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과 나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을 뛰어넘는 세상의 자리는 너무나 다른 세상인 것입니다. 이 두 세상에서 나를 세워 주는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우선이 되는 세상에는 항상 후회와 상처가 지워지지 않지만 나 자신이 좋아하는 세상을 뛰어넘는 세상에는 서로를 세워 줄 뿐 아니라 어떤 자리도 품을 수 있는 온유함으로 자신을 열어 간다는 것입니다. 내 육체가 좋아하는 세상은 먼저 자신을 편하게 해 주는 것 같고 지금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이기에 그 맛을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람에게도 보여줄 수 있으므로 자신을 세우기에 충분하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공정하신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곧 성령님이 이끄시는 세상은 그 어떤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과 그 어떤 세상도 세워 주신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게 합니다. 그 자리가 바로 예수님 안에서만이 우리에게 열어 주시는 축복의 에덴 동산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우리를 진정으로 위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면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과 함께 성령님이 이끌어 주시는 세상을 열어가는 성도로 세상을 향해 승부수를 두는 자가 됩시다. 그 자리에 자신을 위한 복된 자리가 있습니다.

3. 하나님이 세워 주심을 믿고 살아 갑시다(6).
  
  성도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성경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은 그 말씀 속에는 인생의 승부수를 두며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가문적 배경이 좋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 자신도 철저히 자기 보호의 벽이 두터웠던 사람입니다. 이런 인간적 배경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찾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는 사람을 세워 주실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부족한 아브라함일지라도 자기 인생의 축복을 위하여 승부수를 두었던 자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성경은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 11:19).” 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하신 것은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닫아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반드시 세워 주실 것을 믿었다는 것이요, 그래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요구하신 것은 아들 대신에 이미 양을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으로 그 자리에까지 오는 수고만 요구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준비 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만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큰 사랑과 은혜를 받았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이 은혜의 자리를 닫아 버리고 자신도 하기가 힘든 자신의 업적 곧 자기 몸으로 보여 주는 삶을 고집하며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무너지는 소리만 크게 들릴 뿐 자신을 세우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라함도 자신의 몸으로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세워졌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서 주신 말씀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워 주시고자 하시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13)”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다는 믿음의 자리에다 승부수를 두며 살아 갑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인생의 길목에는 승부수를 두어야 하는 갈림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길에서 승리와 패배의 자리가 나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나를 위한 풍성한 자리가 있음을 알고 갈림길에서 성령님이 더 복된 세상으로 이끄실 때에 순종하며 살아 갑시다. 그 자리에 나를 위한 복된 자리가 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께는 나를 세워 주시는 계획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한 자리는 오직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자리를 잃어 버리지 말고 신앙적 승부수를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