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자로 삽시다

: 더 나은 자로 삽시다(마11: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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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고향에 살면서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는 일로 하루 해를 보내곤했습니다. 소년은 그렇게 호수에 돌을 던지면서 고향에서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돌멩이를 던지는데 햇살에 돌멩이가 반짝 빛이 났습니다.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 보니까 그것은 금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소년은 그동안 돌멩이가 아니라 금덩어리를 호수에 던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간이라는 금덩어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소중함을 나타내는 우화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습니다. 이것을 더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기회를 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회를 사되 가장 많은 기회를 사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매일 매일의 상황이 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탈무드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시간은 멈춰 있고 인생이 흘러갈 뿐이라고 했습니다. 시간은 변함이 없는데 인생의 모습만 사라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의 자리를 무시한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의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것은 더 나은 자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인데 오히려 그 은혜가 썩어서 악취를 풍기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더 나은 자로 세상을 살아서 자신의 자리에서 반석 위에 세운 축복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래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더 나은 자로 살아가는 지혜는 무엇입니까?

1. 은혜의 자리를 지워 버리지 맙시다(20).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이라는 보석 같은 말씀을 선포하신 후에 마지막 결론 부분에서 주신 말씀이 반석 위에 세워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나에게 주신 은혜가 지워지지 않고 길이길이 새겨져 있어야만 그 복이 나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석과 대조되는 자리를 모래밭이라고 했습니다. 모래는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걸작품을 만들어서 세워 놓아도 비바람이 몰아치면 흔적도 없이 지워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모래밭을 금지하신 것이 아니고 모래밭을 반석과 함께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선택의 자리에서 미래를 세워 나가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반석보다는 모래밭을 선택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대한의 자유 곧 최상의 자리를 선택하는 능력을 주셨는데 인간은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합니다. 이 선택의 자리에서 인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새겨 놓아야 하는 것은 쉽게 지워 버리고 빨리 지워버려야 하는 것은 길이길이 새겨 두기 때?都求? 그래서 프랑스 격언에는 「피해는 모래 위에 새기고 은혜는 대리석에 새겨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보다는 반석 위에 주초를 세워 집을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생 행로에서 집을 짓는 자리는 인간이 받은 축복의 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자리에서 자신의 업적으로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버리는 모습과 자신이 큰 은혜를 입어서 이 축복의 자리에 세워진 것을 알고 그것을 끝까지 존속시키면서 살아가는 두 종류의 인간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집을 모래 위에 짓지 말고 반석 위에 주초를 세워 집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나 자신이 은혜를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고 그 은혜의 자리를 지워 버리지 말고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자리에서 세울 때에만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큰 홍수 앞에서도 이겨내며 버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현상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오히려 더 악한 자리에 세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기억해도 부끄럽지 않은 복된 은혜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지워 버리고 전혀 은혜를 받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특별히 찾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세워주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이 은혜를 지워 버리지 않을 때에 성도의 자리에는 축복된 변화가 자리를 잡게 되며, 평안의 울타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사람으로 살아 갑시다. 여기에서 더 나은 자로 세워짐을 볼 수 있게 됩니다.

2. 더 좋은 이름으로 세워 집시다(21,23).

  세상에는 상대적 관계 속에서 모든 것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서로를 비교할 수 밖에 없으며 그 비교 평가 받는 자리가 사람이 받고 사는 대접의 자리입니다. 그 대접 받는 자리가 공정하다고 생각이 될 때에는 삶속에서 평안을 가지게 되지만 그 대접의 자리가 불공정하다고 생각이 될 때에는 삶이 힘들어지면서 원망과 함께 자신의 존재가 초라해지고 서글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불공정의 자리에는 자꾸만 듣지 말아야 하는 소리가 들려지고 보지 말아야 하는 것만 보이게 됩니다. 심지어는 없는 말을 만들어 내고 그렇지 않은 모습을 그렇게 만들어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삶의 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부정적인 삶의 자리가 우리의 환경과 삶을 지배할 때가 많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현장이 본문이 말하고 있는 도시의 사람들입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이 불공정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자리에 삶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찾아서 새기지 못하고, 그 은혜를 쉽게 지워 버리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에 사람에게 자리를 잡고 있는 큰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될 때에 사람의 행동범위가 달라지게 되며, 그것이 사람들 속에서 더 좋은 관계를 형성하도록 이끌어 간다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를 형성하도록 이끌어 갈 때에 자신에게 돌아오는 축복된 선물이 바로 더 좋은 이름인 것입니다.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 속에서 더 나은 자로 살아가는 길은 더 좋은 이름으로 자신을 세울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더 좋은 이름으로 세워지는 삶의 원동력은 은혜의 자리에다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은 어떤 글자적인 의미보다는 한 인간을 자기 자리에 세우기 위한 안내장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이름 하나들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름은 정말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름을 새롭게 고쳐 주시기도 한 것입니다. 더 좋은 이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더 좋게 자리를 잡을 때에만이 불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세상을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영이신 성령님이 사람 속에서 다스려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를 다스리는 자리는 나를 받아 주시는 예수님의 자리 곧 은혜의 자리가 내 속에 자리를 잡을 때에 고백하게 되며, 그 입술의 고백이 곧 더 좋은 이름의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성읍은 더 좋은 이름으로 부를 수 있도록 세워 주었으나 그 이름을 거절하므로 악한 이름으로 불리어 진 성읍보다 더 악한 이름으로 불리어 지게 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유는 은혜의 자리를 고백하지 못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고백하여 더 좋은 이름으로 세워 집시다. 그것이 더 나은 자로 세워진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아갑시다(22, 24).

  사람이 살아가는 길에는 어느 누구도 완전한 자로서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인생 행로에서 손가락질 받지 않고 사는 길은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양심을 회복하는 자리에 자신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인간  사회를 건강한 사회로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며 인간 관계의 축복을 이어가는 사회적 가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가치를 일컬어 인간성의 회복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지구촌을 요란하게 했던 인류 사회의 목표는 이윤 추구만을 위하여 숨돌릴 여유도 없이 달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기계가 만들어 내는 정보자료(data base)를 세상을 변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영웅으로 모시고 거기에 적합한 인간만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익이 적은 인간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자리를 세워 주는데 유익이 못되는 이익이 늘어날때 인간 사회는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사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 사회의 악의 축인 것입니다. 이 축의 중심에 있는 사람을 일컬어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자리를 본문에서는 두로와 시돈이라고 했고, 소돔 땅이라고 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즉 하나님의 동정을 구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그 도시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고 세워지게 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 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자리가 다른 악한 자리 때문에 선한 자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남다르게 받은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신 은혜로 세워졌는데 그 자리가 더 나은 삶으로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성도가 더 나은 자로 살아가는 자리는 하나님이 긍휼이 여기는 자로 자신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가장 선한 사람의 모습은 은혜로 자신이 세위진 것을 깨닫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시는 자리는 부족한 것을 품으시고 그것을 붙들어 주시는 자리를 말합니다. 성도의 자리는 자신의 삶속에 하나님의 긍휼히 여겨 주심이 함께 하심을 깨달을 때에 미래를 열어 갈 수가 있습니다. 금년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아 갑시다. 그 자리는 부족한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더 나은 자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한 해가 새롭게 찾아 온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나은 자로 세워 주시려는 자리입니다. 지난 날에 나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지워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붙여지는 이름이 복이 되어 늘 하나님과 사람 앞에 기쁘게 세워지는 삶을 살아갈 때에 더 나은 자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의 부족을 채워 주시고 그 부족한 것을 품어 주시며 붙들어 주셨음을 깨닫고 사는 것입니다. 복된 세상의 주역으로 살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