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자리

성도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자리(창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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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는 날아가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고개를 뒤를 돌린 새는 죽은 새라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자리를 복되게 열어가는 지혜의 자리를 가르쳐 주는 자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에 집착하고, 평범한 사람은 현재에 만족하며, 현명한 사람은 미래를 준비하며 설계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성경은 말하기를 지혜로운 사람 곧 미래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미래 속에서 우리를 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그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지금의 어려움과 고난의 자리에서 믿음을 잃지 않는 성도로 세우라고 권면하십니다. 옷은 새 것일 때부터, 명예는 젊을 때부터 소중히 하라고 했습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믿음을 잃지 않는 생활 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을 신앙 인격이라고 하며 사람들은 그것을 선한 품성을 지녔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성도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를 보여주고 있는 자리가 본문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소원을 들어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을 잃지 않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 소원이 열려지는 미래를 약속하실 때에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세워 주셨다는 것입니다.

1.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삽시다(1).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가 살아가는 세상의 자리가 어떠하며 그 세상이 받아 주는 자리가 어떠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세상에서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를 세워 주시는 분명한 약속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떠한 것이며 세상이 받아 주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즉 세상은 끊임없이 전쟁터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성도가 먼저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막아주시고 보호를 받는다고 해서 세워지는 것이 아닌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이 받아 주는 자리는 분명한 상급이 보여 질 때에 세상은 그를 받아주며 세워 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자리이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의 자리입니다. 아브라함의 자리는 무엇이 부족하여 남에게 구걸하기 때문에 세워지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리는 자신에게 친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약속해 주셨는데도 수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그 약속을 접어 버린 채 살아가게 된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너진 자리를 품고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성도의 삶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이 무너진 자리 곧 채워지지 않는 부족한 한가지 때문에 성도가 겪는 갈등은 너무나 큰 것이 됩니다. 자신은 괜찮은 것처럼 보일려고 해도 사람들은 그 아픔을 지적하며 들추어 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방패가 되시고 상급이 되시려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 주시면서 낮이 되면 사라지고 밤이 되면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반짝이는 별을 가리키며 자손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자리를 훗날 히브리서 기자는 저술하기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 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히11:11).”로 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가정이 세워진 중심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 믿음으로 살았던 다윗의 무너진 자리가 있습니다. 일반 사람으로서는 당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그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좇아내고 임금이 된 자리입니다. 이 아들에게 쫓겨 갔던 다윗이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시 3:3).”라고 노래했습니다. 살아계신 미쁘신 하나님을 방패와 상급으로 삶속에 받아 들이면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열어가는 성도의 삶을 회복하며 살아 갑시다.

2.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은 나 자신임을 믿어야 합니다(4).

  사람의 자리가 무너지는 자리는 작은 생각 하나가 큰 파괴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쉽게 지워 버릴 수 있고 쉽게 잊혀지는 것도 있지만 자신의 삶을 벽에 잘 박힌 못처럼 고정시켜 버리고는 끊임없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공격의 무기가 되어 버리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절망이라고 합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큰 사건 때문에 오는 것도 있지만 사람은 오히려 큰 일을 당하면 쉽게 정리를 할 수 있는 결단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라서 쉽게 판단했던 자리가 심각하게 다가오면서 자신의 삶에 큰 상처로 공격해 올때 사람은 생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세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삶속에서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으로 자신을 묶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작은 생각의 자리를 절망(hopelessness)이라고 합니다. 이 절망이 사람을 죽음의 자리에 세워 버리므로 살아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자리는 자신의 존재감을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이것으로 닫혀진다는 것을 받아 들일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존재가 이 하나 때문에 닫혀지게 되므로 다른 모든 것들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 케고르는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까지 역설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자리를 살펴보면 조용히 누구에게 표현하지도 않은 채 닫아 버린 자리를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에게서는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절망적인 상태를 하감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존재감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큰 기대치를 열어 보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신 미래를 세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리에 결코 다른 사람을 대신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그렇게 세워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9).”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은 오로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의로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으로 세상에서 세워지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

3. 하나님은 예배의 자리에서 성도의 미래를 세워 주십니다(9).

  세상에서 사람들이 정말 힘들어 하는 자리는 함께 해야 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입니다. 이 자리가 신앙인의 가정에 의외로 넓게 자리를 잡고 있음을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그리고 열 형들과 요셉의 자리였으며 사울 왕과 다윗의 자리였습니다. 이 자리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데서 우리를 찾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인간의 삶을 힘들게 하는 분명한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 속에서 소통할 수 없는 대립각이 크게 만들어져 버린 것입니다.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자리이기에 이 대립각은 더 큰 고통의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대립각이 내려질 때에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회복하게 되어 정상적인 모습으로 세워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대립각을 세워 인간 관계를 닫히게 하는 것을 성경은 죄의 속성 때문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라고 하였습니다. 이 죄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하나님과 대립각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대립각을 무너뜨려서 하나님과 소통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고통의 대립각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 자리가 너무나 힘들었던 예수님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그 고통의 자리를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은 짐승을 죽게 하므로 피를 흘려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겪을 고통의 자리가 너무나 크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의 자리를 열어 보이시는 자리에 아브라함에게 짐승의 희생을 요구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 고통을 맡아 주시겠다는 약속의 증표였습니다. 이 희생의 제사가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짐승 대신으로 희생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예배로 우리를 찾아 주신 것입니다. 제사는 나 대신에 짐승의 피 값으로 나를 받아 주신 자리이지만 예배는 나 대신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피 값으로 나를 받아 주신 자리입니다. 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찾아 주신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성도를 세워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갈수록 고통의 대립각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받아 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축복된 예배 곧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있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어 나를 세워 주시는 하나님으로 세상을 정복하며 그 자리를 잘 통과하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자녀가 세워지면 부모님이 영광스러운 것처럼 성도가 세상에서 세워 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므로 하나님은 나에게 방패와 상급으로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오직 나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를 세우시려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나를 예배로 부르신 것입니다. 늘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나 세상에서 나를 세워 주시는 축복을 누리며 살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