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을 보고 회개하지 않는 자
표적을 보고 회개하지 않는 자 <눅11:29-32>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알기 위해서 먼저 표적을 구한다.
\"예수께서 메시야라면 그 표적을 보여라.\"
\"성령의 역사라면 그 표적을 보여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 표적을 보여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 있으면서도 항상 더 큰 표적을 구한다.
\"하나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십니까? 그렇다면 내게 그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라면 또 다른 확실한 표적을 보여 주십시오.\"
진리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밖으로 드러나는 그 무엇인가를 구하는 것이다.
표적을 표적으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한다.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표적을 구하여 표적을 보여 주었는데도 그 표적을 표적으로 알 수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이겠는가?
예수님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했다. 또한 표적을 보여 주어도 그것을 표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이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하는 말씀 \"회개하라. 심판이 가까왔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고 하는 실제적인 간증과 함께 전하는 말씀을 듣고 그들은 회개하였다. 이것은 표적이다.
표적이라 함은 꼭 밖으로 들어나는 어떤 나타남, 즉 외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현상만을 표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표적이지만 내적으로 증거되는 것도 표적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이나 있었다는 하는 사실, 즉 그 표적을 믿고 회개했다고 하기 보다는 요나가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가운데서 전하는 말씀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하였던 것이다.
표적은 외적이기도 하지만 내적이기도 하다. 표적을 객관적이고 외적인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적이며 주관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표적을 객관적이고 외적인 것이다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표적을 표적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표적은 오히려 내적이고 주관적인 표적을 표적으로 알고 믿으려 할 때 더 큰 확신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 곁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질병을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표적을 보여 주었다. 그때 외적 표적만 보았던 사람들은 참된 진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 표적과 함께 역사하는 내적인 감동, 깨닫게 하심 등을 표적으로 아울러 받아 들였던 사람들은 참된 진리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외적인 표적과 함께 오는 내적인 표적을 구하는 자가 되라. 그렇게 할 때 참된 진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표적을 보고 회개했다. 그러나 예수님 곁에는 그와 같은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동안 있었던 것만 요나의 표적이 아니다. 요나가 말씀을 증거하되 확신 가운데서 증거하는 모든 것이 표적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보이신 표적은 사흘동안 죽음가운데 있다가 부활하신 것만 표적이 아니라 예수께서 살아계시면서 하시던 모든 말씀,
그 말씀과 함께 행하시던 모든 능력도 그 시대에 보여주신 예수님의 표적이다. 십자가의 죽으심만 표적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들 속에 있기 때문에 이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보여 주어도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표적으로 보고 회개했지만 어찌하여 더 큰 표적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느냐는 것이다(32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표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이 있어도 표적을 표적으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참된 믿음에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
그들에 표적이 없어서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아도 표적으로 알지 못하여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과 함께 수많은 표적을 보여 주어도 그들은 그 표적을 믿지 않도 또 다른 표적을 구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표적이 없는 세대가 아니다. 세상을 보라.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보라. 니느웨 성보다 더 악한 세대이다. 이것이 표적이 아닌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라.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보라.
말씀 안에서 치유되어지고 회복되어지는 역사들을 보라. 이 모든 것이 표적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표적을 표적으로 보지 못하는 눈먼 세대들, 표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세대이기에 회개하지 않고 있다.
외적인 표적만을 구하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다. 내적인 표적을 아울러 구해야 한다. 내적인 표적을 깨달을 때 회개하게 된다. 외적인 표적과 함께 오는 내적인 표적을 보라. 내적인 표적은 영안이라 할 수 있다.
표적을 표적으로 볼 수 있는 영안이 있어야 한다. 표적을 표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표적을 표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시되 아무나 알 수 있는 비유가 아님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는 열려 있었으나 그외 사람들에겐 닫혀 있는 말씀으로 비유하셨다. 표적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사람들만이 표적을 표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표적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표적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표적을 보고 회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외적 표적만 구했던 사람들은 무리들이었다.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내적인 표적을 함께 주시는 분이심을 알고 내적인 표적을 함께 구했던 사람들은 은혜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