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좋은 세상

더 좋은 세상(롬8: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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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살이의 일생은 하루입니다. 어떤 것은 이틀을 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몇 시간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하루 종일 비가 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맑은 바람 한번 들이켜 보지 못하고, 따스한 햇살 한번 쬐어 보지 못한 채 일생 동안 비만 맞고 있다가 생명을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긴 시간(보통1년에서 3년)동안 물속에 있다가 겨우 알에서 깨어나 맑은 세상을 날 수 있는 성충이 되었는데 하루 종일 비가 온 것입니다. 하루살이들이 맑은 바람과 햇살 속에서 일생을 보내다가 해지기 전에 냇가를 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은 수컷들이 암컷을 찾아 사랑을 구하고 자기들끼리 사랑을 나누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컷이 기적 같이 암컷을 만나면 물속에 알을 낳고 몇 시간 만에 하루살이의 일생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록 하루살이는 아닐찌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도 앞으로 살아 갈 시간이, 그리고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가 온다고 해서 우리의 시간과 자신의 자리를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의 현장에서 더 좋은 세상을 열어 주시는 지혜와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더 좋은 세상에 초대 받은 사람입니다. 더 좋은 세상을 열어 갑시다.

1. 약함의 자리에서 세움을 받는 세상입니다(26).

  교회와 이스라엘이라는 두 공동체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의무적으로 그 공동체의 회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는 수많은 지구촌의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의 모임이기에 그 공동체의 규모는 지극히 작은 자리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공동체 회원이기에 산술적인 수치에 따라 평가를 한다면 세상의 자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음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1:26)”라고 하며 세상적 평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처럼 지구촌의 모든 사람을 교회 공동체 속으로 불러 주지 아니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 속에서 되어지는 일이지만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 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고전10:5)”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는 많은 사람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택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자리마져도 세상보다 부족한 자리에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세계의 본질이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부족한 자리에 있는 자들과 함께 하셔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천국이라는 것이며 그 천국은 이 세상에서 정말 공정한 축복의 에덴 동산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약함의 자리에서 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약함의 자리에서 세움을 받지 못하고 버려진 아픔이 너무나 많기에 세상은 온통 상처투성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약함의 자리에서 세움 받는 세상을 열어 주시므로  더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이고 이런 세상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세워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리를 본문에서는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세우시려고 탄식하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님이 우리를 세워 주시려고 약한 우리 안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유는 악한 것 때문에 유혹을 받게 되고 쉽게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을 환영하고 늘 인정하여 고백하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

2.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세상입니다(28).

  더 좋은 세상은 어디서 출발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나와 함께 하는 자리가 있어서 그것이 좋게 자리를 잡을 때입니다. 성도의 축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리에서 성도의 삶이 더 좋은 세상으로 세워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방향을 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세상의 방향이 돌려지는 것처럼 큰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방향이 돌려지는 상황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것에 대한 짐작이나 추측이 아니고 분명한 사실을 인지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나에게로 향하도록 방향을 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나를 부르셨다는 것과 그래서 나 자신이 그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자리가 분명할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게 됩니다. 함께 하는 자리가 좋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고통으로 다가오며 큰 짐이 되어 부담이 된다면 이것처럼 어둡고 닫혀지는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리가 우리가 고통 당하는 가정이 될 수 있고, 직장이 되며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자리일찌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성도를 힘 있게 세워 주셔서 더 좋은 세상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죽음의 자리에 가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라는 자리에서 자신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부끄러울 정도로 경멸히 여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세울 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자리 곧 더 좋은 자리를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세상을 이루는 가장 중심된 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자신을 세우는 것이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하게 자리를 잡도록 세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슴을 치는 것 중의 하나는 자신이 온갖 노력을 다 해 세웠는데 그것이 무너졌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도록 세워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고백하여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한 역사를 이루는 더 좋은 세상을 열어가는 성도가 됩시다.

3. 자신의 모습을 회복하는 자리입니다(29-30).

  16세기 영국의 그레샴이라는 사람이 주창한 경제 이론이 바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가치가 낮은 화폐를 가치가 높은 화폐와 같은 가격으로 거래를 하게 하여 비싼 가치의 화폐를 소비하지 않고 나라의 재산으로 환수하게 하고 시장에는 가치가 낮은 화폐 곧 별로 손해가 되지 않는 화폐만을 사용함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경제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적 이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은 한시적이요 눈가림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회복하여 더 좋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세상적 원리와 정반대되는 자리에서 우리를 세워 주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다.」라는 원리입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을 떠난 소망이 없는 세상 곧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만 있어야 할 우리를 위해 온 인류의 악한 자리를 대신하여 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 악한 자리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형벌을 받으시므로 악한 자리가 선한 예수님의 자리로 회복되어 영광스런 대접을 받게 된 것이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악한 자리에 있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느것으로도 비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 값으로 가장 영광스런 축복의 사람으로 자신이 세워진 것을 믿고 살 때에 더 좋은 세상으로 열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 세상을 이루는 지혜는 먼저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 속에 자리를 잡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성도로 세상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자리를 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더 좋은 세상을 세우시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그 자리를 정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셔서 예수님을 믿으므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세워 주시며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우리를 세워 주시므로 부족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영화로운 자로 세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화로운 자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시는 자리에 가장 크게 보아야 하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아시면서 아낌없이 사랑해 주시고 받아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세워 주시려고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심의 자리입니다. 이 받아 주심을 믿고 나도 예수님을 받아 들여 내 안에 계심을 고백할때 성령님이 나의 인간성을 다스려 회복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양화 곧 복된 사람이 되어 악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 좋은 세상이 열리고 자신의 회복된 모습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빌2:23)”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나의 약함을 사랑하시고 세워 주심을 믿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자리에 나를 복되게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을 새롭게 회복하여 세울 때에 누리게 됨을 깨닫고 세상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다는 축복의 자리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