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자리에서 일어 납시다

최악의 자리에서 일어납시다(왕하5: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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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도움을 결코 늦추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해서 하나님이 도와 주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인간이 힘들어 하는 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밑바닥에 쓰러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밑바닥의 삶이란 마음속에 희락이 말라 버린 것을 말합니다. 그 바닥에 대해 정호승 시인이 쓴 시 한편을 소개해 봅니다. 「바닥까지 가 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 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본문은 한 인간의 삶이 최악의 자리로 떨어진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머슴의 자리도 불운한 환경인데 거기에 문둥병 환자로 추락하고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바닥까지 추락한 것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그 바닥 곧 최악의 자리에서 일어서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복음이라고 하며 인간의 바닥에 그 복음을 심어 주시려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추락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부활의 자리에다 온 인류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최악의 자리에서도 일어나는 성도로 살아 갑시다.  

1.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지 못하게 합시다(20).

  과거의 자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이 몸부림치며 살았는데도 채워지지 않은 자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심의 자리에서 미래를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이 욕심의 자리 곧 과거의 부족함이 축복된 미래를 결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말하기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약1:15). 인간의 자리라는 것은 완전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뒤돌아보기를 좋아합니다. 이 뒤돌아보는 자리에서 더 좋은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보다는 그 생활에 쉽게 적응해 버리는 것이 인간의 자리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리에는 좋지 못한 자리가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거듭될 뿐입니다. 이 인간의 악순환이 거듭되는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의 복된 미래를 열어 주시는 자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고 하신 것입니다. 쟁기는 그 당시 농경 사회에 있어서 최고의 동력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미래를 위하여 축복의 자리로 방향을 돌려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미래를 위해 쟁기를 잡은 인간의 자리를 크게 클로즈 업 하셨습니다. 그 인간의 자리에 가장 위험스런 자리가 바로 뒤를 돌아보는 자리 곧 과거가 인간의 미래를 결정짓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는 자리입니다.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어 그의 미래는 영원히 닫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롯의 처를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라(눅17:31,32)”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과거의 경험은 참고의 자료는 될 수 있어도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이기에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족쇄 채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성도의 미래 속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약속의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자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의 자리에서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자리인 머슴의 자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호박이 덩굴채로 굴러 들어온 것을 주인이 그대로 버린 것이 아까워 그것을 주우려고 자신의 삶에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고침 받은 나아만 장군의 흉칙한 문둥병이 자신에게로 옮겨 진 것입니다. 자신의 불행한 과거의 자리에서만 생각한 것이 미래를 닫히게 하는 결정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의 자리에는 다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미래를 결정짓게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미래는 전혀 새로운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의 바닥에서도 일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읍시다(22,23).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볼 때에만이 자신을 복되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여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이 바닥에까지 떨어졌을 때에 찾아 주셔서 세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자리는 자신이 바닥에까지 내려가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 자리를 일컬어 처음 사랑의 자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자리에 은혜를 입혀 주어서 세움을 받게 되면 인간의 자리에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 자신에게 있었던 바닥의 자리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의 자리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 인간의 자리는 그야말로 바닥 인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바닥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그에게는 금과 은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심부름을 하는 사람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으로 세워 졌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닥의 자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고 만 것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변절시켜 버린 것은 금과 은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주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지배하는 자리로 자신을 옮겨 그 자리에 주인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 속에서 전개 되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머슴의 자리에 있을찌라도 주인의 일을 대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듣고 한 나라의 군대 장관이 그대로 순종하여 문둥병을 고치게 되었다는 것이요, 결코 머슴의 자리에서는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머슴의 자리도 받아 주시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자신을 세울 수만 있다면 인간의 자리는 더 풍요로워 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망각의 존재이기에 자신의 자리를 잊어 버리고 남의 옷을 입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남의 옷이라는 것을 알고 그 옷을 벗어 버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귀하게 볼 수 있는 자가 될 때에 자신의 세상을 부요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 자리가 바로 바닥을 보는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리를 치료해 주시고 회복해 주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닥 인생에게 일해 주시는 하나님을 잊어 버린 자리가 본문에 나오는 머슴의 자리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일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보는 성도가 되어 자기 자리의 복을 잃어 버리지 맙시다.

3. 미래를 과거에다 세우지 맙시다(27).

  성도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비밀리에 나를 위하여 중요한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믿는 성도가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은 미래를 과거의 자리에다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자리가 본문의 사건입니다. 미래를 과거에다 세우면 상황은 더 악하게 될 뿐입니다. 머슴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된 것은 그의 미래는 결코 불행하지 않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머슴의 자리에서 크게 보았던 것에 던져버린 것입니다. 금과 은을 풍족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을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큰 사람인가 아니면 금과 은을 가진 사람이 더 큰 사람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머슴의 자리는 금과 은을 풍족하게 가진 사람에게 종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금과 은이 풍족한 사람을 지시하는 자리에 세워 졌다면 다시는 자신의 과거로 돌아가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머슴은 자신의 미래를 종으로만 살았던 과거의 자리에다 세우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한 자리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고침을 받았던 나아만의 문둥병이 머슴에게 옮겨 간 것입니다. 설상가상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빌린다면 기구한 운명이라고 합니다. 기구한 운명이란 자신을 향해 불행한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비밀리에 중요한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지배하여 문둥병이 걸린 버려진 머슴의 인생으로 바닥에 떨어진 최악의 자리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성경 속에 침묵으로 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비밀리에 중요한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열왕기하 7장과 8장의 사건입니다. 신분이 불명확한 세명의 문둥병자의 출현과 그 문둥병자들이 민족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전도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감격적인 장면은 문둥병이 걸렸던 머슴이 나라의 임금과 독대하여 한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해 일해 주시는데 그 자리는 맹목적인 자리가 아니고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 세울 때에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문둥병자들의 말이 증명해 줍니다.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면 벌이 우리에게 미치리라(왕7:9)”고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고 행하는 자리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미래를 과거에다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은 최악의 자리에서도 일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눅17:10)”고 하셨습니다. 최악의 자리에서도 과거로 되돌리지 말고 바닥의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일 해 주심을 믿고 믿음의 자리에서 미래의 세상을 복되게 열어가는 성도의 삶을 회복하며 살아 갑시다.